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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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그저 흔한 에세이류의 책이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제목조차 헷갈려 했다. 캐스팅, 그래 그건 영화에서 하는거지.. 그러니까 '영화, 철학을 캐스팅하다' 가 맞는걸꺼야, 라고 생각했다 혼자 속으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철학이란 녀석이 영화를 캐스팅해버린거쟎아! 라며.

책을 반쯤 읽었을 때, 기대치가 점점 증폭되더니 급기야 더 참지를 못하고 책을 덮고 고민에 빠졌다. 이 책에 나온 영화의 비디오라도 빌려서 다시 한번 본 다음 책을 계속 읽을까, 아니면 책을 읽고 비디오를 빌려볼까?

슬프게도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만큼의 여유가 없는, 바쁜척해야하는 연말인지라 고민은 짧게 끝내고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어떤 영화는 뜻밖의 발견이었고, 또 어떤 영화는 새로운 발견이었고, 또...이제야 이해가 되는 영화도 생겨나버렸다. 아, 이제야 이해...라니.

이 책에 나온 스물아홉편의 영화 중, 내가 보지 못한 영화는 디 아더스, 피아노, 쉬핑뉴스, 나비, 간장선생, 친절한 금자씨, 일 포스티노, 좋은 걸 어떡해 8편이다. 나는 가끔씩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봤을것이라 생각하는 영화를 건너뛸때가 있다. 피아노가 그랬고, 친절한 금자씨도 그랬고, 일 포스티노도 그랬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내가 왜 이 영화를 안봤지?'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렇긴하지만 영화를 봤다해도 내가 그 영화를 다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한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지.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책을 읽게 되면 책을 읽는 재미는 배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더구나 영화를 보고 나서도 도대체 내가 뭘 본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던 영화는 더 그럴수 있으리라. 나만 그럴까......?

매트릭스를 보며 네오가 트리니티의 입맞춤에 깨어나는 모습에 혼자 영화관안에서 푸핫 거리며 웃었던 기억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한 내가 좀 멋쩍어졌고,  중경삼림을 보면서 왕정문은 왜 갑자기 떠나있었던걸까 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것도 책을 읽으며 아하~! 하게 되었다. 더구나 존 말코비치되기는 이 책을 읽는 중에야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과 그 흐름이 이해가 되었다. 몇년 전에 존 말코비치되기를 볼 때는 단순히 '존 말코비치'를 위한, 존 말코비치에게 바치는 헌정 같은 영화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영화를 봤다는 것을 텍스트를 보면서 알게 되었으니... 조금 챙피하긴 하지만 사실인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텍스트로 영화를 이해하고 나니, 그 장면들이 스치면서 예전에 봤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집에 유일하게 비디오로 굿 윌 헌팅이 있는데 내일은 그거라도 봐야겠다. 무지 감동하며 봤던 영화였는데.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가 풀어나가는 영화는 하나같이 다 내가 좋아하고 엄청 감동받고 무지 재밌게 본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보지 못한 8편의 영화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영화 두어편을 빼고)
아, 그래서 이 책이 엄청 좋은거였을까?

이 책의 재미는 이런것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만 이것만이 이 책의 재미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감독이 어떤 의도에서 어떤 연출을 하였든 그것만이 영화의 의미이고, 영화가 주는 텍스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내가 나의 언어로 만든 텍스트 역시 그 영화의 일부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많은 것 중 하나는 이런 뜻이 아닐까.

"영화와 사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귐은 영화를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품은 닫혀 있으나 텍스트는 열려 있다. 작품은 때로 고통을 안기지만 텍스트는언제나 즐거움을 준다."(지은이의 말에서)

많은 영화를 즐기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영화를 즐긴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이젠 더욱더 영화와 절친해질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더 즐거워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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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5-12-2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치카님,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무지 뿌듯해요. 으쓱으쓱. 전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비랑 일 포스티노를 보고 싶어졌는데 방법이 없네요. ^^ 저자가 글도 참 재밌게 쓰는 사람이라서 책을 죽죽 읽어나가는 게 좀 아쉽데요.

2005-12-2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05-12-23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이안님! ^^
전 이안님의 이런 점(! ^__________^)이 좋아요.

하늘바람 2006-01-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