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마음 -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7단계 티베트 전통 명상
쟈 낄룽 린포체 지음, 예셰 롱 코리아 옮김 / 담앤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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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부제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7단계 티베트 전통 명상]이다. 정통 명상을 부각한 부제와는 다르게 본서의 내용은 전통 명상 체계에 따른 명상들을 현대인들이 손쉽게 접근하도록 간추리고 축약하여 뭉뚱그려 놓은 내용이다.

 

본서는 티베트의 전통이라고는 하지만 티베트 전통 종교 뵌교의 가르침 족첸이 아니라 이젠 티베트와 분리할 수 없어진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를 현대화해 전하는 책이다. 다만 전통을 그대로가 아니라 현대화했다고만 하기에는 수행 체계를 너무 뭉뚱그려두고 체계화되어 있는 것을 오히려 추상화한 경향이 너무도 커서 적어도 나에게는 실수행용으로 다가서기 어려운 책으로 다가왔다. 물론 수행을 사랑하시는 분들 중 마음을 이야기한다며 형이상학적이면서 추상화한 마음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게는 상당히 흡족한 책일런지도 모르겠다.

 

요가수트라에서 물론 삼매를 크게 분류하고 있고 불교에서 삼매를 세밀히도 세분화해서 전달하기는 하지만 수행 체계만큼은 다가서기 명료하게 되어있는데 본서는 그 명료한 수행체계를 다시 추상화했다고 여겨진다.

 

1

 

첫 번째 명상 기본 명상

두 번째 명상 고요히 머무는 명상

세 번째 명상 다듬어진 명상

네 번째 명상 통찰 명상

 

사유하기지금까지 다룬 주제들 더 깊게 들여다보기

 

2

 

다섯 번째 명상 깊은 마음 열기 명상

여섯 번째 명상 순수한 마음 명상

일곱 번째 명상 개념 짓지 않는 명상

 

사유하기대승, 금강승, 족첸 전통 수행 살펴보기

 

목차를 옮겨봤는데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를 현대적 용어로 번역한 것은 좋다. 하지만 실수행으로 접근하기에 첫 번째 기본 명상이라는 좌법을 다룬 장과 세 번째 명상까지는 수행자가 어느 정도 불교 수행에 대한 상식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다가서기 어렵지만은 않겠으나 네 번째의 통찰 명상부터는 정통적인 방법과 다르다는 저자의 말이 너무도 뼈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실수행으로의 접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서술이라면 전통적 체계적 방법과 다소 다른 수준이라는 표현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이후 단계의 명상들도 실수행을 하도록 안배된 서술이라기 보다는 수행의 경지를 추상적으로 묘사한 경향이 크다. 물론 마음 수행을 수행의 양식으로 삼는 분들께는 이런 서술이 친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행 입문자가 실수행으로 삼을 방편으로서는 너무도 모호한 서술이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마음 수행을 사랑하시는 분들과 마음과 의식에 대한 영성서와 같은 서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마음의 정화 차원에서 읽어보시면 좋을 만한 책으로 다가올 것이다.

 

본서는 입문자보다는 이미 하나의 수행을 수행해 오시면서 수행이 주는 마음의 평화와 수행에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과정에서의 마음의 상태를 주지하고 싶으신 분들께 권하고 싶다.

 

 

#쉬는마음 #7단계티베트전통명상 #티베트불교 #불교수행 #불교명상 #담앤북스 #입문자용아님 #수행자의참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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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 - 플롯부터 세계관까지, 마블로 배우는 매혹적인 시리즈 잇는 법 스토리텔링 비법 시리즈
홍지운 지음 / 동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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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자는 SF 작가이자 웹소설 창작과 교수이다. 저자가 말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것이 이 시대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공유언어이자 대중적이며 효과가 입증된 공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업이 작가이며 창작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생업인 사람이기에 이런 그의 주장은 들어봐야지 싶은 미더움이 생긴다.

