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이지만. 그리고 힘든 내용이지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전쟁범죄의 기록을 잊지말아야한다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라며.
*****



희생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힘이 약하다.
희생자는 말할 수가 없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져버리거나 왜곡되기 쉽지만 가해자의 목소리는 끝까지 남아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역사로 기록되곤 한다. 그렇기에 학살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즉 전쟁범죄가 벌어진 바로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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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이 부차를 빠져나간 다음 날 아침, 전화가울렸습니다. 은퇴 전까지 공동묘지에서 함께 일하던동료였죠. ‘볼로디미르, 당신이 좀 도와줘야 할 것같다. 너무나도 많은 시민들이 총에 맞았다. 거리거리마다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데 이를 수습해 줄 사람이 없다.‘ 저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죠.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뿐이에요.
러시아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기간 동안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막상 러시아군에 희생당한 시신을 직접 마주했을 때 저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귀에선 환청이 들렸습니다. 눈앞은흐릿해졌죠. 제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모를정도였습니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다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완각하고 솟아올랐습니다. 고통, 슬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감정들이 목에 걸렸습니다. 이들은 어제까지 저의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친절한사람들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겁니다.
제 머리는 도무지 이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시신을 보는 일에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보아온 시신들은 대부분 단정한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마친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피가 흥건한 상태로 길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마주한 적은 없습니다. 각기 다른 나이와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그렇게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일 겁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어머니이고 할아버지이며 아들일 겁니다. 러시아군은 이 모든 걸 짓밟은 겁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군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일 겁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며 자라왔겠죠. 그런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저지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탱크가 뚫고 지나간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집이었습니다. 집 마당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죠. 그리고 그 구덩이 안에서 네 구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누워 계셨고 그들의아들과 딸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죠.˝
이 이야기를 꺼낼 때 볼로디미르는 유독 힘들어 보였다. 두세 차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두 눈은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의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한 듯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신의 상태를 봤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아들이 먼저 죽은 건 분명했습니다. 너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제가 본 시신의 상태를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한 명의 여성・・・ 딸로 보이는 그 여성은 아마 모든 것을 지켜본 뒤 살해당했을 겁니다. 총알이 관통한 그녀의 다리에는 매듭이단단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매듭이었죠. 누군가 그녀를 지혈한 겁니다. 하지만 그녀를 살리기 위해 지혈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너무 일찍 죽는 걸 막기 위한 매듭이었을 겁니다. 다리에 총을 맞은 채로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군인들이 가족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그녀를 비웃었던 게 아닐까요. 그녀를 끝까지 살려웠던 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괴롭습니다.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누군가의 딸이었을 그여성에게 러시아 군인들은 도대체 어떤 행동을 저질렀을까요・・・.
꿈속에선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된 상태로 나타납니다. 저는 깨어날 수 없는 꿈속에 계속해서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선 정말이지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한밤중에 꿈에서 겨우 깨어난 뒤에는 차를마시고 호흡을 고른 뒤에야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죠. 제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꿈은 너무나도 폭력적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느낌. 이꿈이 언젠가 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꿈일까요, 아니면 진실일까요. 어느 순간 이게 꿈인지 진실인지 모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건 마치 지옥에서 살아가는 듯한… 그런 기분입니다.˝

첫 번째 출장에서 돌아온 뒤 나를 가장 충격에 빠트린 사건은 이른바 ‘부차학살‘이었다. 2022년 4월 말 키이우의 위성도시 부차에서 45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고, 시신 곳곳에선 고문의 흔적이 발견됐다.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국제법인 제네바협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사실 제네바협약까지 따져볼 문제도 아닐 것이다. 총칼을 든 군인이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건 내가 살아온 세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러시아의 군인들도 누군가의 가족일 것이다.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연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쟁이 시작됐다는이유로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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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2-10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차학살.. 저도 기억합니다.
전쟁초기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잊지 말아야겠어요.

chika 2023-12-10 14:06   좋아요 1 | URL
저도 뉴스로 접한 기억이 나요.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ㅜㅠ
기억하고 다시는 톡같은 일이 반복되지않는 미래를 우리가 만들어가야겠지요.

 

오양 70호를 침몰시킨 것은 물이 아니라 탐욕이었다.
... 침몰하는 배의 마지막 순간은 섬뜩하고 비통하다.

