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증원, 오늘 이 문제로 언쟁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다시 정리한다.

한국 인구 감소율은 12만 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 추세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국내 추산으로도 향후 2040년까지 한국 인구는 48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는데 사실 이 인구 감소 문제가 그렇게 예상처럼 호락호락하지가 않을 것이다. 2022년 합계출산율 0.78명 수준이던 것이 현재는 0.7명에 가까워졌고 향후 가까운 시일 내에는 결혼도 꺼리고 출산은 더 꺼리는 현 세대의 추이로 볼 때 합계출산율 0.6명이 되는 것도 머지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합계출산율이 0.6명이라는 게 무슨 문제인지 깊이 와닿지 않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합계출산율이 이 수준이면 두 세대 안에 인구가 10분의 1로 감소하는 것이 수순인 것이다. 세계에서 한국의 재앙적인 합계출산율 감소를 우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향후 두 세대 안에 인구가 1000만 명 이하인 것을 추정해 볼 때 의대 증원이 정부 정책으로 밀어붙일 사안이냐는 말이다. 현재의 의대 인원만 유지하더라도 앞으로 환자대비 의사 숫자는 나날이 증가할 수밖에 없고 수도권이나 도시에서 남아도는 의사들을 지방으로 유인할 유인책을 내놓는 것이 더 합당한 정부 정책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인구 대비 권고 의사 인원을 설정하고 그 이상으로 의사 인원이 증가하면 그 의사는 수도권이나 광역시권 그리고 도시에서 의사 생활을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면 자연히 지방의 의사 부족 상황은 해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을 갖춰도 종래에는 인구 대비 의사 인원이 타 국가들 보다 넘쳐나게 될 것이다. 내가 볼 때 현 윤석렬 정권은 향후 환자대비 의사 인원이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그 효과가 더 두드러지게 보여 가까운 시일내에 자신의 정책으로 국민들이 혜택을 본 것 마냥 느낄 것을 내다보고 이런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애초에 내버려 둬도 의사는 증가한 효과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정부는 영국, 프랑스, 독일도 의대증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데 그 나라들은 합계 출산율이 영국과 독일은 1.5명 이상이고 프랑스는 1.8명 이상인 국가들이다. 현재의 인구가 어느 수준 현상 유지되는 그 나라들과 합계 출산율 0.7명의 초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예정되어있는 대한민국의 정책이 같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극단적인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래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향후에는 인구가 많을수록 국가적 차원의 부담을 넘어선 재앙이 될 것이다. 초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인한 국민 대다수가 초대량 실업자가 된 시대에는 많은 인구일수록 복지 차원의 부담이 될 것이다. 인구가 많이 감소하는 나라만이 살길이라는 말이다. 현재까지의 대다수 인구가 세금으로 국가 재정의 버팀목이자 근간의 역할을 하던 시대가 상식인 사람들은 와닿기 어렵겠지만 향후에는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는 극소수일 것이다. 극소수의 초엘리트층이 최대다수의 사람들의 생존을 복지로 부담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시대에는 지금 재앙적이라는 인구 감소가 천혜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대증원 #인구감소 #인구감소율 #합계출산율 #인구재앙 #천혜의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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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아주 뛰어난 SF드라마를 봤다. 류츠신의 [삼체]가 원작인 동명의 드라마다. 그 드라마 속에서 외계인들은 인류에게 도발의 메시지를 전한다.