 

본서는 어느 장르던 집필을 꿈꾸는 사람이 들어봐야지 싶은 주제를 서술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 대중 다수가 공유하는 대상이자 하나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혹하며 관심도 갈뿐더러 저자가 이야기하듯 MCU를 대상으로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공식을 추출한 내용이기에 이해와 습득이 쉬워 보인다. 이 책은 창작을 꿈꾸는 분들이 공부로써 다가서도 좋을 내용이지만 이제까지 수퍼히어로 무비를 좋아해 왔던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다시 돌아보며 좀 더 깊이 있게 그 장르의 영화들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도 좋을 책이다.

 

본서는 주인공, 빌런, 조연, 세계관, 플롯 공식, 연출, 주제의 일곱 가지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인물이라고 분류해도 좋을 장을 주인공, 빌런, 조연으로 세분화해서 조망하는 것은 창작에서 특히나 수퍼히어로물에서 인물의 중요도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관은 복잡할 필요나 연연할 정도로 그 중요도가 크지 않다고 하면서도 세심히 소개하고 있으며 플롯 공식에서는 이 책이 짧은 호흡의 영화가 아니라 시리즈 영화를 구상하는 게 목표임을 주지하게 한다. 대부분의 내용과 연출 대목과 주제 대목은 저자가 상식적인 것은 배제하고 서술하겠다고 서두에서 밝힌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꼭 필요한 언급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MCU 영화들은 대중 대다수가 여러 편을 보았거나 거듭 보았으리만치 인기와 파급력이 큰 장르였고 까닭에 다수가 영화의 공식들을 대강은 다 알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전문 창작자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하는 것도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이젠 창작도 다양한 장르에서 의욕적으로 만드는 시절이라 수퍼히어로물과 같은 장르에 대한 의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본서가 필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 저자는 상식적인 대목은 빼고 MCU만의 특징을 담으려했다고 하지만 본서를 통해 창작의 기본을 배울 수 있기도 하다.

 

창작을 꿈꾸며 다양한 장르의 스토리텔링 책들을 섭렵하시는 분들께는 본서가 더더욱 매력이 느껴질 책이 아닐까 싶다. 좀 더 다채롭게 영화라는 매체를 즐기고 싶은 분들과 수퍼히어로물을 써보겠다고 작정하신 분들 그리고 영웅서사에서 사회와 관계와 자신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분들 모두에게 끌림이 있을 만한 책이라 독서가들 다수에게 선뜻 권해도 욕은 먹을 일 없을 것 같다.

 

#창작자를위한마블스토리텔링 #마블스토리텔링 #홍지운 #동녘 #도서협찬 @chae_seongmo @dongnyok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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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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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이들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그러나 우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 몽테뉴

 

E. T. 시튼의 [인디언의 복음]을 통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유럽 문명의 조우 그리고 원주민의 문명을 야만이라 부르던 이들이 결국 그들의 문명이 자신들, 유럽의 문명보다 보다 원숙하고 거룩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엿보기도 했었다. [인디언의 복음]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에 경탄하는 과정이 영성서처럼 담겨있다면 본서 [야만의 해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걸친 원주민들을 인디저너스라고 칭하며 그들 전체 문명과 유럽 문명의 교류를 담고 있다.

 

본서에서는 해양 개척시대에 신대륙을 발견하고 최초의 만남에서 인디저너스 문명과 부에 감탄하며 그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대목부터 시작된다. 당연히 인디저너스들이 노예가 되며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과 같은 향방에 처해진 대목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인디저너스는 난생 처음 마주한 유럽인들의 질병들에 취약했고 너무도 쉽게 죽어갔다. 노예화한 인디저너스보다 주목되던 것은 초기 유럽에 외교사절로 건너가게 된 인디저너스인데 이들은 사절단 형식으로 가수, 서커스단원 등도 정치인들과 함께 건너가 유럽에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절단 형식만이 아니라 특정 부족의 어린 왕자 같은 이도 유럽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유럽으로 향하기도 했고 유럽에 도착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살다 죽은 사례도 있다. 본서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디언의 복음]에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유럽인 사이의 외교를 논하며 거짓과 위선과 가식으로 뭉친 자신들 스스로를 자기비판하는 경우에서 엿보이듯 유럽인들은 약속이나 맹세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앞서 말한 어린 왕자의 경우도 부모가 유럽인들에게 20개월 내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보냈지만 유럽인들과의 약속은 도무지 믿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유럽으로 간 인디저너스, 대개 외교적 목적으로 간 이들은 한결같이 부와 가난, 거대함과 초라함, 조직력과 폭력이 공존하는 유럽을 보고 기이하다 여겼는데 그들이 남긴 몇 안되는 기록 중 남아있는 것을 보자면 이렇다.

