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유증일까?

리뷰 한 편을 쓰고 나면 도무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하려고한 일, 해야할 일이 밀려있지만 지금은 일단 모니터보기를 멈추고 드러누워야만 할 것 같다.

앉아있기가 힘들어 ㅡㅡ;;;

 

** 책을 바로 읽었을 땐 서평의 흐름이 잡히고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틀이 잡히는데, 반나절만 지나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오늘도 책 두 권을 읽었고, 훌륭한 서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흐름이 맞물리는 서평을 쓸 수 있을것만 같더니 지금은 한글자도 안나온다. 어쩔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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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4-1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바로 안쓰면 내용 자체가 생각이 안나 ㅜ.ㅜ

chika 2008-04-16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을 뒤적거리면서 쓴다니까요우~ ^^;;;
 
마씨 집안 자녀교육기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옛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마씨 집안 자녀 교육기를 읽다보니 교육과 체벌에도 집안마다 각기 특색이 있음을 생각해내고 혼자 웃었더랬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한때의 치기로 반항하던 작은 아들을 무릎꿇여 앉히고 '착실히 모범생으로 공부를 하겠느냐, 하기 싫은 공부 때려치우고 자퇴를 하겠느냐'를 선택하게 하셨었고 내가 아는 후배의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외아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셨던 강력계 형사의 본분을 다 하시는 분이셨다. 그걸 직분에 충실하신 분이라고 존경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리라.

그러면 3대에 걸쳐 따귀를 쳐 대는 것이 버릇인 마씨 집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마씨 집안 자녀 교육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실려있는 네개의 중편소설 중 한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돈 받고 술을 마시는, 이른바 술상무가 직업인 마쥔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아내에게도 차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최고 드렁커의 위치도 후배에게 뒤흔들릴 지경이다. 그런 그에게 '인생'은 무엇일까?

다른 두 작품, 1934년의 도망과 양귀비의 꿈은 풍양나무 마을에 사는 천씨 가문의 족보를 설명해주는 연작이다. 대지주의 몰락과 공산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중국, 아편에 찌들어 무너져가는 중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인하게 살아남고자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역사의 거대한 파도를 헤어나와 살아가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한 남자는 이혼지침서의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쑤퉁의 살짝 뒤틀린 해학이 결혼한 남자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하게 사실적이라는 느낌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양보의 태도에 질려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친구의 여자친구는 그를 유혹하고 뜬금없이 나타난 방문객에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사기꾼으로 몰리며 얻어맞는 결혼한 남자 양보의 이야기는 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래 물론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언제나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니지만(367) 쑤퉁이 그려내고 있는 그의 인물들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속에 휩쓸려 가 익사해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359)했다고 하지만 쑤퉁이 그려내는 인물들의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은 집착의 모습과 맹목적인 사랑은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맹목적인 삶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되어버린다. 쑤퉁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쑤퉁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그가 인간에 대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에 대해 지독하게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와 설화가 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어가고, 웃음과 해학속에서 인간적인 깊은 슬픔이 배어나오고 고통과 절망속에서 또 삶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쑤퉁이라는 이야기꾼의 글은 꽤 읽은 편이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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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올해는 4.3의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6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행사가 열렸다. 대중가수들이 시청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방송국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열린 음악회를 공개녹화하였다. 그렇게 60주년을 맞이하는 4.3은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들을 배경으로 하여 화려하게 기념되고 있다. 이십여년 전의 사월 벚꽃은 거리에 흩뿌려진 최루가스에 속절없이 져버렸지만 4.3 60주년을 기념하는 2008년에 피어난 벚꽃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낭만을 흩뿌려대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내 눈에는 그 어디에도 4.3은 보이지 않는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도, 진상 규명도 없이 단지 '60주년'만 남아있는 것 같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4.3은 규명되었고, 희생된 도민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유해발굴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라는 말로 끝맺고 싶지만 2008년 현재, 4.3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수가 없다.

