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인 것이라는 영역의 설정은 인간이 세계와 관여하는 방식을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할 차원을 하나 더 인식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귀여움이나아름다움의 판단은 대상이 시추인지 몰티즈인지를 인식하기 위한 지성적 판단과는 다르다. 굳이 그 영역을 언급해야 한다면 감성의 영역이다. 이렇게 미적인 것은 지식이나 도덕과는 별개인 또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을 상정하게 해준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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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
이지혜 지음 / 파람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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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듣고 있다.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몇몇 익숙한 클래식 곡은 들으면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뭐 사실 그렇다고 말은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유명한 선율을 들으면 이건 라흐마니노프일꺼야, 라고 할 수 있을뿐 클래식 음악에 대한 깊이는 전혀 없다. - 신서유기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음악이 나올때마다 박장대소하며 웃기는 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수준이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좋은 선율이 나오면 그 음악이 무엇인지 알아뒀다가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곤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은 흘려듣는 선율의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작곡가의 삶과 그들의 작품 이야기를 통해 클래식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책이다. 4계절로 나눠 시기마다 듣기에 좋은 음악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음악을 찾아서 듣다보면 전혀 낯설지 않은 선율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가장 첫번째가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인데 그 기타 선율과 트레몰로 연주법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었지 연주자인 타레가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좋아해서인지 타가레에 대한 이야기와 대부분의 기타연주곡 편곡을 그가 했다는 이야기부터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모짜르트나 베토벤, 슈만과 클라라 같은 워낙 유명한 음악가들의 이야기는 조금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음악가들의 생에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음악이 그저 듣기 좋은 선율의 느낌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인생사를 떠올려보게 되기도 한다. 


각 계절별로 악기에 대한 소개도 짧지만 무척 유용하다. 특히 클라리넷,오보에,플루트에 대한 설명에서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에 플루트는 나이팅게일, 오보에는 꿩, 클라리넷은 뻐꾸기로 표현했다고 하는 설명이 재미있는데 사실 플루트는 음색이 높고 맑아서 조금 더 구분할 수 있지만 오보에와 클라리넷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오보에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의 도입이 클라리넷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는 원래도 유명하기는 했지만 만화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노다메 칸타빌레를 통해 자주 들어서 그런지 익숙한 음악인데 지금까지 왜 클라리넷이라는 생각을 못했는지...


요즘 음악을 이야기하는 도서에는 큐알코드가 있어서 책을 읽으며 궁금한 음악을 바로 들을 수 있게 해주던데 이 책에는 큐알코드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었다. 특히 위풍당당 행진곡,의 리듬이 동요나오듯 바로 툭 튀어나오지 않아서 큐알코드 없는 것이 아쉬웠는데 책을 읽으며 잠깐 듣는 것이 아니라 메모를 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 들으니 오히려 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 큐알코드의 장단이 있구나,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 시작할 때는 가을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찾아 들으면 될 것 같은 계절이 되어버렸다. 음악과 함께 한다면 기나긴 겨울의 밤이 쓸쓸하거나 답답하지는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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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그릴 수 있을 거야 색연필화 -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김예빈 지음 / EJONG(이종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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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연습을 하면 실력이 나아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력은 없이 그림 실력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욕심은 많아서 일러스트 드로잉이 아닌 기초 색연필화 책을 또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대충 책을 살펴보고 색연필로 대충 색칠을 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천천히 살펴보면서 조금 더 정성스럽게 색을 칠하니 이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객관적이 아닌 나 자신만의 판단이니 뭐가 낫다는거지? 라는 반응은 보이지 마시라. 