 

친우들이여, 이 나라의 수많은 백인들처럼 우리가 부유했다면, 이 추운 날씨에 신발도 신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몸을 데워주었을 것입니다.

 

친우들이여, 우리는 이 나라에 온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마음 아픕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가난합니다. 그러나 빈곤한 이들에게도 충분히 먹을 것이 있고, 따뜻하게 입을 옷이 있습니다. ......

 

친우들이여, 이렇게 부유한 나라에서 이렇듯 많은 이들이 빈곤하고 굶주리며,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과거 유명했던 [빠빠라기]라는 책의 시각과도 같은데 야만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분류인지 알 것도 같았다. 유럽인들이 야만이라고 바라보던 신대륙의 인디저너스에게는 이렇게나 문명을 자처하는 유럽의 계층 간의 격차와 불평등이 열등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술의 격차에서는 유럽이 앞섰지만 기술만이 문명화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대륙의 인디저너스 문명들에 한참이나 열등한 것이 유럽 문명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열등한 문명이 대세가 되어 전 세계를 물들인 지금 우리는 더불어 열등한 존재가 되어 평준화되어 버렸다. 암과 바이러스처럼 유럽 방식의 문명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유럽과 같은 격차와 불평등을 조우하게 되었다.

 

본서에서는 유럽의 개척자들이 신대륙으로 들어와 자기들의 통역사로 쓰기 위해 강제로 인디저너스를 납치하고 인디저너스 국가들에 전염병을 전파하며 그들을 복속시키고 절멸시킨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조우에 주목하고 한 문명이 파괴되고 각각의 국가가 사라져간 역사는 간략히 넘어가고 있다.

 

본서에서 참고한 것은 역사 외에도 그 시대 유럽 각국 왕의 칙령서와 교회 기록 그리고 당시 유럽으로 온 인디저너스에게 지출된 회계기록 등인데 그만큼 당시 유럽에 방문내지는 납치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유럽에 남긴 그들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개척자를 자처하는 침입자들이 자신들의 통역사로 쓸 목적으로 납치한 사람들부터 시작되어 노예화된 이들과 피랍된 고위층들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이어졌다. 유럽의 왕들은 국가의 다름을 떠나 인디저너스라도 왕족과 귀족은 우대했는데 그들이 유럽에 오게 된 경위를 떠나서 그들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지출되는 금액을 부담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인디저너스는 유럽의 질병에 취약했는데 유럽까지 오는 항해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결국 유럽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들이 잦았고 그 장례비용도 유럽의 왕들이 각기 자기 국가에서 사망하는 경우 부담했다. 하지만 대다수 노예가 된 인디저너스들의 삶은 달랐다. 자유인이 되었다가 다시 강제로 노예가 되는 경우 소송전을 통해 자유를 얻고 위로금 형식의 피해보상금을 받는 사례들도 있었다.