당신은 4.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평을 쓴다며 앉아서 이렇게 에둘러가는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책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4.3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물론 나 역시 4.3을 모른다. 이십여년 전쯤, 부모님께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모르민 속솜행 이시라'(모르면 잠자코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북에서 거대자본상인의 딸로 자라 아쉬운 것 없이 지내다 48년 제주에 들어와 6.25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갖은 고생을 하셨던 어머니는 4.3에 대해 이야기하기 꺼려했다. 그때만 해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빨갱이짓이고 간첩죄로 몰릴 수도 있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이북출신의 외가집이 우연찮게도 48년에 입도(入島)하였다는 것이 내게는 섬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는 서북청년단이 떠올라버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4.3에 대해 모른다.
아니, 그래 역사적인 4.3에 대해, 그러니까 4.3의 발단과 과정, 증언, 유적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4.3에 대해 알고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가끔 '어디가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멱살잡고 크게 싸우거나 사기치면 안된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한다. 그만큼 서로가 알고보면 먼친척이거나 한다리 건너면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하다는 뜻이다. 제주말로 '괸당'(친인척)으로 밀접한 관계형성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대문도 없이 이웃과 왕래하며 지내던 공동체가 60년전에는 어떠하였겠는가. 온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혈투를 벌일때 제주는 그런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4.3사건으로 인해 수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혐의에서 못벗어나 총살당했고, 오로지 살기위해 산중턱의 깊은 동굴에 숨어있다 발각되면 사살당해야만 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겨우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촌사람들에게 소개령을 내려 해안으로 내몰았는데 삶의 터전을 두고 무작정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또 빨갱이로 내몰려 죽임을 당했다. 4.3은 말 그대로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그런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바로 당신의 무관심과 일부 편향주의자들의 역사왜곡으로 4.3의 영령들은 다시 한번 죽임을 당하고,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3을 단순히 남로당의 지령으로 인한 빨갱이들의 반란사건으로 규정하는 뉴라이트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새정부 인수위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지금 현재 4.3 위원회 폐지를 유보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여전히 4.3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제주도민을 옭아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백꽃 지다

그저 마음이 답답할뿐이다. 처음, 멋모르고 4.3 유적지 순례를 갔었던 때의 기억이 난다. 큰넓궤라는 곳을 들어가며 두 팔과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깜깜한 동굴 몇미터를 지나면 공터가 나오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또 공터가 나오던 그곳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는지. 마을사람 절반 이상이 끌려가면서 띄엄띄엄 신발을 떨어뜨려 행적을 표시해놨기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겨우 찾아 먼길을 갔더니 웅덩이 하나에 수십명이 몰살당해 있더라는 산 중턱이 숲길은 또 얼마나 멀고 힘들었는지. 커다란 마을 하나가 완전히 불타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수풀은 역사의 아픔을 눌러 세월의 흐름만을 보여줘 얼마나 쓸쓸하던지.
서평을 써보기 위해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다시 또 마음이 아플뿐이다. 증언들과 함축적으로 표현된 강요배 화백의 그림들이 역사적인 사실 안에 담겨있는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3을 겪지 않고 말로만 전해들은 나조차 이렇게 답답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서경식 선생의 추천사를 읽으며 또 한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여든을 넘긴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지난 해 제주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대를 받고 단상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이 활주로 밑에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묻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나 역시 그 눈물을 모른다. 4.3의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나는 진정 4.3에 대해 모른다.

"바다 가운데 일 점 산으로 솟은 탐라, 고려 시대 몽골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뒤로 탐라는 육지로부터 끊임없이 수탈을 당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워 온 탐라 사람들의 전통이 바로 4.3 항쟁의 뿌리이다" (13)
4.3은 지역에 한정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삼별초 전투(18), 왜구퇴치(20), 이재수 난(22), 잠녀 반일항쟁(24)의 역사가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방이후 자율적인 사회운동체를 조직하고 교육에 힘썼던 제주도민의 공동체는 4.3의 제노사이드로 무너져갔다. 낮에는 해안으로 밤에는 산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내몰렸던 제주도민의 십분의 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십년전에 이미 98년에 출판되었던 동백꽃 지다,를 읽었었지만 그 먹먹한 마음이 여전하다.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을 한 장 한 장 강렬한 그림으로 표현해낸 강요배 화백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동백꽃 지다'의 그림과 증언들은 그냥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거나 4.3에 대한 책들 중 한 권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4.3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마음으로 동백꽃 지다를 봐야만 한다.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섬사람들이 육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수탈과 침략의 역사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제주동백은 강렬한 빨간색으로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활짝 피어 난 후, 사그라질때는 미련없이 툭, 하고 통꽃으로 떨어져버린다. 해산령을 받은 산사람들은 그렇게 동백꽃처럼 툭,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해마다 제주동백은 다시 강렬한 빨간 꽃을 피워낸다. 그처럼 우리는 4.3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는 민중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진정 평화의 섬,을 이뤄낸다면 미련없이 툭 떨어져 후손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4.3을 모르지만 4.3의 후예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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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이 제주에 온답니다.

그래서 없는 돈이지만, 쇼 관람에 투자를 좀 해볼까.. 하는데

좌석예매를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집니다.

기획사에 예매문의를 했더니 - 공연장은 제가 몇번 가봤던 곳이라 좌석 배치를 좀 아는데

무대 바로 앞쪽은 접의자를 놓게되니 무대가 시선보다 위쪽이어서 불편하고 앞사람에 가릴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제 생각도 그렇지만, 김장훈 콘서트..... 계속 앉아서 볼까요? (다들 일어서 버리면 좌석은 관계없게 되겠고 그렇다면 무대 바로 앞이 낫지않나, 싶어서요)

원래 무대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T자형으로 무대가 돌출될 것 같은데, 기획사 얘기로는 겨우 3-4미터쯤 나온다더군요. (예전 자우림 콘서트때도 십여미터는 나와보이던데 ㅡ"ㅡ)

그렇다면 기획사에서 추천해준 가운데쪽의 원래 공연장 좌석과 무대와의 거리는 좀... 멀거든요.

