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映畵短評 140808

 

<최종병기 활> 별점 ; ★★★★

 

TV에서 방영하는 ‘최종병기 활’을 보았다. 이미 본 영화이지만, 시간을 보내야 할 상황이고 재미있게 본 영화라 다시 봤다. 영화 소개에 영화 ‘명량’ 제작팀이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기둥은 애국심이다. 애국심에는 김규항 씨가 (그리고 김규항 씨의 말을 듣기 전에 나 역시) 말했던 “국익이란 국가의 이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익”과 같은 애국이 있다. 반면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과 같은 애국도 있을 것이다. ‘최종병기 활’에서의 충은 후자다. 하지만 남이(박해일 분)가 역적 집안의 아들로 지배층, 기득권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는 상황적 한계가 백성을 향한 애국심이 발생하게 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드라마 ‘추노’에서는 태하 (오지호)가 다른 천민에게 자신은 비록 현재 천민이 되었지만, 양반출신으로 당신들과 같은 격格 또는 급級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우애다. 남이와 갑용 (이한위 분), 쥬신타 (류승룡 분)와 완한 (이승준 분)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다. 두 청나라 형제 장교의 우애도 우애를 넘어서는 전우애다. (내가 판단하기에) 군대가 일반 사회에 가장 다른 점은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 상황이라면,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전제가 깔린 상황은 전우애라는 폭발적인 감정을 수반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이런 감정을 쉽게 경험할 수 없다.

 

세 번째는 고수高手들의 이심전심이다. 남이는 쥬신타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번 살려준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만 나는 고수들 사이에서는 ‘우리’라는 연대감이 작동했다고 판단한다. 유년시절 이성계 위인전을 읽었는데,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르는 장면이 나온다. 왜구의 한 청년 병사가 출중한 무예로 우리 병사를 죽인다. 이성계는 그 왜구 병사에게 활을 겨누고 주저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예의 자질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추노에서도 태하와 용골대(윤동환 분)이 관계가 이와 비슷하다. 태하는 오랑캐 나라에 당신과 같은 장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하고, 용골대는 변방의 나라에 당신과 같은 장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하는 말을 주고 받는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라틴어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은 미국장교와 독일장교 이야기가 나온다.

 

위 세 가지의 공통점은 ‘우리’라는 소속감이고, 앞 두 가지는 보수 가치관의 중심인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다.

 

결말에 의외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 활을 쏠 때, 화살이 바람을 극복하는 것일까? 바람을 타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서양사고 방식은 바람을 극복하는 것이고, 동양사고 방식은 바람을 타는 것이다. 쥬신타도 동양 사람이지만, 쥬신타가 “바람을 극복하려 하는가. 쉽지 않을 것일세.”라고 이야기하면 남이가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타고 가는 것일세”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쥬신타가 ‘바람을 계산하는가.’라고 말하고 남이가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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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邊雜記 140729

- 동생네 가족이 다녀갔다. ; 이민자들의 모국어 유지

 

내 여동생 가족은 1990년 말 직장 문제로 이민을 갔는데, 지난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하였다.

 

3년 전 나는 여동생의 아이들 조카들만 만났을 때, 재미있는 현상을 보았다. 나는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영어로 이야기할 때, 뜸을 들인 후 이야기하게 된다. 머리에서 한 번 생각한 후에 입에서 나온다. 반면 조카들은 한국말을 할 때 뜸을 들인 후 이야기를 하였다. 큰 아이는 3세 때 이민, 둘째 미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조카들이 한국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여동생에게 조카들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니, 지난 번 방문에는 틀려도 한국말을 하려 했는데 이제는 한국말이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한국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굳이 한국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예전 한국 언론에서 중국인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이민자들은 지신들의 모국어를 잊지 않는데, 한국 이민자들은 쉽게 모국어를 잊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연 그런지 동생에게 물었다. 그런데 동생의 답변은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한국인들이 특히 모국어를 쉽게 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중국은 어찌하여 모국어가 유지되는가 물었다. 중국어가 특별히 영어권에서 유지되는 이유는 중국인 부모들이 (1.5세대, 2세대) 자녀들에게 (한국에서 영어공부 시키듯이) 중국어 공부를 엄청나게 시킨다는 것이다. 동생이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가능성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민 중국인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들의 차이나타운과 같은 사회 형성이 가능한 것을 지적했다.