 

노예가 되지 않더라도 개종을 핑계로 문명화라며 유럽의 개척자들을 위한 사람들도 세뇌된 인디저너스는 자기들의 국가와 주변 국가와 민족들을 유럽인들이 복속시키고 멸망시키는 데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에 저항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경우에 따라서 수감된 상태에서도 유럽의 왕에게 소송전과 서한을 보내 다시 자기들의 기여에 따른 보상을 받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미대륙의 현재 국가들의 원류가 유럽에 그들이 헌납하거나 빼앗긴 보물과 유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한 건 그들의 자신의 문화와 정신을 그리고 언어를 빼앗기고 단절하게 된 경우가 미대륙의 원주민 전체가 겪은 최악의 결말이 아닌가 싶다. 시대는 흘러가지만 미대륙의 과거 번영하던 문명들은 이제 그 전승을 잃게 되었다. 인체의 암세포가 확산될 때 암은 자신에게만 영양과 혈액이 밀집하도록 만들면서 커나간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암의 특성이다. 그 특성이 유럽의 문화가 전 세계에 전파된 과정에서 여실히 동일하게 보인다. 인류는 지구에서 이젠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몇 세기 안에 행성 간 탐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유럽 문명의 전파와 같은 양상이 우주 개척시대에는 바뀌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면 그런 기대를 접게 된다.

 

#야만의해변에서 #캐럴라인도즈페넉 #까치 #대항해시대 #유럽사 #서양사 #세계사 #역사책추천 #역사책 @kachi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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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그레고리 K. 빌.데이비드 캠벨 지음, 김귀탁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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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으로 요한계시록에 매혹적인 면을 느낄 수밖에 없어 이 책과 함께 하게 되었다. 다만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 이유를 조금 밝혀야 할 것 같다. 내가 기독교인이었던 순간은 성경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언급하는 대목만 읽던 때이다. 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부터는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었다. 성경 자체에 모순이 깊고 이걸 그대로 믿는다면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는 게 성경이라 생각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나님의 정의와 피조물의 정의가 우선 모순되며 자신이 창조한 한 인간 족속에게 다른 족속의 인간은 성노예로 삼을 어린 여자 몇만 남기고 남녀노소 모조리 죽이라는 거룩한 진멸이라는 것도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은 진작부터 모순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유일신인데 유일한 존재가 도대체 누구를 질투한다는 말인가? 인간이 몽상하는 가상의 다른 신들은 창조자의 입장에서 그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의 상상을 질투한다니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존재가 하나님이란 말인가? 창세기 초반의 인간과 피조물 그리고 실낙에 관한 소소한 부조리를 떠나 다른 대목들을 보아도 유대인들의 경전에 나타난 하나님은 부조리하고 어불성설의 존재일 뿐이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나님을 개종시키다시피 그 상을 변모시키는데 이 역시 이전의 하나님과 신약 이후의 하나님 사이에 괴리만 더 크게 느껴진다.

 

