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호퍼 작품의 중심 주제로 기다림과 고독을 꼽지만 내게 그것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깃들지 못함이라는인간 존재의 비참함이다.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문명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인간은 과르디니의 표현대로 뿌리내릴 곳 없이 쉼 없이 부유할뿐이다. 카페, 술집, 극장, 휴양지, 호텔 객실, 주유소처럼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공간에 계류할 뿐인 호퍼의 그림속 주인공들처럼.

- P35

존재할 이유

갈릴레오 재판은 가톨릭교회가 2000년, 대희년大年을 기해 인류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교회의 과오다. 누군가 이 재판을 두둔한다면분명 맹목적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비판하겠지만 과르디니는 재판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길 제안한다. 그는 재판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하지않되, 왜 교회가 갈릴레오에 대해 그토록 완고한 태도로 일관했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교회가 보인 반응은 단지 교리와의 논리적 충돌 때문이라 보기엔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신경질적이었다. 과르디니는 기존 세계관의 붕괴 이후 벌어질, 인간에게 찾아올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와 상실감을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인류의 무의식이 교회를 통해 발현된 것이라 보는편이 더 낫겠다.
창조의 중심에 땅이 있고 스스로를 그 동심원 한가운데의 존재라고여겼던 인간에게 돌연 지구가 다른 별들과 다를 바 없이 태양을 중심이로 돌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주관의 변화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상실을 초래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심원 한가운데의 인간은 땅에 대한 권리와 함께 그만큼의 책임도 느꼈지만, 이제부터 그에게 땅은 있는 대로 쥐어짜고 빼앗아도 상관없는 대상이자 자원이고 그 자신도 창조의 우연적 존재일 따름이다. 기원도 목적도 없이 부유하는 그저 소비하고 생존하는 존재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을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환원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신화나 낭만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 삶의 가치와 같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더 근본적인 것들의 상실일 테다. 기계문명의 도래는 자신만만히 ‘인간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인간은 실상 호퍼의 군상처럼 더 고독하고 허무해졌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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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 -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
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 / 평사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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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할머니가 민박을 하며 체험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빨간 머리카락은 이 책의 저자인 윤득한 할머니가 아니라 그녀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로마의 민박집 주인이다. 그래서 또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또 첫 에피소드가 끝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야 이 책에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찌만 미국 시카고 대학의 영화과 입학을 포기하고 재일교포와 결혼하여 53년부터 일본에서 생활한 저자는 평범한 할머니라 하기에는 이력이 화려하다. 70년에 파리와 로마를 여행한 것부터 시작하여 일반인들의 한일교류가 거의 전무하던 시기에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는 일본문화를 알리며 경제활동을 했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일본헌법개정반대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전쟁반대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가장 부럽고 대단하다고 느낀것은 그녀의 마지막 여행, 아니 팔순이 넘은 나이에 그녀 혼자 떠난 여행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실화냐, 싶을만큼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게 된 이야기는 스페인 여행이다. 우연히 티비를 보다가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일정을 알아보고 무작정 스페인으로 떠났다고 한 것이다. 스페인으로 향했다,라는 글을 읽을때까지만 해도 뒤이어 나올 허망한 마음에 대한 대응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특별미사로 집전되었던 그때처럼 완공이 안된 성가족성당에서의 미사는 서품식을 앞두고 있어서 또 한번 특별미사가 있을 예정이고 서품자 가족외에는 초대받지 못하지만 그녀의 사정을 들은 가족이 선뜻 자신의 초대장을 그녀에게 양보해 미사참례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기적같은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걸 느꼈다. 

스페인에 가본적이 없는 나는 가끔 내 생애에 성가족성당의 완공을 볼 날이 있으려나..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윤득한 할머니의 글을 읽으며 괜히 내 마음이 더 설레이고 있다. 


