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育兒日記 140407
내가 아이에 대해 행동을 할 때는 내가 옳다는 믿음을 갖고 했지만, 이번 일은 확신이 없다. 아이가 지난 토요일로 마지막 구구단 7단을 외웠다.
실용지능이 없는 내가 빈민층에 있지 않는 것은 학업 성적 때문일 것이다. 전국 등수나 전교 등수를 따질 정도는 아니었고, 치열하게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수도권 대학에 걱정 없이 갈 것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낙방하고 지방대학을 졸업했다.)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학업 성적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각에는) 순전히 수학 때문이다. 나는 수학 성적을 걱정해 본적이 없다. 흥미를 갖고 공부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성적으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두환 대통령 정권하에 사교육이 금지되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수학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는 것은 생물을 제외한 과학 과목 성적도 보장된다. 국사, 세계사, 국어 작문, 영어, 예체능 등의 과목의 내 성적은 나빴다. 학과 공부에서 수학이 빠지던 날이 기억난다. 이제 무엇으로 내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던.
그리고 수학은 국어 성적과도 관련을 갖는다. ‘내가 오른쪽 나무 밑에서 5개의 도토리를 주었고, 앞쪽 나무에서 6개를 주었고, 왼쪽 나무에서 7개를 주우면 모두 30개가 된다.’ 처음에 몇 개의 도토리를 갖고 있었는가, 지금은 몇 개의 도토리를 갖고 있는가? 이 문제는 국어 이해능력 없이는 풀이가 안 된다.
아이는 분명히 나와 다른 인생을 살 것이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안내할 수 없고 내가 경험한 것에서만 안내가 가능하다. 내가 잘하지 못했던 예체능, 암기과목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조언은 할 수 없지만, 만약 수학을 쉽게 느낄 수 있다면 학창 시절의 학과 공부를 조금은 수월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아이는 구구단을 외기 싫다고 하였고, 나는 구구단 외울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사주었다. 아이는 선물은 받고 싶고 구구단을 외기 싫은 상태에서 어떤 경우에는 울면서 구구단을 외웠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선물이 필요하니 꼭 외우겠다고 했다. 강제성이 규율사회에서처럼 있는 것은 아니나 성과사회처럼 있었던 것이다.
내가 구구단에 집착했던 이유는 산수는 수학이 아님에도 초등학교에서 산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연산에서는 (가감승제 4가지가 아니고) 3가지 덧셈(-뺄셈), 곱셈(-나눗셈), 모듈module이 있다. 아이가 한글, 숫자, 간단한 덧셈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 요즘에는 시각을 알 필요가 생기면서 아날로그 시계 보기를 통해 모듈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있다. 그런데, 곱셈에 관해서는 아이의 동기가 없었다. 그래서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물질적으로 동기부여를 하였다.
이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판단은 아이가 곱셈에 관해 부정적 감정과 연결되었고, 순수하게 공부에 흥미를 느끼기보다 물질적인 것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