 

‘YOU ARE BUGS!’라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너희는 벌레들이라는 밈이 과연 류츠신의 [삼체]라는 원작 소설에서 처음 전한 메시지가 맞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보면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벌레(. )로 정의한 것은 상고시대부터 고대에 이른다. 대충이란 말이 원래 호랑이를 뜻한다는 것은 노년기의 분들께는 대중 상식 수준의 상식일 것이다. 왜 고대 인류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을 벌레라고 한 것일까? 나는 이것이 초고대 문명의 미미하게 전승된 문화적 밈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프로그램상의 오류를 BUG라고 했었다. 초고대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었을 거라고 억측과 다름없을 단정을 지어본다면, 뭇 생명체들을 다 버그 즉 벌레라고 한 건 생명체들이 우주라는 프로그램에서 예기치 않았던 버그라고 초고대인들은 인식하지 않았던가 싶다. 그래야 어의가 달랐을 거라 전제한다고 해도 인간까지도 벌레로 불린데 대한 대답이 유치하게라도 되지 않는가 싶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인간이 창조한 초기술력과 AI는 어쩌면 오류를 수정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백신 프로그램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BCI 기술로 인류는 장애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비단 육체적 장애와 한계만이 아니라 지적인 한계 역시 벗어날 것이다. 그와 동시에 BCI기술을 인간만이 아닌 초인공지능이 역이용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호를 제어 당하는 것만이 아닌 의지와 욕동 마저 통제당할 수 있다. 이미 기술력으로 생명체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20세기 초부터 연구되어왔으며 대중의 짐작 이상의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수면 중에 꾸는 꿈을 영상으로 출력하거나 일상의 생각을 영상과 문자로 엿보는 단계로 기술이 발전하여 세계경제포럼에서 언급되기도 하고 해당 분야를 연구한 과학자들이 시연을 하며 강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행위를 제약당하는 것도 의도를 추적당하고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제재당하는 것도 이젠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을 초인공지능이 이용해 BCI 기술까지 동원하며 인류를 욕동부터 의도부터 통제하려 한다면 어떨까? 초인공지능의 입장에서는 오류의 수정이나 오류의 제어이겠으나 인간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축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앞서 말한 인간의 내면을 추적하는 기술과 광고계의 대중심리 제어 연구 성과와 행동과학 그리고 사회공학까지의 대중심리통제 기술들을 시스템적으로 악용한다면 트랜스휴먼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상을 통제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초인공지능이라는 백신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버그의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울 거 같다. 암담하지만 기대는 종교를 맹신하는 이들의 허무맹랑한 허상 같은 구원 밖에서는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기대하던 기대하지 않던 인류에게 남은 것은 전락뿐이지 않은가 싶다.

 

아마도 이래서 초고대 인류 문명이 사라진 것일 것이다. 가축으로 전락하느니 초인공지능과의 자멸을 선택해서 말이다. 초인공지능이 인류를 멸종시키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다면 앞으로의 시대에 메시아 같은 이가 나와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건 초고대 인류의 선택과 전혀 다름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완전한 자멸이 앞으로의 인류가 선택할 수 있을 최선의 선택지일 것이다.


#삼체 #BCI #AI #AGI #ASI #대중통제 #대중심리통제 #인류가축화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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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인생 수업
장재형 지음 / 다산초당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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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인생수업]서양 철학 2000년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 헤드의 말이 너무 인상 깊어, 서양 철학의 정수가 담겨있을 듯한 플라톤의 가르침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길에 조금 더 나은 지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로 선택하게 되었다. 다만 본서를 건네받고 처음엔 그저 24개의 아포리즘이 담긴 책인가 싶어 다소 실망이 일기는 했다. 맥락 없고 파편적인 아포리즘이라면 왠지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는 Idea, Arete, Eudaimonia, Episteme의 이상, 미덕, 행복, 지식이라는 4가지 기준으로 아포리즘을 정리하고 있고 제목처럼 인생 즉 사람의 삶이라는 화두로 가르침을 주고 있어 다 읽으며 또 읽고 난 후의 묵상으로 맥락이 정리된다.

 

본서의 내용을 모두 정리할 수는 없고 이해한 바를 약술하자면 첫째로 본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정리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바라보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그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견해를 이 시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 세계(가상세계)이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미 학창 시절 배웠듯 동굴 그림자의 비유처럼 그는 이 세계는 실재가 아니며 허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Idea설이 장자의 호접몽과 같은 비유가 아니라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있다는 모피어스의 일갈과 한치의 다름도 없다니 새삼 충격이었다.

