지젝과 데리다 사이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시선이 제시되고, 이 때문에 초래되는 대상의 명백한 전치"(39쪽)를 가리키는 '시차(parallax)'를 지젝은 "두 층위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14쪽)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차적 간극이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posing an irreducible obstacle to dialectics)"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어떤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을 변증법 앞에 갖다놓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에서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곧 지젝의 내기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은 퇴각 국면에 놓여 있다. 이건 굳이 지젝의 정세판단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오히려 레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레닌의 전략적 통찰은 이런 것이었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군대가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많은 규칙들이 요구된다. .. 멘셰비키 당원이 '이제 퇴각하는군요; 나는 항상 퇴각을 지지해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퇴각하십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회답으로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 우리의 혁명 법정은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법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답한다."(14-15쪽)  

지젝이 영어판 <레닌 전집> 제33권(1966)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목인데, 엊그제인가 러시아어 원문이 뭔가 싶어서 러시아어판 <시차적 관점>(2008)을 들춰봤다가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누락돼 있는 걸 발견했다. 국역본을 기준으로 하자면 "많은 현대과학들이 자발적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지만, 그들은 철학적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란 문장 다음에 바로 16쪽으로 넘어가 "철학적으로 말하여..."로 시작되는 문단이 이어진다.    

Славой Жижек Устройство разрыва. Параллаксное видение The Parallax View

실수라기보다는 고의적인 누락으로 보이는데,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같은 주장이 러시아 번역자에겐 불편했던 것일까?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인식하기 어려운 게 러시아의 현실이란 걸 암시해주는 듯싶어서 유감스럽다.   

아무튼 그래서 러시아어본의 참조 없이 레닌의 통찰을 영역문으로만 따라가보면, 먼저 그는 군대가 퇴각시에는 진격시보다 백배 이상의 '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자는 '규칙들'이라고 옮겼지만 '규율'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라면 '백배 이상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퇴각에 동의하며 맞장구치는 멘셰비키에 대한 레닌의 응답은 이렇다.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 our revolutionary courts must pass the death sentence, otherwise they are not our courts, but God knows what."(4쪽)  

국역본은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을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라고 옮겼는데, "멘셰비즘의 공표에 대해서"란 뜻 아닌가? 핵심은 분열적인/분파적인 주장의 공개적인 표명에 대하여 혁명 법정은 가차없이 사형 선고를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겠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 엄격하게 단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건 뭐 혁명 법정도 아니라는 것.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혁명 법정'은 아니라는 것("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란 번역도 따라서 부정확하다).   

이어서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지젝의 진단.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사회정치적 참패 때문만이 아니다;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위기는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했다는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소멸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설명되어야 한다)."(15쪽)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는 "the decline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the philosophical underpinning of Marxism"을 옮긴 것인데, 나로선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한물간 것으로 취급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해보겠다는 것이 국역본 표지의 문구대로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이다.   

그러한 도전에 나서면서 지젝이 먼저 구분하고 있는 것은 '유물변증법(materialist dialectic)'과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다. 유물변증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은 '규정적 반성'에서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전환)이며 이것이 핵심이다. 반성(reflection)이란 말에는 '반영'이란 뜻도 포함돼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물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치 거울상처럼 좌우가 서로 바뀐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단어 혹은 단어들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변증법적 전환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덧붙여, '부정변증법'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전환이라고 지젝은 말한다(리뷰기사 참조).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지젝의 경우 헤겔-라캉주의와의 결합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적으로 말하여, 스탈린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우둔함의 화신이라는 말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며 사실 그 자체가 요점이다."(16쪽) 원문은 "That, philosophically speaking, Stalinist 'dialectical materialism' is imbecility incarnate, is not so much beyond the point as, rather, the point itself." 여기서 '우둔함의 화신'이라고 한 것은 '스탈린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결합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탈린주의와 결합시킨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이며 이론적 과오이고 요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바로 그러한 결합이 요점이고 문제의 핵심이다.   

"그 이유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헤겔적 무한판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즉 이를 골상학의 공식인 '정신은 뼈다'와 같이 가장 높은 것들과 가장 낮은 것들의 사변적 동일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since my point is precisely to conceive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a Hegelian infinite judgment, that is, as the speculative idnentity of the highest and the lowest, like the formular of phrenology 'the spirit is a bon.'" 

역자는 여기서 두 번 나오는 'identity'를 '정체성'과 '동일성'으로 구별해서 옮겼는데, 내가 이해하기엔 둘다 '동일성'이란 뜻이다. 해서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을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이라고 옮겼지만 나는 "나의 헤겔-라캉주의적 입장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동일성"이라고 교정하고 싶다(identity of A and B 구문). 요컨대, 지젝은 '헤겔-라캉주의 =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등식을 '정신 = 뼈'라는 헤겔식 무한판단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완고한 네번째 교사(steely Fourth Teacher)'는 '스탈린'을 암시하므로 '완고한'보다는 '강철 같은'이 더 낫겠다. '스탈린'이란 이름 자체가 '강철(스탈)'에서 파생된 가명이기도 하고.  

이제, 나머지는 사소하다. 23쪽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한자 이름이 잘못 병기된 것, 24쪽에서 '내재적 견해들(inherited opinions)'이 '전승한 견해들'의 오역이라는 것 등. 25쪽 이하에서 '들뢰즈의 보편적 단일성이라는 개념(Deleuze's notion of universal singularity)'에서 'singularity'는 보통 '단독성' '특이성' '독특성' '개별성' 등으로 옮겨지는 개념인데, '단일성'은 처음 보는 듯하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26쪽에서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주요 양식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다수성에 최소한의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이다."에서 '철학, 과학, 정치'는 '질서(order)가 아니라 지젝이 다루고자 하는 세 개의 주요 '양식(mode)'이다.   

그리고 28쪽 이하에서 'democracy-to-come'이라는 데리다적 개념은 '미래 중심 민주주의'라고 옮겨졌는데, 기존의 번역어 '도래할 민주주의'와의 관계도 각주에서 언급이 되면 좋았겠다. 29쪽에서 언급된 나보코프의 소설 <왕, 왕비, 악당>은 체스용어에서 따온 것이라 <킹, 퀸, 잭>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국역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서론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데리다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었다. "나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므로, 아마도 지금이 이러한 '극소 차이'와 그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의 근접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적절한 순간일 것이다."(28쪽)이라고 말하는 대목. 비록 라캉주의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제기해왔지만 이 대목에서 지젝은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오래전에 '지젝과 데리다 사이'라고 제목을 단 페이퍼가 생각이 나서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09. 04. 03-04.


댓글(4) 먼댓글(2)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네 멋대로 하지 마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1 11:05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2. 시차적 관점과 사변적 동일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04 01:39 
    며칠전부터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를 다시 손에 들고 주로 후반부를 읽었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두께가 두께인 만큼 단숨에 일독하긴 어려운 책이어서 이렇듯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어두는 것. 단, 원서와 같이 읽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독자라면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여러 번 숙독해봄 직하다(일독도 어렵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교
 
 
릴케 현상 2009-04-0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댓글들을 안 다네요. 1등 놀이를 하게 만드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0 | URL
아직 아무도 안 읽으신 책인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번역바로 잡기는 한번 더 읽어봐야겠군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1 | URL
지젝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정독해볼 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