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 교과서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인류의 사상사
데구치 하루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까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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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체만으로도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저작이라 기대가 사뭇 깊었다. 철학과 종교 관련 저작들에 대해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나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거나 그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꺼리를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과 종교, 이 두마디 단어만으로도 대중들은 고요와 격동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다. 성찰이냐 비전이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왜와 어떻게라는 의식이 삶이란 주제와 만나며 우리를 진중하게도 열렬하게도 만들기 때문에 말이다.  


본서의 머리말에서도 [인간이 품어온 두 가지 소박한 물음.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고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이 물음에 답한 것이 종교이고 철학이며 또한 철학에서 파생한 자연과학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갖는 의문의 효시와 근본을 그리고 눈 감는 순간이 다가올 때 더욱 깊게 품을 의문에 대해 답하고자 한 것이 종교와 철학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는 이러한 근본적 의문에 대한 답변들에 충분한 전달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철학과 종교에 대한 의문만 있지 전문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에게 생각해볼 꺼리들은 던져주고 있다고 말씀 드려도 좋을 것 같다. 


본서의 장점이랄까 특징이랄까를 짚어보자면 본서는 책 소개글과 다른 리뷰들에서도 언급하듯이 각 장들이 해당 주제를 설명하고 나면 적절한 연표가 제시된다는 것이다. 각 철학자와 종교가의 영향을 받은 다음 사상가에 대한 관계도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 연표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읽은 후 다시 제시되는 연표들을 보면 저작의 내용이 한결 쉽게 이해되고 뇌리에 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책 전반에 해당 사상가의 주요 저작을 소개하는데 저자는 해당 사상가의 논리와 주장을 이해하기 알맞다고 생각하는 저작들을 권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돌아보기는 어렵겠지만 현대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저자의 필력에 자신이 관심이 짙게 가는 철학자의 저작은 한번쯤 읽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책의 특색을 또 하나 짚자면 해당 사상가의 활동시기의 세계사를 언급해 사상가의 사색이 깊어지게 된 계기를 짐작케 해 주고 해당 사상이 태동한 시대적 배경을 주목케 해준다는 것이다. 책 제목부터가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인데 굳이 세계사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는 구성이라고 생각된다. 또 후반부로 갈수록 주요 사상가의 개인사랄까 일화들이 요약되어 나오기도 하는데 각 사상가의 철학과 논리의 근거를 알 수 있기도 하겠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빛과 어둠을 조망하게 해주는 효과가 더 깊다고 여겨진다. 


본서는 사실 근본적이고 깊은 의문과 관심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철학에 대한 대중적 교양서라는 한계가 있어 깊은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부족하고 넓지만 잔잔한 물살만을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분명 본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지식들과 저자의 소개를 접하며 갖게 된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다른 만남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나서 토해져야 할 것만 같은 심경도 안겨주는 저작이다.


철학이나 종교가 전공이었거나 관련분야에 대한 지식이 깊은 분들이 선택할 책은 아니고 대중적 교양으로서 철학, 종교와 만나게 해주는 책이다. 사상이 깊어질 책이다라고 말한다면 과한 평이고 사상이 깊어질 계기로서의 역할.. 더 나아가고 싶어지는 출발선으로서의 역할은 해주는 저작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나면 반드시 철학에 대한 다른 책을 또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앞서있는 모든 리뷰들이 사진을 첨부하였기에 이미지파일을 올리지 않습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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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달리니 딴뜨라
스와미 싸띠아난다 사라스와띠 외 지음 / 한국요가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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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차끄라 각성 행법 부터 통합 차크라 각성 행법을 거쳐 20가지 끄리야 행법까지 마치는데 장장 2019년 3월 5일 시작해 2021년 6월 22일까지 27개월이 넘게 걸렸다. 정석대로라면 13개월 정도면 마칠 수 있는 것을 중간에 독감과 폐렴이 겹쳐 3개월 가량 지체되었고 원래 운기하는 수행 계열은 비오는 날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두번의 장마철 동안과 비오는 날 정체되었고 한 여름 너무 무더운 시절에는 수행을 할 수 자체가 없어, 결국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는 비오는 날과 무더운 철에는 아나빠나사띠로 본 수행을 대체하고 있다.)