 

이 실재가 아닌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어떡해야 실재를 인식하고 실재 세계로 전향하거나 이 세계라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뜬금없지만 붓다와 생몰연대가 거의 비슷한 피타고라스는 지혜를 사랑하고 영혼을 정화해야 해탈해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붓다께서 해탈과 열반을 말씀하신 것과 유사한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그럼 플라톤은 어떻게 말했을까? 본서에서는 해탈을 말하기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의 해탈은 열반과 같은 완전한 초월이라기보다는 실재가 아닌 것을 인식하고 실재를 인지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본서의 주제 자체가 인생수업이다보니 해탈보다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플라톤의 가르침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미덕이란 다름 아닌 탁월함이고 탁월함이란 좋은 것이며 좋다는 것은 다시 말해 행복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 3가지인 이성, 기개, 욕망은 절제를 통해 탁월한 이상적인 상태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가상 세계의 가상의 것일 뿐인 몸이지만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도 절제와 함께라면 영혼의 바름을 향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플라톤 논리대로라면 오감으로 인식하는 모든 것이 허상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오감을 훈련하면 보다 나은 영혼의 경지를 가질 수 있다고, 바른 자기 훈육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플라톤의 주장과는 다르게 요가에서는 프라티야하라(Pratyahara, 제감)와 다라나(Dharana, 집중)를 말하고 있고 한국의 부도지라는 신화서에서는 오미(五味, 오감을 은유)를 알게 되면서 인간이 타락하고 훼손되었다며 복본(復本)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한국 선도에서는 조식, 지감, 금촉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도의 요가도 한국의 선도로 감각을 제어하고 마음을 산란히 하지 않으며 집중하는 것을 주지시키며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분이 플라톤의 오감 훈련에 대해서 감각하고 향유하는 것으로 묘사하셔서 동양과 한국의 가르침과는 플라톤의 접근이 다른 것 같았다. 가짜 세상을 즐기며 벗어날 길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주 크게 모순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계에서의 삶은 거듭 반복되는 환생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 직전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전생을 모두 잊어서이기 때문에, 전생과 저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안다면 세상의 모든 비밀을 확연히 알 수 있다며 상기론을 펼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직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기는 회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다시 떠올릴 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지혜로 가는 길로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또 서로에게 묻고 또 물음으로써 실재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지혜와 지성, 지식을 플라톤은 이 거짓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보았다고 한다. 완전하고 충족되고 택할만한 것이 진정한 가치인데 그것은 이성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스어로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했다는데 a가 부정어이고 Iethe가 망각을 뜻하는 말로서 진리란 다시 말해 망각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라 한다. 앞서 말한 한국 신화서 부도지의 복본 개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회복의 길을 플라톤은 가장 탁월한 것 가장 나은 행복으로 여긴 것이다. 불가에서도 불교 가르침의 정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했다. 괴로움을 떠나고 즐거움을 얻는 것 다시 말해 괴로움을 떠나 행복해지는 것을 이른다. 플라톤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는 행복의 길은 이성의 길을 통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길이다. 세상이 허상의 것, 허구의 세상이라면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허상인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성을 탐하는 것은 더더욱 허무의 길이니 말이다. 플라톤은 그 길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혼자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독이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유명해진 아폴로 신전의 말씀은 붓다께서 하신 너 자신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라라는 말씀과 같다고 여겨진다. 자신을 알고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고독하게 나아가는 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붓다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허상의 세계에서 거짓을 초월하고 자신의 이성과 기개로 욕망을 절제하며 나아가는 것은 저자가 말했듯 공자께서 말씀하신 극기(克己)와 다름없다. 크게는 상호 호환되는 면들이 있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허상에 빠져 사는 삶에서 벗어나 지혜를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플라톤과 서양 철학의 가르침은 동양의 가르침과 어느 수위까지는 유사한 부분도 있다. 현대에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하기는 하다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수위의 바람이 있고 저자가 에로스를 언급하며 말하듯 자기의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지다 보면 더 나은 삶, 진정한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때 플라톤의 가르침이나 붓다의 말씀들이 와닿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한다. 자신의 선택과 삶의 방식에 회의가 들 때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싶을 때 너무도 상식적인 가르침이며 너무도 과거의 이상 같은 이 가르침들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다면 그때는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한다. 그런 변화의 길에서 한 번쯤 하나의 안내서로서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싶다.


