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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평점 :
대뜸 이런 말부터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시드니'를 읽으면서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가 진리구나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확실히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재미있었는데 짧은 에세이들만 읽다가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길게 쓴 에세이를 읽으니 훨씬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올림픽 취재를 하는 소설가의 글이 뭐 별거 있겠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 그러니까 그닥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특유의 가벼운 농담처럼 흘러가는 여행인듯 여행아닌 여행 이야기인 '시드니'는 2000년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에 취재기자로 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다. 물론 글의 시작은 하루키답게 1996년 애틀랜타의 마라톤으로 시작하고 있고,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는 이누부시 다카유키의 연습을 그려낸 글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드니 일지.
올림픽 취재일기라고 해서 온통 올림픽 경기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올림픽 기간이 되면 온갖 방송, 언론 매체에서도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서부터 식사, 숙박 시설, 올림픽이 열리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까지 온갖 이야기가 넘쳐나지 않는가. 그러니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그의 입담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이지만 별 것이 되는, 때로는 더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것이다.
내 기억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시드니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한국 선수들의 경기 이야기가 나오면 검색엔진을 돌려볼까 싶어지기도 했지만 하루키의 이야기 자체를 그대로 즐기기 위해 묵묵히 책만 읽어댔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보니 일본 선수들의 경기 이야기도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보도를 위한 취재를 위해 시드니로 가기는 했지만 온전히 취재만을 한 느낌이 아니라 좀 더 자유롭게 경기를 즐기고 올림픽을 즐기는 하루키만의 시각으로 시드니 올림픽을 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일본 여자 마라톤 선수의 메달 소식보다 기대주였던 남자 마라톤의 이누부시에 대한 글이 더 길고 그와의 인터뷰까지 실은 것은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 대한 그의 강조점이 더 잘 드러나보이고 있다. 평화의 제전이라기보다는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과 자본의 투입으로 경제적인 낭비와 손실이 심해지고 있어서 아예 아테네에서 계속 열린다면 원래의 마라톤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하루키의 말에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뭔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간략한 역사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고속도로 이야기와 해변, 특히 상어가 출몰한 기사의 인용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느껴지기는 했지만 서핑을 즐기는 이들의 입장과는 다를수밖에 없는 내게는 좀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알았는데 삽화는 일본의 일러스터가 아닌 우리 작가 이우일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에 실려있는 그림들과는 좀 다르게 선이 굵고 강한 듯 느껴졌었는데 솔직히 나는 이우일의 삽화가 가장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일지. 새삼 15년전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야기가 뭐 재미있겠어? 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일지'는 다시 봐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