[쿤달리니 탄트라]라는 책으로 2006년 수행을 앞서 한 때가 있었다. 당시 각 차끄라 각성행법과 통합 차끄라 각성 행법, 20가지 끄리야 행법을 사라스와띠 구르의 저작 내에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텀을 두고 연달아  매일 다 수련을 한 덕분에 편차(부작용)을 얻게 되어 오래도록 고생했다.


수행의 성취를 빨리 이루려는 조급함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생을 한 것이다. 혹여 나와 같이 독학으로 수행의 성취를 빨리 이루려고 조급히 수행하는 분들이 있다면 먼저 오류를 범하고 먼저 부작용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극구 만류하는 바입니다."


수행의 과정을 원래 기준 보다 14개월이나 넘어서 마친 지금의 경우도 수행 이전에 사전 준비기간이 충분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2017년 4월 25일 부터 2018년 3월 3일까지 자율훈련법(아우토겐 트레이닝이나 자율훈련법으로 검색할 수 있음)과 자기최면(윌리엄 페즐러 씨의 [이미지 창조 creative imagery]를 바탕으로), 이미지 명상법([명상 HOW TO]와 [에너지 황홀경]이란 저작을 바탕으로)을 병행했고 그 중반 부터 아나빠나사티 수행 중 수식을 더해서 하다가 호흡 수행은 [탄트라 비전]의 호흡 수행을 했었다.


그러다 2018년 6월 19일 부터 자비손 명상을 수행했고 2019년 3월 5일 부터 [꾼달리니 딴뜨라] 수행을 시작했으나 2019년 5월 9일까지는 자비손 명상도 병행했다. [차끄라 각성 행법]의 가짓수가 늘어나 시간을 많이 차지하기 전까지는 수행 직후 호흡 수행을 더했다.


과거 부작용을 겪을 때는 조심성 없고 조급하게 수행하면서 그것을 용맹정진이라 합리화했었는데 이번 수행 기간 동안에는 느슨한 감이 있으면서도 조심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 차례 부작용을 겪어봤으니 더는 만용을 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공 수련과 무술 수련을 거의 비등히 분배해 수련했던 옛날과 다르게 수행했다. 이번 수련에서는 무술수련을 하지 않았고 [요가 디피카]로 요가 아사나 수행을 할 때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중국의료기공]의 동공과 [도인양생공] 중 도인보건공 이 두 가지로 몸 수행은 대체했다.


과거의 수련시기, 무술 수련에 비중이 높을 때는 싸울 상황을 피하지 않기도 했었는데 [보살의 37 수행법]과 자이나교도들의 비폭력 주의를 보며 느낀 바가 깊어서 이젠 싸움을 대상으로 하는 수련은 접기로 했다. 무술 수련을 다시 한다해도 형의권과 팔괘장, 태극권 같은 기를 운용하기에 적합한 수련만을 할 작정이다.


이제 [꾼달리니 딴뜨라]를 위험 없이 안전하게 끄리야 딴뜨라 20까지 마쳤으니 앞으로는 끄리야 20의 수행에 전념하면서 수행에 진전이 느껴질 때 [땃뜨와 슛디] 수행도 해 보려고 한다. 과거에는 운기(주천 수행이나 꾼달리니 샥티) 수행을 무술 기법 신장을 위해 한다거나 특이공능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으나 이젠 수행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여기까지 수행해본 결과 느낀 바는 그냥 꾼달리니 샥티를 이루는 수행, 소주천을 목표로만 하는 수행과 다르게 끄리야 딴뜨라 수행은 의식의 변화를 주요히 가져오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부주의한 수행으로 부작용을 가져와 정신적 과잉 활동(PESM)나 정신병적 장애가 어떠한지 겪을만큼 겪어봤는데 본 수행은 단계를 잘 따르며 안전하게 수행하면 이러한 장애들을 완만히 떨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장애를 겪게된 시초가 바로 본 수행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신에 작용하는 약이 있다고 하자. 용법, 용량 등 복약법을 잘 지키며 복용했을 때와 부주의하게 과용량으로 수시로 또는 세 차례 복용할 양을 한번에 복용했을 때 같은 약효를 보일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하지 않게 차분하게 본 수행을 절차에 맞게 점진적으로 따라가게 된다면 PESM이나 소소한 정신적 장애들에 효과적이라고 권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개인차가 있을 것이고 탁월한 접근법은 독학이 아니라 스승을 통해 주의 깊게 접근하는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일이다.