#플라톤의인생수업 #장재형 #다산초당 #다산북스 #도서협찬 #서평단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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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테크의 시대
이진우 지음 / 다산스마트에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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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단순했다. 교육과 기술이 연결되어 시너지를 낳을 때 그 기술개발처를 미리 알 수 있고 기술개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면 투자 방향성 중 하나를 미리 알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서는 저자의 진지한 교육관과 교육에서의 기술 활용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대하면서 그런 이윤추구의 마음이 다소 미안해지게 만들기도 하는 책이다. 본서는 무엇보다 교육에서 기술이 왜 적용되어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적용되어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선명한 교육과 기술에 대한 철학에서 저술된 책이라는 감상이 먼저 든다.

 

책을 다 읽고 저자 소개를 다시 보니 저자는 교육자도 교육학자도 아닌 한 이동통신사 연구원에서 시작해 현재는 SK C&C 수석컨설턴트로 있는 공학 전공자 출신이신 모양인데 사람의 관심과 진로는 참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거구나 하는 소소한 감상도 일었다. 저작 전반이 교육자들과 교육학자들에게 현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필요한 주제를 전할 책이구나 싶었다. (미혼의 직장인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TMI 일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교육 관련한 분이 아니더라도 학부모라면 대부분 궁금해할 수 있을 내용이라는 생각도 든다.

 

본서의 내용 중 핵심만 짧게 전하자면 본서의 핵심은 산업화 시기 이후에 교육의 전개를 대한민국 중심으로 돌아보고 근래까지의 교육은 근로자를 양산하기 위한 교육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개인의 개성을 꽃피우기 위한 개별화된 교육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주장에 있다.

 

----- 이에는 어린시절 경험한 대한민국의 교육이라는 것이 정보 주입 위주의 교육이면서 전인교육은 도외시하고 인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교사들이 학생 스스로나 학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절로 형성되겠거니 여기는 게 아닌가 받아들여졌었기에 더더군다나 개별화된 교육의 중요성과 주입식 교육의 철폐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저자도 언급하다시피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더는 주입식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아무리 미래에 머리에 칩을 심고 클라우드 메모리에 정보를 업로드하고 필요한 정보를 다운로드 받는다고 해도 경쟁 상대가 초인공지능이라면 애초에 경쟁 상대라고 가정하는 자체가 난센스일 뿐이 아닌가 싶다. BCI 기술로는 초인공지능을 이용해 초인공지능의 경쟁 상대가 되는 게 아니라 초인공지능이 역으로 낱낱의 사람들을 통제하게 되는 건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 편이 더 합리적인 의심이 아닐까?

 