 

중국인 사회의 모국어 유지가 몇 세대 정도 지속되는지 물었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 세대 정도 더 유지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개의 나라들이 2세대까지 모국어가 유지된다면 중국의 경우는 3세대까지이다.

 

동생과 이야기 끝에 나는 우리 민족이 한국어를 특별히 잘 잊어버리는 민족이라는 언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국 2세들에게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한국에 대한 특별한 의식 및 한국어를 강조하는 것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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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14-07-2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큰조카는 초등학교 4학년, 작은애는 1학년 입학할 때 주재원으로 파견나간 아빠로 인해 중국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 둘 다 영어는 알파벳도 겨우 할 정도였는데 엄청 공부를 한 결과인지 아무튼 영어에 완벽히 적응했고 (작은녀석은 미국인들이 인정할정도로 원어민과 발음 구분이 안된다더군요) 그 학교에 조기유학을 다니는 한국애들이 있어서 그런지 한국말도 꽤 합니다. 우리나라 애들이 쓰는 은어나 개콘에 나오는 표현도 할 줄 아는 정도. 물론 집에서 아빠하고 한국말을 해야하니 한국어를 잊을수가 없는 환경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90%이상 영어만 쓰고 있는 환경에서 한국말을 잘 하는거라 생각합니다. 맞춤법이 가끔 틀리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맞춤법이 엉망인 애들을 생각하면 그리 심각한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조카애들이 한국어를 특별히 공부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고 한국어책을 많이 읽고, 한국어의 흐름을 알게 하기 위해 한동안은 일부러 (한국에 다시 들어올때를 대비해서) 한국방송 티비를 설치해 보게 해 줬다고는 합니다.

마립간님 말씀처럼 우리 민족이 한국어를 특별히 잘 잊어버리는 민족이라는 언론의 판단이 틀렸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중국애들이 모국어를 잊지 않는다는 관점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모르면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사실 코리아타운에서만 생활하는 한국인 이민 1세대 중에는 미국에서 몇십년을 살아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들었거든요.

아이고, 아침 업무를 하기 전에 잠깐 들어와본것이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게 됐습니다 ^^;;;
영어를 몇십년(!) 공부해도 정말 늘지않고 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영어'에 민감한 반응을...ㅎ

마립간 2014-07-29 11:17   좋아요 0 | URL
제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 어느 공무원이 서남 아시아 어느 나라에 파견에 갔고, 공용어로 영어가 사용되는 이유로 그 나라에서 배려 차원에서 영어 수업을 진행했는데, 한 반은 책은 유창하게 읽으면서 회화는 전혀 못 하는 그룹(한국인 공무원도 여기에 속했습니다.), 다른 한 그룹은 회화는 유창하게 하면서 ABC도 모르는 (저는 정말 ABC도 모를까 과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야기를 하신 분은 그렇다고 하심) 그룹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국은 (민족성인지 사회적 환경인지 모르겠으나) 듣기, 말하기보다 읽고 쓰기에 치중했을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 저는 제 아이의 영어 실력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는 만큼 늘겠죠.

페크pek0501 2014-07-3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 하나가 중학교 때 미국 이민을 갔는데, 처음에 한국어로 편지를 쓰더니
나중에 영어로 쓰더라고요. 중학생 때였으니 재미로 그런 줄 알았는데 쭉 영어로 쓰더라고요.
나중에 한국에 잠깐 들러서 얘기를 들어 보니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하기 때문에 영어로 편지를 썼다는 거예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싸움도 영어로 한다는 말에 또 놀랐지 뭐예요.
아마 지금쯤 한국어를 잊었을 것 같네요.