예수님의 상도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거나 그만이 유일한 존재인 독생자라고 수평관계에서 상하 관계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친구를 자처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서도 그의 제자들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대목도 그가 독생자인 것을 다른 이들은 모르고 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고 있다. 오히려 너희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안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게 너 순조로이 해석된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알게 해 주겠다는 웅장한 말씀이었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이 모두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한 초기 기독교도 중 삼위일체, 예수님을 신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종파의 해석이 로마의 정치에 편승해 대세가 되며 이루어진 상황이다. 초기 기독교 중에서도 그노시스라던가 그와 비슷한 해석을 하는 종파들은 당시 거의 대부분 숙청되어 사라졌다. 복음서들을 보아도 예수님의 출생지역과 기록들이 상이하다. 그렇다면 당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이종사촌의 기록이 정확할 것인데도 그의 기록과는 다른 기록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구약에서 기록된 메시아의 출생지역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죄인들 사이에 머문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래서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 대중을 죄인으로 정의하는 도그마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매순간마다 죄를 짓고 살며 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수님 믿어서 사라지는 원죄만이 죄가 아니라 매순간 매초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도 거듭 매순간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 인간이다. 신앙만으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인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불신앙은 지옥행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매순간 죄를 짓도록 제작한 인간은 한순간의 신앙만으로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안(사이)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너희 재산을 땅에 쌓지 말고 천국에 쌓으라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에 미쳐서 순교될 상황을 미친 듯이 추구했다. 애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이 심각히 이기주의를 추구하니 서로 사랑하며 배려하고 함께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취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어린 눈과 마음으로 이 말씀에 대해 오히려 각지의 지배자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죽이지 않으려 거듭 살려 보내며 제발 이렇게 사형당할 짓들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와중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처해 끝내 사형당해 죽을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천국이라는 보상에 탐욕스런 자들의 욕심과 욕망으로 갈 곳이 정말 천국일까 싶기만 하다. 기독교인이라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라는 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1차와 2차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모든 게 유대인들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 벽을 쌓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며 인간과 신과 예수님의 상 사이에 괴리를 거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심이 더 크게 그 괴리를 키웠고 말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상은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인간을 만들자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구조를 본따 창조되었다는 말이 되며 하나님의 구조대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이 보이신 능력의 일부를 구현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카발라 철학에서는 태초의 피조물인 실낙하기 이전의 아담을 아담카드몬이라 부르며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해내었다고 보고 있다. 이 카발라 철학을 예수님께 대입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제작하신 진정한 인간(眞人)으로 회복(복본 復本)된 사람(아담카드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신격화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존재로서의 정의가 가능하지 않나? 예수님께서도 이미 미래에 종말의 날에 진짜 메시아가 도래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질투하였기에 자신이 돌아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그 존재를 한자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보혜사를 자신이 보낼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과 같이 실낙하기 전의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되면 능력이 발현될 것을 알았기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저 산을 바다에 던질 수도 있을 거라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분도 미래의 대재앙을 미리 보셨고 예언하셨으며 그의 이전 선지자들과 이후 선지자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날을 보고 예언했다. 그레고리 빌의 요한계시록은 구약과의 영속성을 주목하지만, 다른 주석가들은 계시록에서의 구약 인용이 실제 구약과의 상이한 점을 주목하기도 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해 구약을 날조 또는 왜곡해서 인용한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습성을 계시록을 쓰면서도 보인 것 같다. 그럼에도 계시록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계시록 예언들을 완수하면서 대중이 예언이 이뤄지고 있다고 믿으며 안일하게 대비할 마음을 잃게 할 의도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에 세계적 규모의 종교들의 예언은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본서를 소장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읽고 있다. 그레고리 빌은 계시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요한의 말을 믿으며 계시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와 살아가는 자세는 무언지를 논한다고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태도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듯하고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분명 이 시대 상황에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서가 아닌가 싶다. 