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ㅣ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평점 :
카렐 차페크가 영국을 여행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1924년이었다고 한다.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이라는 제목은 차페크의 영국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인지 차페크가 느낀 영국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인지 딱히 구분지을 수는 없겠지만, 아니 어쩌면 차페크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딱 들어맞는 멋진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의 여행과 비교할바는 아니지만 비록 패키지여행으로 인해 하루 24시간도 머무르지 못한 것일지라도 생경했던 영국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머물렀던 시간동안 영국근위병의 열병식을 보기 위해 발끝을 올리며 비어있는 공간을 찾고 어린 조카의 손을 잡아 끌고 있을 때 갑자기 앞쪽에 있던 아저씨가 화난 듯 뭔가 말을 툭 뱉더니 갑자기 아들처럼 보이는 아이와 나를 번갈아보면서 마구 손짓을 했다. 혹시 내가 밀쳤다고 생각하시나? 하면서 눈 부릅뜨고 쳐다보는데 아무래도 아이에게 더 어린아이와 관광객일 것이 분명한 이 사람에게 열병식을 더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자,라는 뜻을 전하는 것 같았다. 아, 정말 별 것 아니야,라는듯한 그 무뚝뚝한 태도에 감사의 인사도 까먹고 열병식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지갑에 있던 한국동전을 기념하라고 아이게게 전해주기만 했었는데 유일한 그 체험 하나로 나는 영국을 딱딱하고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모습이 있는 진국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 영국 - 아니, 대체로 잉글랜드의 이야기라고 해야 좀 더 맞는 것 같다. 사실 차페크가 여행을 갈 당시 아일랜드는 독립국가가 아닌 테러지역으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실제 차페크는 아일랜드에서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그곳으로 갈 수 없었고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가기보다는 '내가 베일을 벗기지 못한 땅이지'(151)라는 한탄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로 아일랜드를 넘긴다.
차페크는 영국에 도착하고 난 후에야 영어 한마디도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라고 하는데 말 한마디 못하면서 여행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해설을 읽어보면 런던에서 유학 중이던 체코출신의 보차들로를 만나 두달여동안 여행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과 자연의 모습, 박물관 등을 다니며 체코와 다른 부분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가끔은 차페크가 은근 돌려말하며 영국을 까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고 또 그러면서도 좀 더 깊은 속살의 영국은 그들 나름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칭송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영국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들의 음식을 타박하는 건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토스트나 치즈구이, 베이컨 구이는 확실히 즐거운 옛 잉글랜드의 유산입니다'(184)라고 하는 걸 보니 얼마 전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국인이 영국의 음식을 맛보이면서 정말 맛있는 음식도 있다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보여주던 것이 생각났다.
아, 그러고보니 여기에 그 표현이 있다. "영국 요리에서는 말하자면 가벼움과 화려함, 삶의 기쁨, 흥겨움, 또는 죄책감이 드는 쾌락주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국인의 삶에도 이런 것들이 결여돼 있는 듯합니다. 영국의 거리에서는 향락을 느낄 수 없죠. .... 대놓고 다정하게 윙크를 건네는 이도 없을 겁니다"(184)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웨일스...를 여행하고 - 아일랜드에는 직접 가보지 못했으나 언급은 하고 넘어갔다 - 차페크의 사유와 그림이 담겨있는 글을 읽고 나니 지금 그가 영국을 여행한다면, 아일랜드에도 가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궁금해진다. 여행기를 읽고난 후 이 한권의 책에 담겨있지 않은 다른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내게는 좀 낯선 느낌이지만 그것이 나쁘지는 않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