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장수왕 본기에는 북위에 고구려가 조공을 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지리적으로 더 인접한 북위이기에 고구려는 조공을 통해 더 북위를 달랠 필요가있었다. 장수왕의 북위 조공을 ‘국화‘로 오인하면 안 된다. 조공책봉관계는 자주권을 박탈당하는 속국화의 개념이 아닌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였다. 그리고 조선이 명·청에 조공하는 것과 고대의 고구려가 북위에 조공을 하는 것 역시 같은개념으로 볼 수 없다. 고구려의 북위 조공에 사대주의적 사고관은 전혀 없었다.
조공을 하지 않음은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를 자처하는 짓이었으며 중국의 황제권 쟁탈전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고구려는 굳이 중국 황제 자리를 두고벌어지는 싸움판에 낄 이유가 없었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나 신라 모두 중국을 다른 문명권으로 인식했기에 조공을 했다. 북위와 유송이 서로 조공하지 않았던 것은 두 국가가 중국 문명의 유일한 황제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었기 때문이다. -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