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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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FBI에 전화를 해 묻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흑인이라고 해서 때렸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어떤 사람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로 만들거나, 다른 식으로 해서 그 사람이 일하도록 강제한다면, 그건 증오범죄라고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증오범죄,라는 건 무엇일까.


데릭 젠슨이라는 이름을 보고 혹시나... 싶었다.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나 싶었는데 조금은 아쉽게도 이전 책 '거짓된 진실'의 개정판이다. 

이 기회에 다시 꺼내들어 슬쩍 읽어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나가고 있어 읽기에는 편한데, 문득 책이 씌여진 2004년,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2008년, 그리고 개정판이 나온 지금 2020년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라는 것이 착잡하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모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 뒤에서 그것도 그의 세 아이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경찰관이 케어콥 블레이크에게 7발의 총을 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세상은 변하는가? 그렇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그렇다.


10년도 더 전에 내가 썼던 감상을 다시 읽어보며 지금의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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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 사람이 위험에 직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190)

이 책을 읽는 내내 편하지 않았음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도 전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적나라한 모습을 봐야했으니까.
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에 직면해서는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된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과 그에 더하여 끔찍한 증오를 만나게 된다면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세상에 대해 환멸과 좌절을 느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상상하던 끔찍함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는가를 느꼈다. 과연 진실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이 책을 쓰면서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다. 또는 인식의 결핍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직해져보자. 우리의 경제, 사회체제는 지구를 죽이고 있다. 다른 생물은 차치하고 인간만 보더라도 우리의 활동은 전례없는 궁핍을 만들어내고 있다. ...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명백한 부정의에 대해 누군가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지적을 하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 갈가리 찢어발기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끝까지 공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공동의 미래를 파괴한다. 정복에 저항한 원주민 부족들을 사람들은 얼마나 열광적으로 억압해왔는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하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결말을 안겨주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그들을 열성적으로 공격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8-9, 서문)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때로는 증오하라고 부추기는 듯, 데릭 젠슨은 도전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처음 이 책을 읽을때는 그런 인식조차 없이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보여주고, 이제 그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바로 잡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어쩌면 더욱더 끔찍하고 증오로 가득차서 교묘한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그는 왜 증오를 부추기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하는가?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메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11)
문득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라는 성서말씀이 떠오른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동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인 예수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데릭 젠슨의 말이 일맥상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실 책을 읽었음에도 나는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얘기하기가 힘들다. 다만 어렴풋이 잡히는 윤곽만을 보면서 이 끔찍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써볼뿐이다. 물론 지금도 외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있지만).

마이클 무어의 영화(볼링 포 콜롬바인 bowling for columbine)에서 희화적으로 그려졌지만 - 나는 그 영화를, 끔찍한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풍자적인 표현과 간단 명료한 진실의 접근에 마구 웃으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  침략과 약탈의 역사 위에 세워진 북아메리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8mm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져 그 인기를 실감케했던 에미넴의 화이트 아메리카 (white america)도 거친내용과는 달리 역동적이면서 경쾌한 리듬으로 풍자된 백인들의 아메리카에 대해 웃으면서 노래를 듣곤했었다. 나는 세상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인식속에서 구역질날만큼 끔찍하고 증오에 가득차고 온통 피바다였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떻게 씌여졌길래 그리 끔찍하다는 이야기를 자꾸하는지 궁금해지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감상적인 리뷰를 읽기보다 직접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겠다. '계급, 인종, 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가 이 책의 부제이다. 그만큼 광범위하게 씌여졌지만 - 간혹 너무 광범위하고 세세한 자료 조사로 인해 내 이해의 수준을 넘어버려 이해하기가 어려울때도 있긴 했지만 - 소화해낼 수 없는 범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가끔 -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아주 자주 '그래, 잔인하고 폭력적인 약탈과 침략으로 일으켜 세운 피의 아메리카 얘기일뿐이야'라고 내뱉었었다.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죽이고 있는 것이 피의 아메리카뿐은 아닐진대 나는 역시 그렇게라도 생각하면서 또 진실을 슬그머니 빗겨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괴물들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프리모 레비)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결코 기계인간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지구 환경에서 마음껏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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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총파업이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는 내용은 어디있을까.
수입이 줄어든대도 나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게 될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건지?
무작정 의대 정원을 늘리는것에 전적으로 찬성하는것도 아니지만 이토록 강경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더 모르겠다.
근본적인 내용들은 나오지않고 기싸움하는 내용만 난무하니 어쩔껀가.