마립간 2014-07-31 07:34   좋아요 0 | URL
저는 저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저의 삶을 투영한 가치관, 또 가치관에 일부분인 국어를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부모의 욕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실 저와 제 아이의 말을 자세히 보면 단어 사용에서 꽤 차이를 느낌니다. 하물며 외국에서 국어 사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Ralph 2014-07-3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교포 2세가 한국어를 못하는 이유는 ..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과거 한국어의 효용성이 적어서 라고 생각됩니다. 효용성을 특별히 따진다기보다는 .. 아무래도 그런 영향을 받게된다는 .. 십년전만해도 부모나 자녀에게 한국어를 기를 쓰고 배우도록 해야할 이유가 별로 없었지요. 특별한 부모가 아니면 자녀에게 한국 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여러가지로 한류 영향, 한국의 위치 향상등 한국말을 배워야할 , 배우고 싶은 필요성이 있어서.. 좀더 많은 교포 2세기 앞으로는 완벽한 한국말을 구사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마립간 2014-07-31 07:46   좋아요 0 | URL
언어의 헤게모니 역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헤게모니와 강력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현실이죠.

하지만 제가 판단이 잘 안 서는 것은, 언어를 정체성과 연관지어 당위적으로 강조한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력이 커져 한국어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한국인으로 기대하는 바이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터라...
 

 

* 身邊雜記 140728

- 동생네 가족이 다녀갔다. ; 영어 문화권의 경험과 영어 습득

 

딸아이 유치원 친구들 몇 명은 이미 영어권 나라(미국, 캐나다, 등)에 (길게는 6개월 정도 머무는) 거주 경험을 가지고 있고, 또 한 아이가 출국 예정이다. 일부는 아이의 영어 공부 때문에 외국에 나간다고 하고 일부는 놀러 나간다고 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음은 한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영어 습득을 기대하고 나가지만, 결과적으로 놀다 오는 것이 될 것이라는.

 

내 여동생 가족은 1990년 말 직장 문제로 이민을 갔는데, 지난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하였다.

 

나는 여동생에게 그 동네에 영어 배우러 오는 한국인이 많은가, 있다면 어느 정도의 영어 습득을 하고 가는가, 부정적인 면은 없는가 등을 물었다.

 

1) 유치원 정도의 나이에 영어를 사용하는 생활에 대한 경험 ; 이 나이에 언어에 대한 가소성可塑性 때문에 쉽게 영어를 습득한다. 문제는 가소성이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1~2년 거주 후 귀국하면 영어를 잊어버리고 다시 한국어를 습득하게 된다.

(30년 넘게 지난 이야기지만,) 나의 은사 A님의 큰 딸과 둘째 아들의 경우 ; 초등학생이었던 큰 딸은 영어 문화권에 대한 기억과 발음을 포함한 영어의 기억이 남아 있지만, 둘째의 경우는 영어에 대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다고 하셨다.

 

2) 고등학교 고학년 이후, 사춘기 이후 ; 이 나이에 이주하는 사람은 문화에 대해 이해가 떨어져 행간의 의미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설령 영어권 국가에 영주하게 되더라도 100% 동질화가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동생에게 영어를 위한 영어권 국가의 경험이 한국에 귀국을 전제로 어느 시절이 적절한지를 물었다. 대답은 사춘기 시절이었다.

하지만 직장 동료였던 B씨의 이야기는 ; 그 나라에 있으면서 외국 친구들과 싸움만 했다고 한다. 한국 청소년이 한국에 있어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데, 유년시절과 다른 문화 충격을 긍정적으로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즉 3) 사춘기는 (귀국을 전제로 한 bilingual을 위한) 언어 습득에는 오히려 적기이지만 문화적 차이에 의해 정서적 안정감이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동생에게 다른 경우는 없냐고 물었다. 동생은

4) 대학생 정도의 자기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 (귀국을 전제로 한 bilingual을 위한) 영어를 배우기 위해 1~2년 정도 머물면서 한국인이 없는 지역의 매점에서 임시 직장을 구하는 것과 같은 외국인과 접촉이 많은 환경을 만들고 본인이 노력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영어 습득 방법의 모델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4) 번의 경우 본인 노력이라는 변수를 생각하면 가장 효율적인 것은 당연하다. 환경( 주로 부모의 의지)에 의한 방법 1) ~ 3)경우 이야기를 듣고 내게 떠오른 것은 tessellation (trade-off, 공짜 점심은 없다.)이다. 모든 것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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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畵短評 140711

 

<7번방의 선물>

 

* 사실적이지 않다.