+ 본서와 같은 텍스트를 먼저 번역 출간한 [쿤달리니 탄트라]의 경우, 본서를 수행하고나서야 알았는데 끄리야 딴뜨라 20가지 수행법 중 10번째 나우무키 무드라의 수행법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역이라면 어느 쪽이 틀린 건지 헷갈렸을테지만 그 책에서는 해당 수행법의 핵심 기법이 빠져 있어서 말하는 것이다. (만약 개정판이 나왔는데 내가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소장하는 책의 내용 그대로라면 피해야 할 것 같다.)

헌 책으로 과거에 번역된 [쿤달리니 탄트라]를 찾느니 [꾼달리니 딴뜨라]라는 본서로 수행하시는 것이 맞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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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 -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
조지프 르두 지음, 박선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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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확히 말해 오늘 새벽 올린 리뷰가 본서에 대한 소개 보다 너무 한 측으로 치우친 내용만 언급한듯해서 본서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번 남기려 한다. 

본서는 이미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듯 또 책의 목차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진화와 생물학적 전개와 신경과학과 심리학적 영역으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에 대한 영역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은 둘이었는데... 진화에 대한 대목을 서술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원핵생물이 다른 생물을 삼킨 과정 중 특별한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그 원핵생물의 본능적 행위가 다세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미토콘드리아를 내포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와 한 몸이 된 다세포는 에너지 대사가 몇 차원 업그레이드되었고 그로 인해 산소를 이용하고 이산화탄를소 배출하는 순환이 더욱 증대되었다. 다른 식물로 진화한 생명체들은 이산화탄소를 대사로 이용하며 산소를 배출하게 되었는데 이 둘의 상호의존적 생명활동이 진화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는 대목에서 이기적인 선택과 이타적인 선택이 상호 호환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명체의 진화상의 분기를 설명하는 대목들에서는 생명체의 진화란 어떠한 정점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가지가 각기 자라나듯 서로 연계한 분기를 드러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설명한 대목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에 대한 저자의 설명들에 배움도 있었으나 약간의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배움이 컸던 부분이라면, 대뇌 각 부위가 아래 사진과 같은 해당 역할들을 지니는데 이 모두가 연계하여 인간의 의식을 창조해내는 과정을 저자는 몰입도 높게 서술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계와 작용에 대한 설명은 불교의 아비달마와 유식학을 떠오르게도 하였는데 현재까지의 신경과학적 발견으로 인간의 의식을 밝혀나가는 것이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고 인간의 의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던 선조들의 앞선 노력들을 돌아보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전두엽의 전두극과 시각피질 이하 각 영역들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 후천경과 상단전과 인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선도 수행체계의 가르침을 떠올리게도 했는데 한 편으로는 전두극과 전대상은 요가 수행체계에서 중시하는 아갸 차크라와 소마 차크라를 아우르는 것 같았다. 이들의 역할, 기능에 대한 요가 체계의 가르침이 현대의 신경과학의 가르침과 과연 다르기만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의 관심은 불교 수행 중 선이나 위빠사나에 치우쳐 있지만 언제가 꾼달리니 요가나 선도의 소주천에 대한 연구를 신경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이 함께 시행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저자의 설명들에 반감이 들더라는 부분은 그가 진화를 생명체의 분기가 나뉘는 것이지 어떠한 정점을 향해가거나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한편 다른 측에서는 인간 대뇌의 기능과 작용을 설명하며 타 동물군의 감정까지도 부정하면서 인간이 우월하다는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감정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니 다른 동물들은 감정이 없다는 억측까지 하고 있다.(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가능하지 않으므로 없다는 것이 무슨 논리인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근거들은 지난 리뷰에서 몇몇 언급했다. 이미 인간의 대뇌보다 더 큰 대뇌는 같은 포유동물인 돌고래나 고래도 가지고 있는 바이며 그들의 대뇌피질의 짜임새는 인간과 견주어도 될 정도이다. 돌고래의 경우 1960년대 외계인 접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돌고래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고 하는데 돌고래가 영어 어휘들의 뜻을 충분히 숙지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상당한 수준의 영어 단어들을 구사하고 기초적인 회화 발음을 소수 따라 했다는 기록이 근래의 다큐멘터리에도 남아있다. 