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雜記 120528
* 논리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이미 4월 24일에 서평을 썼는데, 이 책에 대한 밑줄긋기 게시하지 않았습니다. 메모해 놓았던 것의 일부입니다.
p 31~32
1) 안티조선은 <조선일보>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극우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2)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북한 정권에 무비판적인 한총련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3) 따라서 한총련과 손을 잡는 것은 안티조선 정신의 훼손이다.
1) 안티조선 우리 모두의 유일한 합의사항은, <조선일보>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2) 한총련은 <조선일보>를 반대한다고 한다.
3) 한총련의 안티조선운동 합류 선언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논리적이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과 같은 수학적 논리가 있는 반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생각할 때 주장의 정당한 근거가 있다면 논리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후자의 경우를 적용했을 때, 한총련의 안티조선의 참여는 참여를 찬성하던, 아니면 반대하던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가 모든 문제의 답을 제시하지 않은 한 예로 생각합니다.
* 내용과 형식
제가 학창시절 수학선생님께서 논리 및 집합에 대해 강의를 하시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을 언급하시면서 '설탕은 짜다'고 결론은 내리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논리는 형식을 담보하지만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1) 독설가는 나쁜 사람이다.
2) 마립간은 독설가다.
3) 따라서 마립간은 나쁜 사람이다.
마립간은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데, 위 글을 보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비논리적이라고 언급한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위 세 문장으로 만들어진 논리는 매우 합당합니다. 마립간이 억울하다면 논리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고 가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모든 독설가는 나쁜 사람이 아니거나 마립간이 독설가가 아니라면 ; 마립간은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논리는 형식을 담보하지 내용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이 수업이후 저에게 어떤 일에 분석에 내용에 대한 분석과 형식에 대한 분석을 나눠서하는 습관이 생겼고, 이것은 저에게 꽤 유용했습니다. 내용과 형식에 관한 저의 가치관에 관해서는 인과 예를 페이퍼로 설명드렸습니다.
* 인과 예
http://blog.aladin.co.kr/maripkahn/5598866
이 유용성을 아래의 예로 설명합니다.
컴퓨터를 이용해 어떤 결론을 내고자 했을 때, 컴퓨터의 하드웨어의 오류나 소프트웨어의 어느 한 곳에 오류가 있든지 필요한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즉 총괄적/총체적 평가에서는 틀렸다. 이 단일 사건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컴퓨터 하드웨어(논리형식)와 소프트웨어(내용) 중 어느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둘 모두 교체하는 것이 옳은 판단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총괄적/총체적 가치판단에서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틀렸다면 전체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이런 가치판단은 여러 상황에 적용( 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주장 (및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에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문제제기에도 적용되며 문제의 내용이나 문제제기 자체는 옳을 수 있으나 문제제기 방식이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비판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의 내용은 옳으나 비판의 형식이 잘못되었다면, 전체적인/총괄적인 비판은 틀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삼자가 보기에 조롱으로 비춰질 수 있는 비판이 옳은 비판 형식인지는 논의를 해 봐야겠지만요.)
* 분노
저는 분노를 포함한 감정의 표출이 최선의 선택을 방해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분노하였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론을 적용하면 자존감을 손상받았을 때, 자존감의 손상이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철학에 도전을 받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입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두 번째 글에서는 분노의 이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ㅎ**님과 ㅃ** ***님의 논쟁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진영/알라딘의 다양성
누군가가 ‘진영’이란 단어를 언급했을 때, 이 단어가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지난번보다는 이번이 더 이 단어의 색채가 짙어진 느낌입니다. 이것이 공고히 되어 알라디너의 다양성의 회손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저의 지난 번 글이 논란을 촉매하였거나 이번 글이 촉매가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합당하겠군요. 그러나 ㅁ님이 쓰신 글이 저의 입장과 동일하기 때문에 추천과 동의를 댓글로 표시한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인 가치관은 <남명 조식>의 서평에도 썼듯이 인仁과 의義가 충돌할 때, 의를 앞세우는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