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창출을 요구하고 있는 강내희 교수의 칼럼이다. 

  

경향신문(09. 04. 10) 청년세대와 대안문화

1993년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발칙한’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 적이 있다. 90년대 초라면 서울의 압구정동이 소비의 메카로 떠오르고 ‘오렌지족’을 위시한 소비지향적 신세대가 등장하던 때이다. 문제의 책을 펴낸 저자는 미메시스라는 그룹으로, 이들은 ‘386세대’로 통칭되는 80년대의 청년세대가 금욕주의의 운동권 문화를 신세대에게 강요한다며 나름대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90년대후 신세대 소비문화 빠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의 시대 변화를 감각적으로 반영했다고 생각된다. 한국말로 된 랩 음악을 처음 시도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이다. 당시 젊은 세대는 서태지에게 열광했고, 문제의 책은 신세대 감수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때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80년대 운동권 문화는 지나친 엄숙주의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었던 터라 서태지의 새로운 감수성 실험과 미메시스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방은 운동권이 강조하던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당시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욕망의 분출도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신세대가 걸었던 길은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투항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청년세대가 사회적 의제를 주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생들이 전국적 의제로 집단행동을 한 것은 통일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북으로 간다며 연세대 교정에서 농성을 벌인 96년이 마지막이다. 이후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자로 변해버렸다. 신세대는 운동권 선배의 금욕주의, 엄숙주의를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해방을 위한 욕망을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의 성격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의 청년세대가 보여준 문화는 소비문화였다. 이들이 비판한 80년대의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넘어선 대안문화를 실험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전 세대가 문제점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80년대 청년세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권위주의로 흐른 측면이 적지 않았고, 세계 동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곧 망해버릴 소련의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래도 당시 청년세대는 현실을 뛰어넘는 대안문화를 추구했다.

대안문화로 ‘새 해방’ 추구 기대
80년대 대학 곳곳에서는 시국 시위와 함께 마당극이 수시로 펼쳐졌다. 강의시간이면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러나 개인의 관찰로 판단한다면 오늘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도전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개인의 패션과 스타일, 학점, 취업 등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으나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뒤로 미루는 듯하다.

오늘의 청년세대는 욕망의 표출에서 해방을 찾기 시작한 90년대 신세대의 직계 후배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일까. 소비문화로부터 벗어나려고 기획하는 것일까. 청년세대가 새로운 삶을 실험하지 않는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강내희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 

  

80년대 세대의 '정치적' 청년문화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에서 터져나온 '신세대 문화'가 결과적으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투항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하면서 필자는 동시에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한다. 진단은 맞지만, 주문은 모호하다.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던 '압구정동' 세대의 문화가 대안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미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 아닌가?(이명박 정권만큼 어떠한 도덕적 금제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노골적으로 충실한 정권이 또 있었던가?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포식자들만큼 자신의 권력욕과 성욕에 충실한 이들을 더 찾아야 할까? 이들은 모두 지 꼴리는 대로 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건 이미 청년세대의 구호가 아니다. 세상이 앞질러,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자본이 노골적으로 챙기는 구호가 '네 멋대로 해라'이며(물론 그들을 '소비주체'로 호명하는 구호다. "너도 이런 거 살 수 있어!"), '세상에 너를 소리쳐!'다. 이명박 장로님도 필진으로 참여한 청소년 '처세서'의 제목도 '네 멋대로 살아라'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불온한 대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문화적 '주류'의 목소리다. 차라리 '별일 없이 산다'는 구호가 오히려 더 '불온'하지 않은지? "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라고 말하기. 혹은 "난 알아요!" 대신에 맥없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라고 주절거리기(그래도 '아무렇지 않'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다. 소심하긴 해도 '루저 문화'의 저항적 에너지는 '어'라는 한음절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저항,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시차적 관점>의 한 문단에서 암시를 얻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15쪽)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지난번에도 적은 바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던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 즉, 저항과 전복의 포즈만으로는 '자유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체위를 다 시도해본다고 해서 제도가 바뀌는 건 아니다. 지젝은 '혁명적 정치학'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든다. 각각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사례다.  

"살롱에서 토론하며 자신들의 모순된 언행을 즐기던 자유론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권력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역겨운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혁명 전 프랑스에서 꽃피웠던 여러 자유사상가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혁명적 공포의 엄격한 새로운 질서로 전도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번역에서 '역겨운 예술가들'은 'pathetic artists'를 옮긴 것인데, '측은한 예술가들' 정도가 아닌가 싶다. 살롱에서 토론을 즐기던 자유론자들이나 권력에 나름 애교 있게 항의하던 예술가들이나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론 권력에 '기생'하는 족속들이었다. 오늘날 그런 이들의 사상과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살롱에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혁명적 공포'를 불가불 수반하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자 한 시도를 지지하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에도 피바람 부는 '혁명 만세'를 외칠 수 있는지.    

"유사하게 절대주의자, 미래파, 구성주의자 등이 혁명적 열정의 우위를 두고 경쟁하던 시기인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첫 문장의 '혁명적 열정'이나 두번째 문장의 '혁명적 열기'나 모두 'revolutionary fervor'를 옮긴 것이다. '강요된 집단화(forced collectivization)'는 '강제 집산화'가 낫겠다. 그런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실정적/긍정적 사회정치 질서로 옮기고자 했던 시도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것. 요컨대 핵심은 '혁명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거기에 비하면, "혁명 이후의 현재가 짊어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들이 자유에 대해 가진 만개하는 꿈의 진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혁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역겨운 것은 없다."(16쪽)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은 제시하면 "There is nothing ethically more disgusting than revolutionary Beautiful Souls who refuse to recognize, in the Cross of the postrevolutionary present, the truth of their own flowering dreams about freedom." 즉, 자유에 대한 열망을 실컷 늘어놓다가 정작 혁명적 공간이 열리자 '이런 게 아니었어'라고 부인/회피하는 태도를 지젝은 '아름다운 영혼'의 역겨운 태도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대안문화'가 아니다. '질서'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문화'의 '대안'은 가식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저항'도 '도발'도 '전복'도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가 새로운 질서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이 생략된다면, 모든 체제비판은 체제 기생적인 비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저기서 "네 멋대로 해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그러한 조건에 구속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면, 네 멋대로 하지 마라!..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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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영혼'이란 일종의 비꼬는 듯한 표현인가요?

로쟈 2009-04-11 15:35   좋아요 0 | URL
헤겔의 용어입니다. '순진한 주관주의' 정도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은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라서 순진한 주관주의를 거시기하게 보았겠군요.

로쟈 2009-04-12 12:06   좋아요 0 | URL
그냥 누가 봐도 '순진한' 태도죠...

yoonta 2009-04-1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표현들이 난삽한 편이어서..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이 불분명했었는데 로쟈님 설명을 들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결국 헤겔의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체계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도발하는 것은 최초의 반정립적 '부정'은 될 수있을지 모르나
최초의 체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


로쟈 2009-04-11 19:47   좋아요 0 | URL
지젝은 적어도 제 경우엔 헤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가 난삽한 건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10대말에서 20대 초중반이 보기엔 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이나 70년대 초반 태어난 사람들이나 다 아줌마 아저씨들일 뿐이겠지요.

로쟈 2009-04-12 17:52   좋아요 0 | URL
각 세대마다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점점 좀스러워지는 듯해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각자 생각만 하기 바쁘니까요...

paul 2009-04-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기다리신다는 "The Monstrosity of Christ" /Slavoj Zizek 이 출간된 것 같더군요.^^

로쟈 2009-04-12 17: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여름에나 읽을 수 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