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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 황경신의 프로방스 한뼘 여행
황경신 지음 / 지안 / 2005년 10월
품절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고 믿는다. 그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 일을 마치고 다른 일을, 이것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인생이 제대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어쩌면 인생에서 선택이라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그것으로 인해 내가 선택해서 살아가는 나의 삶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자신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런 것과 무관하다, 라고 말할수도 있다.(91-92)
그러나 삶에 대한, 미래에 대한, 즉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우리들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인생은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얻지 못한 것을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고 싶다. (92)
어느 천재 건축가가 설계한듯한 아름다운 마을 고르드를 보고 있으면, 수많은 화가들이 프로방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아늑한 햇살이 비치는 언덕 위에서 마을은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89)
산 위에 요새가 있고, 요새 안에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 숨어 있다. 우리는 두근거리며 동화 속에 발을 들여놓고, 잠시 동화 속 공주나 요정이 되는 꿈을 꾼다. 그러나 마법은 깨어지고, 현실은 다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꿈은 늘, 험한 산 위에 숨어있는 요새와 같다.(189)
걸음을 멈추고 잠깐 뒤를 돌아본다.
숨가쁘게 달려오던 삶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돌아선다.
내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삶이 놓여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모든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가끔 삶이 무료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from Marseille
바다는 멀고 아득한 곳에서 하늘을 만나, 뚜렷한 수평선을 그어놓고 있다. 그들이 만나는 '멀고 아득한 곳'은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우리로 하여금 터무니없는 꿈을 꾸게 하는 것은 이런 존재들이란 생각이 든다. (180)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낯선곳에서 익숙한 곳으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일탈에서 일상으로
외로운 곳에서 또한 외로운 곳으로
오랫동안 외로웠던, 앞으로도 외로울 곳으로
누군가 나를 기다릴
누군가 나를 잊었을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하고 따뜻한 불빛과
텅 빈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from Paris
모든것이 평화롭고 고요한 프로방스,
나의 자유를 묶어놓고 있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그곳.
수많은 이별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용감해지기 위해
가끔 그곳으로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