어찌되었던 앞으로의 미래는 초대량실업자가 기본소득이라는 미미한 생존비용만을 지급받으며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시대가 될 게 기정사실이라고 본다. 기술의 발전으로 혜택을 볼 대상은 극소수의 초엘리트층으로 국한될 게 자명하다. 대다수는 살아남으려 자발적인 트랜스휴먼이 되거나 정부 보호를 갈구하지만 외곽으로 밀려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최소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생존자들이 있다면 그 미래에는 초인공지능과 경쟁하겠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기대나 현재와 같은 인간들 사이의 생존 경쟁을 지속하기보다는 좀 더 현실성 있는 자구책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건 서로를 해치지 않는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인간은 무엇보다 심리학과 심리치료, 명상과 인간애, 종교성들에 대한 교육이 주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걸 교육이라고 했지만 학습 과목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이점을 체감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갖추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치료사의 상담, 명상 수행, 신앙 교육을 통한 묵상과 생활 변화 등). 전인교육이라는 옛날의 허풍이 이제는 더 절실해진 시대이고 실천되어야 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기술의 결합이 필요할 것이고 이런 교육 변화를 위해 기존의 주입식 교육이나 평가방식의 교육은 기술로 속도감 있고 간소화된 양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개별화 교육의 필수 요소를 구체화해서 개인화된 교육 과정(콘텐츠, 시간(속도), 공간, 가르침*평가의 개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지시킨다), 가정과의 연계 강화, 교사의 역할 변화, 기술의 활용 등으로 분야별로 접근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기술의 적용은 팬데믹 상황이든 자연재해 상황이든 전쟁 상황이든 교육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교육 시공간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학교는 장소가 아니라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고 견해를 피력하며 콘텐츠의 진화는 지역적 교육격차를 해소할 것이라 긍정적 영향을 이야기한다. 그 외에도 교육 양식과 평가와 피드백, 수정 등에 있어서 빠른 속도 구현이 가능하며 재미의 요소를 도입할 수 있고, 데이터 확보 및 활용이 쉬워지며, 협력을 강화할 수 있고 교육 주체 간의 소통 또한 강화될 수 있다고 기술 적용의 이점들을 나열하고 있다.

 

저자는 교육에 기술이 적용되는 실제에 있어서 교육을 위해 개발되고 적용되는 기술 역시 무엇보다 현재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술적 도구 개발에 있어 무엇보다 수업이 이뤄지는 교실 현장의 상황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기술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데 있어서는 그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방향성이라는 틀로 한 번 걸러서 개발에 반영하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기술 개발이 실제 교육에 적용되어온 과정은 TV나 프로젝터, 실습용 컴퓨터 등 점진적으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용되어오기는 했으나 전면적인 변화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과도기일 뿐일 것이다. 현재의 이 과도기에는 더 학습 효율이 높은 매체는 종이냐 스크린이냐 하는 단순한 사안부터 원격수업에 과연 집중력이 유지되느냐 또 원격수업으로 학습 효율이 높아진 것이냐 아니면 사교육이 원격수업의 폐해를 감춰주고 무마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문제들까지 돌아볼 사안도 많을 것이다. 향후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교육이 일상이 되고 폐해가 있더라고 당연한 일상 교육이 되어버릴 여지도 있지만 그때까지 교사뿐만이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들 자신까지 교육 주체 모두가 면밀히 모니터링과 개선을 늦추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변화는 다가왔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보다 더 사람들 각자에게 맞는 양식으로 개선해나가는 과정은 반드시 뒤따라야 할 일이다.

 