*****

한국의 원양어선, 사조의 오양...은 내게도 낯설지않은 이름이다.
근데 정말 부끄럽게도 배위에서 벌어지는 옩갖 악행이 다 나온다.
오래전에 병원에 있을 때, 옆 병동에 통역사가 왔다고해서 뭔 일인가 궁금했었는데 선박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가 다쳐서 통역을 해주러 잠깐 온 것이라고 설명해줬었다. 그 노동자가 얼마나 훌륭한 대우를 받은것이었는지는 알고있었지만 오늘 이 책을 읽으며 그때 그 노동자가 일했던 작은 선박의 선장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을까 새삼스럽다.

하고싶은 이야기들은 많지만.
우리 해상에 나타나는 중국의 저인망어선떼는 그래도 지들 나라에서 일하는것이고.
오양 75 에서 노동착취, 성착취를 당하다 탈출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
하아. 부끄럽다.




오양70호를 침몰시킨 것은 물이 아니라 탐욕이었다. 배가 물고기를 과하게 집어삼키려 하자 바다가 역으로 배를 집어삼킨 것이다. 가라앉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선원은 위치를 이탈하는 것도 구명조끼를 입는 것도 거부하고 조타실에 들어앉은 신씨를 봤다고 한다. 기둥을 끌어안은 채 손에는 투명한 병을 쥔 신씨는 한국어로 뭐라 중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뉴질랜드 국적의 어선 어멀털애틀랜티스 Amaltal Atlantis 호가 초단파 무전을 듣고 한 시간후 도착했다. 더 늦었으면 그 배로 구조된 45 명도 아마 동사하거나 익사했을 것이다.
침몰하는 배의 마지막 순간은 섬뜩하고 비통하다. 나는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그 광경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이 있다. 마치 괴수가 아래에서 배를 잡아끄는 것만 같다. 물이 배를 빨아들이는 마지막 순간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근처 물에 있는 사람까지도 딸려들어갈 정도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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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비정하고 포악한 곳이 될 수 있다. 인간 최악의 본능을배양하는 물 위의 인큐베이터이자 진화적 적합성이 해양 생물 사이에서 가혹하게 힘을 휘두르는 서식지다. 발견의 장소이자 한없는 열망과 재창조의 장소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해양국가의 희한한 건국 설화는 바다 위 기행의 상징이자 국제법을향해 보란 듯이 날린 한 방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의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건 바다에서 펼쳐지는 모험주의의 풍부한유산과 완강하고 집요한 권리 주장, 요란한 주권 선언의 이야기였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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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우 해양경찰에게 밀렵선을 붙잡는 것은 첫 단계일 뿐이었다. 배를 해안으로 끌고 온다 해도 외국인 선원과 말이 통하는 통역사가, 이들을 수용할 교도소 공간이, 심지어 이들을 실질적으로 고발할 법이 팔라우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경찰이 나포한 밀렵선 대다수는 가족 사업체 소유의 작은 배였다. 다소 무거운 편인 벌금 50만 달러를 낼 돈은 이런 운영주에게는 대개 딴세상 이야기였으며 선원을 송환할 비용은 더더욱 감당이 안 되었다. 배를 압류하면 팔라우는 그 선원들을 먹이고 재우고 고향으로 돌려보낼 비용 문제를 떠안아야 했다. - P122

무법의 바다를 탐사하면 할수록 포식자와 먹잇감을 구별하는것이 어려워졌다. 내가 팔라우에 온 것은 어류를 비롯한 이곳의 해양 생물이 처한 위태롭고 암울한 상황에 초점을 맞춰 전세계 바다에서 벌어지는 약탈 행위의 일선에 있는 외국 밀렵선의 행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뚜렷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어류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팔라우 수역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책임이 있는 것은 맞지만, 이 사람들은 그 자원보다 더하지는 않을지언정 비슷한 정도로 취약해 보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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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hika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chika 2023-12-06 15:3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고 2024년은 더 멋지고 즐거운 한 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산업 혁명이 기후에 비가역적 피해를 초래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방식으로 기후는 바다에 심각하고 지속적인 결과를 일으키고 어업의 본질을 바꿔놓는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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