돌고래가 자신들의 물질적 정신적 영역에서 정의한 개념들과 인간의 개념들이 동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의 소리로 개념화된 어휘들을 가르친다고 그들과 완벽한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교류를 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개념을 몇몇 가지 정도는 돌고래에게도 가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치자 대화가 가능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고 해당 돌고래에 대한 에피소드를 좀더 이야기하자면 자신에게 실험을 진행하던 동물학자인 여성에게 과도한 친밀감을 표하던 이 돌고래는 해당 실험이 중단되고 실험 중단과 함께 그녀와 헤어져 다른 열악한 수조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돌고래는 의식적으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호흡을 해야 하는 돌고래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수조 바닥에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지상의 동물들 중에서는 월등한 도구 사용과 도구 개발의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내 모든 동물군들과 다양한 측면... 지성과 감성, 공감능력, 사회성, 자연친화성, 행동화하는 추진력, 투지, 인식, 변별능력, 문제 해결 능력, 추상적 사고 등등을 비교하자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편파적인 채점 기준을 약간만 양보하더라도 인간은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나로서는 각 동물들의 장점과 비교하자면 도구 개발의 치밀함과 도구 사용의 정교함, 인간만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추상적 사고 능력 등 몇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내세울 것이 그다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나는 한때 생물학을 잘 모르고 현대의 진화론이 말하는 진화의 분기를 모를 때는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며 과학의 발전이 완성화되어 갈 때쯤에 인간은 전지하고 전능하다는 신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과학을 배경 삼아 진화하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에는 인간 역사의 정점은 현재이며 진화를 다른 차원으로 급진전시킬 주인공은 양자컴퓨터화된 인공지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화에도 정점이 있다면 보다 획기적으로 진보한 인공지능이 그 정점일 것이다. 전지와 전능은 인간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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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 -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
조지프 르두 지음, 박선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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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라는 제목은 참으로 깊이 있는 의문을 이끌어내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이 제목만으로도 그리고 책 소개글에 제기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감정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법한 의문만으로도 이 책은 제법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신경과학자가 저술한 책이기에 제목에 걸맞는 그리고 문제 제기에 걸맞은 해답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오기도 한다. 


저자의 전공이 신경과학이라다 보니 뇌라는 대목에서 인상 깊은 해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간의 느끼는 뇌, 놀이하는 뇌, 소비하는 뇌, 성취하는 뇌 등 뇌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뇌를 어떠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서술해 나갈지 기대하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과학의 발전상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무엇일지도 궁금한 바였고 말이다. 저자가 그리고 지금까지 생물학과 신경과학이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성과 본능과 감정... 의식을 지니게 되기까지의 진화의 역사를 신경과학은 어떻게 풀어내어줄까 하는 기대가 자못 컸다. 이 책의 부제가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인데 인간에 대해 규명하자면 당연히 다른 생물들과 비교, 분별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40억 년은 응당 돌아보아야 인간을 정의할 실마리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본서는 part1부터 part7까지 진화의 선상을 담고 있고 part8~15까지 신경과학을 통해 기억과 의식, 감정을 다루고 있다. 전체 66장으로 짧게 서술하며 비전공자들이 느낄 지루함에 대한 배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초반에 인간에 대해 저자는 진화 선상의 다른 분기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인간을 생명체 중의 한 무리로서 대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를 일독하고 돌아보니 프롤로그부터 저자는 감정까지도 "겨우 몇백만 년 전 인간의 뇌에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 우리 종에게 언어와 문화와 자기 인식이 생겨났을 때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식에 대해 논하는 장이 시작하며 기억과 인식, 의식에 대한 현재까지의 신경과학과 심리학적 발견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감정에 대한 장들은 저자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는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바"라고 단언하는 데까지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다른 동물들은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단정짓는데서는 저자의 직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감정을 느낀다고 하는 대다수의 동물학자들이 동물들의 행동과 반응만을 보고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고 단정 짓는다며 그것은 직관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는 '동물에게는 감정이 없다'는 주장이 직관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모순이지 않은가? 