월욜까지 티켓예매액을 보내줘야하는데... 어쩔까 싶어서요.

- 그나저나, 즐찾도 별로 없는데 여따 문의남겨서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까나...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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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일이 있게 마련이지.

묘제를 한다고 어제 음식 싸느라 (하느라,가 아니라 싸느라다. 묘에 갖고 갈 음식을 일일이 식히고 랩으로 씌우는 것을 했는데) 국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열두시를 넘기고 몸이 안좋아서 두시간에 한번씩 깨어나고.
아침에 산에 가는 부모님과 언니랑 집을 나서고 나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래, 나도 힘든 하루를 보내고 힘겹게 성당으로 갔다는 얘기가 전제로 깔린다.

그런데 - 생각하니 또 기분상하려고하네.

전례를 하려고 가던 고2녀석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고3을 보더니 그냥 앉아버리길래, 내가 전례담당이 아니라 바로 말을 하기는 좀 그렇고 담당 교사에게 가서 '전례는 기왕이면 고2가 하는게 좋을 듯 한데...'라고 말을 꺼내는데 대뜸 고2가 어디왔냐고 말을 잘랐다. '준현이가 와 있고, 걔 시키면 되는데 일단 선생님이 전례담당이라...'라는 말을 하는데 또 잘라먹는다.
왜 자기에게 그 말을 하냐고. (내가 말했잖냐. 니가 전례담당이라 너한테 얘기한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한게 뭐 있냐고 한다. (그러는 댁은 성당에 나보다 늦게 나타났고 한게 뭐 있어?)
말을 그대로 옮기면 "내가 하고 싶어서 전례담당을 한 것도 아닌데 나보고 뭘 하라는겁니까? 선생님은 한 게 뭐 있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그 말을 내뱉고 상대도 안하겠다는 태도로 돌아선다. 그리고 애들에게 명령하더라.

사실, 애들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녀석과 한판했을꺼다. 성당안이 아니었다면 욕이라도 한마디 튀어나왔을지 모른다. '너같은 자식이 교리교사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기 혼자 힘들고, 자기 혼자 스트레스 받고, 자기 혼자 성당의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하나? 나보다 늦게 성당에 나타났는데?

지난 주, 분명 회의시간에 전례를 담당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에 흔쾌히 승락했고 - 그게 자기가 원해서 담당하게 된것이 아니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하는데? - 혹, 책임있게 하기 힘들다고 했다하더라도 일단 공식적으로 자기가 담당이 되었으면 책임을 다해야하는 것 아닌가. 열다섯살 애들도 그런말은 안하는데, 서른 다섯이나 나이를 먹은 사람이 그런식으로 얘기를 하다니. 도무지 상대할 가치를 못느끼겠다.

그리고 역겹게도 회의 끝나고 회식자리에서 자기는 둘째여서 사회성이 좋다나? 정말 웃겨주신다.
내가 그 교리교사때문에 미사시간 내내 분심들어서 미사도 제대로 못했다는 거 생각하니 안그래도 아픈 뒷목이 더 아파서, 하찮은 인간때문에 화낼필요가 없다며 스스로 달랬다.
다들 예의바르고 성실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자기가 안정이 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때? 안하무인이되는 그런 교사를 내가 감싸 줄 필요가 없어서 회의시간에 공식적으로 전례담당 교체를 요청하려다가 참았다. 교감선생님에게만 짧게 내용을 요약해서 원해서 하지도 않은 전례담당이니까 뭐라 얘기하지 말라는 식이니 담당을 바꿨으면 한다는 얘기와 동료교사로서 '니가 한 게 뭐냐'는 식의 발언은 이해할 수 없고 불쾌했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집으로 왔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나쁘네.
그런 자가 '글쓰기'를 잘 한답시고 선교적 글쓰기를 하겠다고 하니 한숨만 나온다.

그래, 사회성 좋은 너는 교리교사 계속해라. 난 사회성이 나빠서 너같은 녀석이랑 같이 일해먹기 힘들어서 관둬야겠다.

*** 그래도 화가나는 마음을 추스리고, 고2 준현이에게 전례를 시켰고 미사 후 준현이 엄마가 내가 그녀석에게 뭐라 말을 하고 전례해설을 하는 거 보고 '선생님이 시켜도 안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하는 거 봐서 기뻤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준현이 동생은 우리 교리반인데 내가 3년째 맡아서 성격도 잘 알고 많이 친해져서 성당오는 걸 재밌어하는 것 같다는 말씀도 해 주셔서 또 기뻤다.
오늘 교리반 녀석 중 한명이 날마다 '10분만 더'라는 것의 가치를 얘기하면서 '칭찬'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그래, 역시 칭찬의 힘은 놀라운 것이다. 좋은 것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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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0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