나로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바르게 살아온 선한 사람도 죽는 경우가 있고 타락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죽고 사는 문제는 자신이 신앙하느냐 마느냐 하는 자신의 태도나 노력에 달린 일이 아니고, 불신앙자에게는 운명,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니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고려해야 할 건 7년 환난이 결코 7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돌아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2000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30년인 것을 고려하고 7년이 3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인 걸 고려하면 200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400년에서 500년은 7년 환난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적그리스도나 사탄의 하수인으로 가정되는 카발 또는 NWO 또는 일루미나티가 미국의 정재계와 국가 기관들과 미디어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걸 믿는다면, 미국 국방성 소속 과학개발처인 다르파 DARPA에서 인간의 종교성,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전자를 소멸시키거나 기능을 제거하는 화합물을 만든 걸 고려할 때, 과거 선지자들이 적그리스도가 단두대로 신앙인들을 죽인다고 한 예언보다 더한 시절이 올 수 있다는 결론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BCI기술을 역으로 이용해 AI로 인간의 본능과 욕망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 거기다 신앙심과 종교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가 7년 안에 끝나리라고 기대하고 싶겠지만 이제 시작되어 400~500년은 갈 거라고 보는 게 이성적인 판단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중이 할 수 있는 건 예측하고 대응안을 마련하려 함께 생각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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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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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오늘날 독일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본서의 1장은 이런 화두를 건넨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야를 가를 새 없이 부정선거라는 암흑을 두르고 있다. 황교안 의원이 민주당의 부정선거를 논하다가 벽에 부딪히자 국민의 힘이 행한 부정선거를 논한 것과 같이 이미 박근혜 정권 때부터 부정선거 논란은 유투브 영상으로 알려져 왔다. 어느 당 어느 인물 하나의 폐단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진작부터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야당이 다수당이 되며 국회를 압도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압박하고 대통령이 임명함과 동시에 탄핵이 이어져 29번에 이르는 길들이기식 제재가 줄이었다. 대통령 특활비를 비롯한 여러 부서의 특활비를 삭감해 수사, 기소, 행정 전반을 저지했고 정부 예산을 대대적으로 삭감했다. 이 모든 건 민주당에서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였음을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란 인물도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처음부터 흡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범죄를 감추려 수사 개입 등 권력을 남용한 것이 명백했고 그로 인해 민주당에서 탄핵할 명분이 생기자 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계엄을 선포해 처음엔 국민 모두가 이에 저항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수 국민이 윤 어게인을 외치게 된 데에는 그의 부정선거를 처단하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명분이 국민들에게 최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일관적이고 확고하게 거부하는 데 반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애매모호란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이 말은 계엄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문장으로 쓰일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은 법률에 있어, 대통령의 권한으로 계엄을 선포할 수 있으며, 국회가 의결해 해제를 제안할 때 거부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보아, 계엄을 선포한 건 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이며 국회의 의결을 순순히 따라 계엄을 해제한 대통령에게 권력 남용은커녕 탄핵 사유조차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계엄 사유로 공표했을 때 명분은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그걸 국민 대다수가 수긍한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은 계엄이 아니라 다수 정당이 되었다고 자기 집단 이익을 위해 국회에서의 처신에 제한이 없는 민주당 인사들에게서 찾아야 할 일이다. 심지어 이들은 국회의원을 욕하거나 비판하면 가중 처벌하는 법안까지 만들었다. 부정선거를 논하면 처벌하겠다며 법안도 발의했었다. 이들은 법 위에 있는 존재도 아니라 법을 창조하는 빌런들이다. 선관위에서는 총선 때 참관인 둘이 부정선거 사례를 보고하자 무시했고 선관위에서 무시하자 이 둘의 참관인이 대중에게 부정선거 사례를 알렸다. 그로 인해 선관위가 이 둘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미친 것인가? 참관인은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다. 참관인이 부정선거를 보고하지 않고 알리지 않는다면 참관인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민주주의 사망이자 대한민국이 침몰 중인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미 문재인 정부 때 조사가 끝났고 미심쩍어 할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때도 유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무안 공항 참사에서는 이미 무안 공항과 둔덕 설치에 민주당이 더 깊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까지 잠자코 있다. 사고 당시 착륙을 거듭 사고 지점으로 하라고 지시한 관제탑 문제까지 진실을 요구할 사안이 다른 참사들보다 큰 대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민주당이 난처해질 상황에는 국민이 피해자가 되어도 다수 국민은 조신한 규수가 된다. 하지만 조선 시대 규수도 분명 참다 참다가는 무슨 직언이든 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직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이 다수인 시대라면 과거 세대가 목숨과 피를 바쳐 일군 민주주의를 우리는 잃고 말 것이다. 침묵은 불의를 향한 동조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가 될 때까지 혹은 되고 나서도 가해자를 격려한다면 이는 느긋할 것도 없는 명백한 자살 시도이다. 이미 시절은 망국으로 들어섰으며 다시 일어서자면 시민혁명이나 쿠테타와 같은 부활의 길밖에는 없는 시절이다. 국가가 국민보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위하고 있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나라 곳곳에서 변사체와 마약이 즐비해지고, 나라 곳곳을 타국인들이 도촬하고 도청하는 지경에도, 특정 정당의 가두연설마저 타국인이던 인물들이 들어서서 다른 나라 말로 연설을 하고, 그 연설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말로 환호하는 상황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국민만이 가득한 시대라면 한 번 망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는 길이 없을 듯하다.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지 않던 국민도 정치 성향이란 걸 띠기 시작한 시대다. 본서와 같은 책이 길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길이 빛이고 어둠인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 더 나은 길을 헤아려 보는 시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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