단지 인간의 그것과 같은지 알 수 없으므로 없다라는 것이 논리에 맞는 서술인 것인가? 게다가 감정을 (여기까지는 수긍했다)주관적 경험이라고 하며, 고차 인식과 지적 기능을 더하는 데 이건 1차적 감정과 2차적 언어를 대입한 해석에 따른 재차의 감정까지 아우르는 것이기에 저자의 주장은 부분적 오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동물들로 과학적 실험을 하며 동물들은 희생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데서 오는 방어기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에게 동물이란 감정이 없었으면 좋겠는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내가 본 어느 다큐에 의하면 일군의 동물학자들은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쳤고 수화를 배운 고릴라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어미를 사람들이 사냥해 죽인 이야기를 수화로 하며 이렇게 손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엄마를 죽였다... 무서웠다... 슬펐다."라고... (게다가 이 고릴라는 수화로 "꽃은 아름답다... 나는 꽃이다"라는 수화도 했다고 한다. 고릴라가 3단 논법을 한 것이다. "꽃은 아름답다... 나는 꽃이다... 여기에 고릴라는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릴라의 미적 감각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완벽한 3단 논법이 아닌가?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는 근거들이 때론 너무도 근거 없는 근거들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아마도 이 일화를 저자에게 말한다면 저자는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영장류가 아니더라도 오수의 개처럼 주인이 모두 죽고 나서 주인의 눈먼 자식을 아침마다 자신의 꼬리를 붙잡게 하고는 함께 이웃을 돌며 동냥하게 한 개도 있다. 반복된 행위는 학습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맨 처음 주인의 아이가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꼬리를 잡게 하고 동네를 구걸 다닌 것은 굶주림에 대한 공감과 그 문제에 대한 (동네를 돌며 음식을 구걸한) 2차적 해결안을 도출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개도 구사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이야기다. 오수의 개 이야기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지만 주인이 다치면 안타까운 순간에만 개들이 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주인의 상처 부위를 핥는 행동은 개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것일 것이다. 공감하고 그 공감에 대해 2차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개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감은 가장 고차원적인 감정이기도 하겠지만 개가 반가움, 기쁨, 슬픔, 놀람, 분노 등까지 표현하는 것을 견주들은 흔히 목격한다. TV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자신의 친구가 죽자 그 자리를 계속 배회하며 떠나지도 못하고 슬퍼하는 개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죽은 대상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감정과 행동을 우리는 애도라고 한다. 애도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고차원적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애도는 까마귀들도 하는 감정이자 행동이다. 동료 까마귀가 죽으면 까마귀 떼들이 모여 어떻게 죽었는지를 확인하며 대응한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동료에게 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대상에 대해서는 까마귀들은 집단 린치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그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경우, 볼 때마다 계속해 공격하기도 하며 까치 역시 몇 해에 걸쳐 해당 가해자(사람)만을 공격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감정을 인식과 회상, 스키마(도식이나 미완의 상징성)를 패턴 완성 기능으로 구조화하는 능력 등과 언어를 통한 재해석 등까지를 아우르고 정의하는데 언어에 대한 부분과 언어로 정립하고 나서 2차적인 감정의 양상이 드러나는 단 두 경우를 제외 한다면 과연 동물들은 감정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인지 작용, 자기 주지적 성향 등을 감정에까지 일반화할 수 있을까? 감정을 느끼는 것을 그렇게나 우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저자는 진화의 선상에서 인간은 한 분기를 차지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프롤로그부터도 감정까지도 인간 진화의 대목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마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 이론에 입각한 진화의 정점에선 존재가 인간이라는 우월적 해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의식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것은 부분일 뿐이고 의식 전체에서 타 동물군이 인간과 동등한 수준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의식을 각 영역별로 분할해서 본다면 기억이나 순간 인식, 순간적 변별력이나 감정 등등이라는 각 영역별 모두에서 인간만 월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동물 실험에서 숙련된 침팬치의 순간 식별력은 인간의 그것을 월등히 초월하고 있다. 동일한 수준의 시간을 인간이 전념해 실험에 참가했다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참여한다 해도 침팬치를 능가하기보다는 침팬치와 동등한 수준이 되기에도 버거울 수준이라고 한다. grit이라고 하는 투지, 깡으로 해석되는 이런 분야에서도 과연 인간이 타동물들 모두 보다 우위에 있기만 한 것일까? 나로선 확신이 없는 부분이다. 