여행이야기지만 이것이 곧 인생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세계의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시시의 이야기에서는 나의 신앙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윤득한 할머니는 한국인이지만 오랜 세월 일본에서 살며 일본어로 글을 썼고, 쯔치다 마키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오랜 세월 살아 윤득한 할머니의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는 것 역시 이 책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나라라도 그곳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다. 되도록 버스나 일반 열차, 지하철을 탔고, 먼 곳으로 이동해야 하면 야간열차의 침대칸을 이용했다. 현지인들의 생활노선에 닿아 있는 교통편을 타고 밖의 풍경을 찬찬히 살피는 것도 행복이었다. 인생이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으니"(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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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삶에 비유해 보자. 여행지에서는 완벽한 준비보다 위기에 대처할 융통성이 훨씬 중요한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서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만히 서 있을 때 내비게이션은 방향을 알려 주지 못한다. 내가 출발해야만 GPS가 내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게 되고, 그제야 어디로 갈지 알려 준다. 삶도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일은 일단 저지르고 나면 수습할 기회가 생기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방향도 생기지 않는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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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말을 떠올린 다음,
하루 종일 사용하지 말아 보자


싫어하는 말인데도 자꾸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 나는 메모장에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말들‘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속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다 그렇지, 뭐." "원래 그래." 음원 깡패‘ ‘얼굴 천제 착한 가격 진검 승부‘ "잘 모르시겠지만.…..."
‘음원 깡패‘라고 하면 음원 순위를 조작하기 위해 동원된 조직폭력배가 떠오르고, ‘착한 가격‘이라고 하면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숫자들이 떠오른다. 정확하지 않은 은유는 잘못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하는데, 때로는 말 자체가 내 생각을 대변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모든 말을 내 맘에 들게 할수는 없지만, 내가 입 밖으로 꺼내는 단어들의 의미를 한번씩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말하기에 도움이 된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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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 오브 매직 : 마법 한 줌 핀치 오브 매직 1
미셀 해리슨 지음, 김래경 옮김 / 위니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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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마법이 일으키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 마법이 곧 기적인 것 아닌가? 

아니 이 책은 강인한 마음과 용감함을 지닌 자매들의 멋진 모험 이야기이다. 


까마귀바위섬의 밀렵꾼의 주머니에 사는 위더신즈의 세 자매 베티, 플리스, 찰리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막내 찰리가 어렸을 때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감옥에 갇혀있다. 언젠가부터 변해버린듯한 언니 플리스에게는 비밀로하고 '모험은 담대한 자를 기다린다'(21)며 베티는 할머니 몰래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막내 찰리와 함께 습지기슭으로 떠나는 배를 탄다. 드디어 섬에 갇혀있는 답답함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지만 바로 할머니에게 붙들리고만다. 집으로 돌아온 베티는 할머니에게 엄청난 비밀을 전해듣게 된다. 

위더신즈 가문의 여자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의 물건을 받게 되지만 또한 그에 걸려있는 저주의 이야기도 같이 듣게 된다. 세가지 물건과 그를 이용한 세가지의 마법이 세 자매에게 전해지지만 그걸 받은 위더신즈의 여자들은 절대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고 하는데 베티는 섬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렇게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야기는 무엇이든 생각하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대범한 베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베티만이 아니라 언니 플리스와 동생 찰리 역시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받은 마법을 제대로 이용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모든 일이 '마법'으로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제 마법의 힘을 이용하기 전에 세 자매의 선택이 있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키게 된다. 


"그런 능력이 나한테 있는 건 내 선택이 아니었어요."

"아니었지. 하지만 넌 그걸 사용하는 쪽을 선택했어. 할 수 있으니까.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279)


가장 용감한 베티가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마법 가방을 움직일 수 있는 찰리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니 플리스의 도움으로 잡혀간 플리스와 찰리의 행방을 찾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위더신즈 가문의 저주와 마녀 소샤의 이야기, 감옥소의 번호를 잘못 찾아가 만나게 된 콜턴의 사연 등의 이야기가 모험과 마법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 자매와 함께 비밀을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사족을 붙이자면, 마법 한 줌,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재미있는 것은 타임머신에 더 익숙해진 내게 '여행가방'의 마법이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단지 내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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