색연필화를 그릴때마다 실력보다는 색이 없음만 한탄하곤 했었는데 그림에 더 집중하고 나아지기 전, 그러니까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는 있는 색으로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이 책에는 연필을 잡는 법부터 시작해서 색을 칠하는 방법, 그라데이션 연습과 다른 색의 혼합칠, 그리고 영역을 칠할 때 '색연필 심 끝이 스케치 선을 향하게 해서 안쪽으로 칠해야' 경계부분이 깔끔해진다는 것과 같은 실전 팁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을 모르고 색연필화를 그릴 때 조금 넓은 면적을 손이 가는대로 칠을 하곤 했었는데 그 결을 따라 색을 칠하니 경계선이라거나 두가지 색의 혼합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아직 연습이 많이 필요한 부족한 실력이지만 책에서 설명한 내용을 기억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연습을 하다보니 마구잡이로 그려보던 것과 달리 형태가 조금씩 다듬어지는 느낌이 든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지우개로 지우지 못해 기본 스케치가 좋지않고 연필위에 덧칠해진 색연필의 색이 이쁘지는 않지만 연습용이니 나름 만족스럽다. 그리고 역시 기본적으로 형태 스케치가 정교해야 색연필화도 정밀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드로잉 연습을 더 해야겠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명암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나와있고 채소와 과일, 꽃그림의 실전을 통해 연습을 해보게 해 주니 자꾸 그리다보면 이론적인 이야기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갖고 있는 색연필 색의 한계가 있으니 그라데이션의 색효과가 다를수밖에 없는데 책에서 9가지 색으로 그린 튤립을 6가지 색으로 그려봤다. 채색의 방향이나 그라데이션 넣는 방법, 줄기 부분의 중간 톤과 어두운 그림자 영역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그대로 따라가면 약간 어설프지만 그래도 나름 튤립의 형상을 그려보게 되기는 한다. 연습이 많이 필요한 것은 이후의 일인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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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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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즈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친구중에 찐팬이 있는데 자신은 그의 소설 노르웨이 숲밖에 읽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고. 그런데 그 소설에 드러난 하루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도무지 용납이 안되어 그를 바라보는 내 견해는 어떤지 궁금하다고. 글쎄... 나 역시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서 답을 해줄수가 없었다. 다만 나는 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고, 그의 에세이는 햇살 좋은 날 뒹굴거리며 읽기에 딱 좋은, 그러다가 가끔 자세를 바로하고 곱씹어보게 되는 문장을 만나는 그런 글이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다시 하루키의 에세이이다. 예상보다 훨씬 얄팍한 책두께에 슬쩍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단숨에 읽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여유를 두고 깊게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부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 짧은 글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괜한 군더더기를 넣어 늘릴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장죽이기 이후 난징대학살과 일련의 역사에 대한 하루키의 소신 발언은 많이 회자되곤 했는데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으니 그가 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라거나 교토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고, 늘 인생을 즐기며 느긋하게 글을 쓴다는 느낌과는 달리 글 하나에도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 그러니까 말 그대로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직설적으로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은유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 하루키의 글을 읽게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새삼스럽게 하게 되었다. 물론 얼마전 하루키에 대한 글을 읽으며 그가 대충 흘려쓰는 것 같은 글이지만, 1년을 기한으로 매주 글 한편씩을 쓰기로 계약이 된다면 이미 1년동안 쓰게 될 글의 주제 50개를 미리 계획해놓는 하루키라는 것을 알게 되니 역시 대충,의 이미지 안에 정교한 글쓰기를 하고 있음이 그의 글에 담겨있는 느낌이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아주 미소한 일부지만 그래도 한조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작가후기)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겠지만 그토록 꺼려하던 아버지의 징병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과 또한 아버지의 삶에서 이어지는 역사의 한 조각,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 빗물 한 방울의 역사이지만 그 한방울로서의 책무가 있으며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93)는 것을 새겨보게 된다. 

나 자신이 하루키에 대한 취향을 타기 때문에 굳이 하루키의 글을 추천할바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에세이만큼은 추천하고 싶어진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인 것이 하루키를 추천할 때인것마냥.













덧. 하루키 팬을 위한 하드커버는 말릴 생각이 없다. 하지만 선택권이 많은 독자를 위해, 하루키지만, 페이퍼백으로 조금 저렴한 가격의 단행본 발행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칠수는 없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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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작은 아버지가 - 특공대에서 살아 돌아온 - 돌아가신 것은 바로 몇 년 전 일이다. 교토의 거리에서 우익의 가두 선전차를 보면 "전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니 저렇게 멋대로들지껄이는 게지……" 하고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사람이었다.
- P31

나는 그런 체험이 없다. 나는 아주 평범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비교적 애지중지 자랐다. 그래서 부모에게 ‘버려진다‘는 일시적인 체험이 아이에게 어떤 마음의 상처를 주는지, 구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머리로 이런 것일 테지‘ 하고 상상하는 수밖에없다. 그러나 그런 유의 기억은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그 깊이와 형상이 달라지는 일은 있어도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지 않을까?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전기를 읽고, 트뤼포 역시 유소년 시절에 부모와 떨어져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거의 방치되어) 다른 집에 맡겨진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트뤼포는 평생 작품을 통해 ‘버려진다‘는 한 모티프를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사람은 누구나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잏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 P34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 P51

사슴 불러 모아 노래하는 히틀러 유겐트"
(1940년 10월)

이는 히틀러 유겐트가 일본을 우호 방문했을 때 일을 읊은 하이쿠일 것이다. 당시 우방 나치 독일은 유럽에서 유리하게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대영미 전쟁에 아직 착수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왠지 이 하이쿠가좋다. 역사의 한 광경이 - 아주 작은 한 모퉁이의 광경이 - 좀 이상한,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각도에서 그려져 있다. 멀리 떨어진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의 공기와 사슴들(나라의 사슴들일 것이다)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일본 방문의 한때를 즐긴 히틀러 유겐트의 청년들도, 그 후에는 추위가 혹독한 겨울의 동부전선에서 목숨이 다했을지도 모른다.

- P55

아마 나 같은 직업을 가진인간에게, 사람의 머리가 좋고 나쁘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좋은 머리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 날카로운 직감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니 ‘머리가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 기준을 축으로 인간을 가늠하는일은 - 적어도 내 경우 - 거의 없다. 그런 부분은 아카데믹한 세계와 아주 다르다. 


- P59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 P62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 P87

이렇게 개인적인 문장이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손을 허공으로 내밀면, 그 너머가아른하게 비쳐 보일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 P88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 점차 모호해진다. 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게 없다.
- P89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 P93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 서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 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 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 먼 아래,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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