본서는 인간을 진화의 정점이 아니라 진화 선상에서 다른 분기로 보는 근래의 진화생물학적 시각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대뇌피질과 그 연합 활동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식의 기존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은 지능이라던가 도구의 개발과 도구 사용의 정교함 면에서는 타 동물들 보다 월등할지는 모르겠으나 공감(대다수의 포유동물군), 사회성(늑대나 마못 같은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군이나 개미와 벌 등), 자연친화성(거의 모든 동물) 등 타 동물이 인간을 월등히 추월하는 부분들도 있음을 볼 때 본서는 비교 분별이라는 면에서는 너무 인간에 편파적인 서술로 일관한 저작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탄생해 메타러닝으로 진화의 도상에서 인간을 초월할 첫걸음을 떼고 있는 지금, 현대의 분기로 해석하는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의 정점을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진화론적 입장에서 라면, 인간은 진화의 도상에서 이제야 입문하는 창세기적 역사 속에서 그저 과도기적인 존재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는 LUCA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를 진화와 생물학, 신경과학과 심리학 영역에서 서술하고 있고 인간이 현재까지 밝혀낸 인간의 존재적 특징의 단상 정도를 보여주는 저작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진화는 어떠한 변수로 어떻게 역사가 이어질지 까지는 그리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니까 말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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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만나러 지구로 갈게 꿈꾸는돌 26
김성일 지음 / 돌베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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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앨리스가 온다, 나를 만나러. 항구에서 헤어진 그 앨리스도 아니다. 수년간의 고독이 만들어낸 환상도 아니다. 휴대폰 사진 속의 누군지 모를 사람도 아니다. 저 우주 멀리 정말로 존재하는 앨리스가, 나를 위해 그 먼 길을 온다. 

 여우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여우는 가슴속인지 머릿속인지, 어딘가에 있던 무언가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던 기관 같다는 느낌이다. 마음의 온도가, 색깔이 바뀌어 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웃음이 마음 속에 피어났다.


 본서의 책 띠지에 보면 『어린 왕자』의 서정과 감동이 우주를 만나다!라는 카피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다. -"관계 맺음의 갈망과 그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고독한 영혼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함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넓은 우주에서 혼자인 것만 같은 이들이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 세 명에게 모두 공감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미래의 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우주시대에 화성 생명체의 DNA를 조작해 애완동물들을 생산하여 판매한 이후, 얼마지 않아 해당회사가 티타니아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에 인수되며 유전자 개량 애완동물들을 폐기하려 한다. 이 때 앨리스라는 주인이 애완동물이었던 여우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도망시켰고 여우는 이때부터 룹알할리 재활용센터라는 쓰레기장에서 혼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판매하며 살아간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동물이라 인간에게 수학을 가르칠 정도의 지능이고 소설이 전개되면서 등장하는 전기를 제어하는 초능력도 있다. 