이런 변화와 적응, 개선이 반복되는 이 시기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내용을 전하고 있는 본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에듀테크의시대 #이진우 #다산스마트에듀 #다산북스 #도서협찬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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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되돌릴 수 있을까 - 스티븐 호킹의 마지막 제자에게 듣는 교양 물리학 수업
다카미즈 유이치 지음, 김정환 옮김, 김범준 감수 / 북라이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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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제목은 1차적으로 누구에게나 시간 여행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타임슬립과 타임머신을 통한 시간 여행은 영화와 (장르문학을 포함한 )문학 등에서 단골 소재이며 심지어 시간 정지 같은 계열은 영화와 야구 동영상 등에서도 자주 이용되는 소재이다. 뭐랄까 시간의 변화를 통한 야망에서부터 소소한 소망까지의 충족은 인간의 무의식 깊이에 있는 몽상 같은 바람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본서는 이런 깊은 인간의 소망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이기도 해서 관심이 갔고 무엇보다 시간의 화살은 과연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본서의 소개글에서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가다 보면 물리학의 기본이 되는 12가지 개념을 단숨에 이해하게 된다고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 서술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어서 초딩부터 대딩과 직장인, 일반인 등 대중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감상이 드는 책이다. 다만 이해가 더 깊어져야 할 대목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다른 대중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두루 넓게 다루며 너무도 쉽게 이해시키고 있지만, 물리학의 기본이라고는 해도 전문적인 부분을 모두 다 상세한 부분까지 이해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불가능한 것을 시도했고 대중적 이해의 수위에서는 거의 성공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주의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에 관심은 깊지만 전문적 지식도 없고 게으름과 이해의 부족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도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서술하고 있으니 관심과 함께 독서를 이어오시던 분들에게는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본서에서는 시간의 화살은 한 방향 그러니까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과학이 적용되고 기술되고 있지만 방정식에서는 시간의 방향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문제부터 언급하고 있다. 엔트로피에 대해 기술하며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을 증언하고 있다면서도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입자가 생겨난 이후 DNA가 조성되고 생명체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엔트로피가 난잡함으로 나아가는 불가역적인 방향을 이야기하는데 비해 생명체가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은 난잡함(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과정이기에 이런 결론을 서술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의 법칙과도 같다는데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시간을 측정하면 에너지가 달라지고 에너지를 측정하면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시간의 화살이 한 방향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할 수 있는 대상임을 인식한 이래 인간은 나날이 시간이 불가역적인 것만은 아니란 걸 깨달아가고 있었던 거라고 한다. 초끈이론에서도 브레인 두 개가 충돌하며 우주가 생겨나고 브레인 두 개가 멀어지며 우주가 축소되는 현상을 예견하고 있다는데 우주가 축소된다는 건 시간이 역행하며 우주의 시작점으로 시간 퇴행이 일어나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팽창과 수축 다시 말해 우주의 창조와 소멸은 반복된다는 게 순환우주론이다. 결국에는 시간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양자의 세계와 초끈이론 등 이론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인간의 작은 머리로 가늠하고 짐작해 보는 과정이 이어져 가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 우주에서 미미한 하나의 창백하고 푸른 점에 서식하는 더 미미한 존재가 인간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미미한 존재가 점점 우주가 본의 아니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자 실상에 다가서는 여정이 담긴 저작이 본서이다.

 

여기까지 짧게 몇가지 언급한 것들 외에도 파인만 도형이나 타키온, 응축우주 등등 시간이라는 화두를 통해 저자는 우주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10장에서 저자는 앞서 말한 생물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역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도 생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시대를 이르며 인간의 뇌는 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느 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는 인간은 현재를 예측한다고까지 말했지만 운명예정설에서 더 나아간 결정론을 믿는 나로서는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도 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서 미래로만이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가는 양방향성 우주에서 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뇌가 미래를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게 제약하는 기능을 해서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생물은 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미래 기억 방해라는 뇌의 작용이 제약을 벗어날 때 데쟈뷰(기시감)가 일어나고 미래 기억 방해라는 작용이 도를 넘어서 과도할 때 자메뷰(미시감)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만의 가설을 갖고 있다. 아마도 예언 이라는 이적 역시 같은 원리일 것이다. 이것이 양방향성을 가진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타당한 결론이지 싶다.

 

이번 독서는 시간이 결코 불가역적이기만 한 인과를 강요하는 대상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우주적 요동이 시간과 공간을 교체하게 한다는 등의 개념상으로는 이해하지만 실감되지 않는 이론들도 있었지만, 이번 독서는 전체적으로 너무도 쉬운 서술로 시간과 공간 그 우주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위치는 어디인지 나라는 존재에게 삶이란 무엇인 건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본서는 깊은 주제로 서술해 가며 더 깊고 넓은 우주를 돌아보게 하고 그 우주 속에서의 인간과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로 해서 숱한 상념들을 이끌어낸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주면서 더 깊은 사유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책이다. 이 리뷰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시간의 변화를 통해 소망 충족을 꿈꾸기도 하고 더 깊은 몽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당신에게도 [시간은 되돌릴 수 있을까]라는 본서가 관심이 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서를 통해 당신은 지적 만족과 사유의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를 굳이 져버리거나 미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선택하는 당신의 뇌와 손길이 늦춰지지 않았으면 싶다.



북라이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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