감방에 관한 비사실적 요소는 인터넷 검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 언급되지 않는 두 가지를 추가로 이야기하면

1) 교도소와 구치소는 다르다.

2) 사법연수원의 모의재판은 연수원생끼리 역할을 나눠 하는 것이라고 한다.

 

* 연상된 영화

<I am Sam>

<Hogan's Heros 호간의 영웅들> (TV 외화)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과 유사한 것에 감동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보다 사실적이지 않은 것에 더 감동하다면 이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바른 마음> 책에 의하면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 논픽션보다 픽션을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생존 능력을 전제로 공감능력을 고려하여도 사실적이지 않은 것에 공감하는 것보다 사실적인 것에 더 공감해야 하지 않나. ; 개선해야 할 오류인가 아니면 총체적인 최선을 위한 불가항력적인 오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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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7-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사실성(리얼리티)라는 용어를 풀이할 때, '재현한 것의 그럴듯함'이라고 하니까요. 여기서 방점을 '그럴듯함'에 두는가, 혹은 '재현'에 두는가에 따라서 약간은 생각이 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즉 사실과 달라도 그것이 충분히 '그럴듯하다'면 그것(그 장면)이 리얼리티가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영화에서) 일반적으로는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을 (실제의 사실과 구분되는) 영화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구요. (더구나 이 영화는 제 개인적으로 사실적인 영화라기 보다는 판타지적인 영화에 가깝다고 보니까요. 물론 이 영화의 완성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조금 더 극단적으로는 영화에서 사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측도 있으니까요(어떤 다큐멘터리라 해도 그것을 찍는 순간 사실 이상의 무엇인가가 거기에 들어가는 셈이니). 그러니 비사실적이라고 말한다면, 이들은 원래 모든 영화가 그래,라고 답하겠죠. 문득 든 생각은 우리가 '사실에 감동한다'고 했을 때 적어도 그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어디까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신문에 실린 어떤 미담을 보고 감동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문이라는 매체에 의해 가공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단지 정도의 차이의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글을 보다가 잠깐 든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마립간 2014-07-12 08: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맥거핀 님의 글을 통해 ‘영화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되네요.

저는 상보적 관계인 예술의 사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의 정답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보다 보편적 개념으로는 객관(사실주의)와 주관(표현주의)의 고민을 수도 있겠고요. 저는 대략, 객관, 주관, 그 사이의 간주관間主觀으로 삼분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객관과 순수한 주관의 양 극단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고민은 인간이 (상대적인) 사실적 영화보다 판타지적 영화에 더 감동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이전에 사실적 영화보다 판타지적 영화에 더 감동한다는 사실판단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요.)

* 예술 왜곡된 사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781759

맥거핀 님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 映畵短評 140617

 

<관상>

 

정의는 불의에 대해 반드시 승리하지 않는다.

계유정란이 과거( 1980년대)에는 신하들의 왕권 도전에 대한 왕권 수호로 (가치)판단하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평가하는 경향.

조선말 세도 정치를 고려할 때, 정도전의 신권 정치도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 인한 권력 독점을 막는 것이 핵심.

진형(이종석 분)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예전에 태종이 그리고 세조가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것에 대해 권력이란 것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참으로 독해야만 정치에서 살아 남는다고 생각.

부자父子 형제간에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것 ; 권력, 돈, 여자, 완력腕力(폭력)

 

자신의 얼굴에 점을 찍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은 바꾸지 못할 숙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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