지구에 여우가 있다면 먼 우주의 어느 소행성에 티타니아 그룹이 만든 우주기지 로즈워터라는 곳에는 AI가 양육하는 알렉스라는 소년이 홀로 살고 있다. 아이 역시 화성 생명체의 DNA를 개량한 유전자 조작 인간으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소행성에서 지구의 여우에게까지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알렉스와 여우는 오래 전 부터 대화를 하고 있지만 여우는 다분히 이성적인 지성체라 알렉스를 앨리스라고 부르며 대화는 하면서도 알렉스는 외로운 자신이 만들어내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다. 


티타니아 그룹과는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 란차오 상방에서는 티타니아 그룹이 화성 생명체의 유전자를 조작해 만들어낸 유전자 조작 아이가 특정 소행성에서 비밀리에 육성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그 아이를 탈취하려고 기업의 병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티타니아 그룹의 자동 방어시스템에 의해 란차오 상방이 보낸 산업스파이 병사들은 거의다가 죽고 슈잉이라는 병사 한 명만이 살아남아 파손된 비행선에서 정처없이 우주를 헤메고 있다. 거의 삶을 포기한 슈잉에게 어느 순간 죽음을 앞둔 자신의 환상인지, 여우와 대화 중이니 끼어들지 말아달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렉스는 태어나서부터 AI 외에는 접촉해본적도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왔고 여우는 버림받고 홀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슈잉 역시 쓸쓸한 과거를 지닌 채 현재는 홀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고독한 처지다. 이런 이들이 만나는 계기는 알렉스의 텔레파시로 인한 접속이다.


이 소설은 정말 깊은 애정이 깃들게 만드는 것만 같은 작품이었다. 소설속의 알렉스도 여우도 마치 나 자신인양 여겨지며 그들의 만남과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앨리스, 나는 있는 게 잘못이야. 잘못 만들어졌어. 잘못 태어났어."


자신을 찾아내 폐기하려 혈안이 된 사람들 속에서 이런 자기비하를 하는 여우의 외침도 어느 날엔가 절규하던 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어떻게 있는 게 잘못일 수 있냐고 외쳐주는 나만의 앨리스는... 알렉스는 찾기 힘들던 시절이다. 물론 여우는 이때 자신을 위로하던 알렉스의 말을 빌려 이후에 알렉스에게 이런 충고도 하고 있다.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하는 것에는 잘잘못이 있어. 남을 해치면 안 돼, 앨리스. 그러면 로즈워터가 널 가둬 둔 게 옳은 일이 되고 말아."


이 책의 말미에 가면 티타니아 그룹의 로즈워터 AI도 알렉스의 빛을 초월하는 텔레파시 능력을 양자컴퓨터로 구현해내 백스물세번째의 시도만에 알렉스에게 말을 건넨다. 왠지 모르게 로즈워터 AI도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먼 별에서 알렉스 혼자만을 돌보며 지내던 그런 외로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소설은 정말 흡인력있기도 하다. 독자를 페이지터너로 만드는 작품이라고 작가가 전혀 겸손해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저작이다. 청소년을 독자로 품는 소설이기에 피가 튀는 잔인함도 피가 끓는 성애도 피가 마르는 절절함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깊은 곳까지 건드리는 섬세함과 건전하게 몰입시키는 흡인력이 있다. 


소설은 여우를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여우와 만나는 과정이 전체일테지만 그걸 소개하지 않는 건 스포일러로 독자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소설이 어린 왕자를 모티프로 했고 소설 속에도 어린 왕자란 책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감동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왕자의 고독은 독자가 공감 가능한 그만의 고독이고 알렉스와 여우, 슈잉의 고독은 또한 이 소설의 독자가 공감 가능한 그들의 고독이다. 그리고 그 고독이 서로에 대한 갈망을 낳고 이들을 서로를 어우러지게 했듯, 독자들에게도 그 고독과 함께 어우러짐을 위한 갈망을 안겨줄 것이다. 


내가 만나러 갈 누군가, 나를 만나러 올 누군가를 꿈꾸게 할 소설이다. 좋아하는 시는 아니지만 박노해 시인님의 《별은 너에게로》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고독해본 적 있는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여러분에게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웃음이 마음 속에 피어나기를...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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