계속 병원을 다녀야하는 기저질환자는 그저 훌륭한 의료진이 많기만을.
친절한 의사가 훌륭한 의사와 동의어는 아니라는걸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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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는덧 이 책도 읽은지 10여년이 되어가는구나.
하아.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에서 테스는 ‘순정한 여인 이다. 순정함은 자존감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질이다. 개인의 대두를서양 근대의 전환점으로 볼 때, 순정함은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 감정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이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자존감이 순정함의 근거라는것이다. 물론 테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알렉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정부로 살아야 하고, 에인절을 사랑하기 때문에 알렉을 죽이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감정과 언어, 언어와 행동이 일치하는 순정함을 드러낸다. 알렉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자 즉각 그의 곁을 떠난것, 에인절이 겉과 속이 다른 여자로 그녀를 규정하자 그를 붙잡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테스의 비극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몸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중산층 여주인공들은 결혼을 통해 그나마 자아를 실현한다. 노동계급 여성인 테스에게 신분 상승의 신데렐라식 결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테스는 살인자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몸은 전시되지만, 전시된 몸을 바라보는데 만족할 것이냐 죽음으로 입증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순정함을 읽어낼 것이냐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 P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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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정치풍자소설과 소외된 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자전소설

소외된 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오웰은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는데, 경찰관의 직책이 그의 생리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는 문학을 하고 싶은 열망에 늘 음산한 나날을 보냈다. 여기에 영국 식민 정책의 비리까지 늘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늘상 경찰직을 그만두자고 벼르던 차에 드디어 1927년, 오웰은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역겨운 영국 식민 통치에서 탈출한다.
이때부터 고생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배자의 풍요한 삶에서 지지리도 융통성 없는 삶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버마에서 온갖 고생을다 겪으며 파리에 도착하여 가정교사, 식당의 접시닦이, 서점 직원 등닥치는 대로 전전하며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았다. 그마저도 일거리가 - P418

없으면 전당포에 알량한 소지품을 잡히고, 시장 고물상에 가서 바지를 10달러에 팔아 2달러짜리로 바꾸어 빵 쪼가리로 연명하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이도저도 없으면 의식이 들락날락 가물거릴 때까지 굶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의식주 중에서 입을 것과 잠자리는 고사하고 먹을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지경을 헤매며, 창자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배를 곯는 아사지경을 체험한 것이다.
그때 오웰이 체험한 옹색함 삶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바로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다. 이 작품에는 대도시의 뒷골목, 암흑에 가려진 그 구석진 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의생활 면모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굶주림의 극한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강인하게 살아가는 밑바닥의 떠돌이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오웰 자신도 이런 따라지들의 생활 수렁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구빈원‘과 같은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사회제도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시선을 잃지않는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 부에는 가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난의 테두리 내에서 맴도는 따라지 인생들이 어떻게 하면 구제되고 어떻게 하면 삶의 개선을 이룰 것인지, 오웰은 그 대책을 제시하고 외쳤지만 그러한 사회의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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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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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을 미치거나 자살하게 만든  접근 금지 환자' 

미스테리는 좋아하지만 스릴러나 호러쪽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은 심리 스릴러일 것 같은 느낌에 조금 기댜가 되었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를 만나기만 하면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람들, 과연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하다.


엘리트 코스를 거치고 유망한 정신과 의사로 본인이 원하는 병원에 근무할 수 있음에도 파커는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 무조건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아 지원하고 결국 원하는대로 코네티컷주의 한 열악한 정신병원으로 출근을 하게 된다. 면접을 보러가는 길의 음습한 분위기, 황폐해보이는 병원의 건물, 음산한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로 들어갔을 때 마침 간호사들에게 붙잡혀 나오는 간호조무사의 모습을 보면서 파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다잡는다.

정신병동에는 어느곳이나 장기적으로 입원해있는 환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에는 어릴 때 입원해 삼십년이 넘도록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데다가 병실을 나오지도 않고 집단치료에 참가하지도 않고 더구나 의료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그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허용이 되며 그 또한 장기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담당자가 자주 바뀐다. 

그저 조,라고만 불리는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는 것인가. 

그 환자에게 그나마 장기적으로 접촉을 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수많은 일을 해결하는 수간호자 네시, 그러나 파커가 츨근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능한 그녀마저 자살해버리고 만다. 이후 파커는 더욱더 조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소설은 회고록같은 기록으로 시작된다. 이 기록이 정신과 의사의 기록이며 기록된 사실들이 밝혀지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데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스릴러 소설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왠지 소설의 끝을 보고 나면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조금 망설여진다. 인간의 심연에 담겨있는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싶다가도 이야기의 흐름은 자꾸만 이 세상을 떠도는 괴물같은 악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더 강한데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 소설에 만족할 것 같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 실체에 대해, 특히 파커가 발견한 그 모습의 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어떤 것이 사실이며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어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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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20-08-2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전모씨를 치료하고 있는 의료진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지 않을까요? 팬티를 빨아달라고 하질 않나, 유튜브 방송한다고 소란을 피우고, 이런 사실들이 보도되면 내 개인정보를 팔아치우고 명예훼손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겠다며 보는 사람마다 고소하겠다며 소리지르고. 에휴.

chika 2020-08-27 22:24   좋아요 0 | URL
요즘 재택근무라 종일 집에 있으면서 뉴스를 보는데 화나고 짜증나서 스트레스가 올라와 티비를 꺼버리기도 했어요.
저런것도 국민이라고 국가가 보호해주는구나, 진심으로 내는 세금, 건강보험료가 저들 위해 쓰인다는거에 화나드만요.
뉴스를 듣기만 하는 내가 스트레스 받을 지경인데 하물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