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심리학 -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정신병리를 배운다 영화 속 심리학 1
박소진 지음 / 소울메이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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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독서치료라는 개념을 알게 된 후 독서로 내적치유가 가능하다면 영화 관람(시청) 역시 심리치료에 한 역할을 하겠구나 싶었다. 당시엔 영화치료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몰랐지만 독서치료처럼 내게 맞을만한 영화들을 시청해 보기도 했었다. 매치스틱맨, 콘트롤, 갱스터 초치, 더 독, 식스틴 블럭, 플레젠트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등등 영화 관람(시청)의 목적을 내면치유에 두고 영화를 골라 시청하고는 했다. 문학이 치유의 힘이 있다면 영화도 이야기로나 영상미로 음악으로 충분히 내면 치유가 가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이 책은 영화치료에 목적을 두고 쓰여진 저작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예로 든 영화들은 치유를 목적으로 감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영화들이다.


저자는 이 책이 '심리학에 관심이 있거나 현재 공부 중인 학생들이 정신병리에 대해 알아가는데 조금이라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건강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부분적으로만 공감하는터라 혹시라도 대인관계나 사교성, 친화력에 도움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읽겠다는 분들이 있다면 다른 선택이 더 나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보다는 자신에 대해 의문이 이는 이들에게 적합할 것 같다. 저자 박소진님도 나를 알고 싶어 심리학에 입문했다고 지은이 프로필에 있지 않은가? 타인에게서 정신병리와 합치되는 문제점 부터 찾으려는 시도 보다는 다양한 이상심리와 자신의 내면과 외향에 대한 의문으로 독서해 나가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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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이토록 부정적이기 보다 긍정성이 더 큰 말씀이셨다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남자에게 하신 말씀은 어떨까요?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이미 창세기 2:17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고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 인간에게 거듭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사망할 것이라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창세기 6:03]


인간의 수명을 한정하시고 사망할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이를 저주로 보아야 할까요? 

'저주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발음은 '아라르'라고 한다는군요. 이는 주로 '결박과 제한, 한계'를 뜻하는 어휘들과 자주 같이 쓰인다고 하여 창세기 1:28 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에서와 같이 복을 주시는 '축복하다'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발음은 '바라크'로서 '아라르'가 '결박과 제한, 한계'를 뜻하는 어휘들과 자주 같이 쓰인다는 근거로 '바라크'는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자유'와 '해방'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실락의 시기 사람을 저주하신거라 본다는 것은 인간을 사망이란 것으로 결박하고 제한하며 한계를 주신거라 본다해야겠지요. 이러한 결박은 끊어내고 풀어버려야 하며 이러한 제한과 한계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사망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건 그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내용이 그저 숙명이라고 수긍만 하라며 하신 말씀이 아닐 것이란 말입니다. 되려 사람에게 주어진 그 죽음이라는 숙명을 어찌 극복할 것인지 헤아려 보라는 뜻으로, 사람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것을 극복하길 기대하며 하신 말씀이시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사망할 것을 알려주신 것은 사람이 사망을 극복하기를 바라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망을 극복하는 것은 사람의 숙명이자 과제일테지요. 죽음이란 것으로 부터 다시 자유와 해방을 얻으라는 숙명이자 과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한번 짚자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즉 낳고 양육하며 교육하여 서로 살아가며 갈등이 양산되면 중재하고 삶을 즐기고 배우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문명을 이루고 발전해 나가는 것 그렇게 점차 땅 즉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로 인류 문명을 확장해 나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의 과제라 했었습니다. 이러한 문명의 확장은 다스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더욱 명확히 해야 할 것 같군요. 다스리는 것은 사랑과 관심을 열정 속에서 지속하며 대상에 대해 알아가고 대상의 속성에 알맞은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들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하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환경을 조성해 주고 성장해나가기 적합한 내적 외적 환경을 제공하는 것 말입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적 외적 갈등을 중재하는 것과 함께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추구는 성장(성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에 대한 다스림만으로 보자해도 교육과 치료와 제도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체계화되고 지원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스림의 실현은 사람이 사망을 극복하는 과정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스림과 사망의 극복이 어째서 하나의 과정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라 했는지 이제 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0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03]


예수님께서 오시고 다스림을 펼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말씀하셨군요. 그리고 사망을 극복하는 것 즉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참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진짜이심을 강조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신데 '참'이라 하나님임을 강조하며 수식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다른 언어로 God 또는 이슈와라(힌두어권에서는 힌두문화에서 '신'을 뜻하는 이 어휘로 하나님을 이른다고 하더군요) 등등 각국에서 모두 신을 뜻하는 어휘로 쓴다는 걸 떠올리고나니 그제서야 납득이 되었습니다. 


우리말에서의 '한'에 대한 일반적 상식과 어원사전[우리말 어원사전. 백문식님 저]에서 찾아본 '한'이 결합된 어휘의 어의를 보면 '하늘, 하나, 크다, 넓다, 전체, 모든, 완전함, 온전함, 순일하다, 가득하다(충만하다)' 등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외의 의미가 더 있을테고 어원과 어의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이 있겠으나 그에 대해 불학하여 아는 바 없는 관계로 스킵합니다) 한+아버지의 변형인 할아버지는 영어에서의 Grand+Father와 같은 형식이자 의미의 결합으로 보면 될 것 같군요. 제 기억으로는 중학시절 한단고기에서 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해당 어휘의 우리말 뜻에 대해 풀어준 다른 저작에서 보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아련한 기억으로는 한단고기가 맞는듯 합니다) 한단고기를 번역 해설한 분께서 거란의 야율 아보기의 이름 아보기와 북아메리카 원거주 부족 중 하나인 아파치를 예로 들며 위대한 지도자를 뜻한다며 우리말 아버지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뜻하는 말에 위에서 열거했듯 거룩하다의 뜻을 풀어놓은듯한 의미들을 담고 있는 '한'이 더해져 높이고 있으니 영어의 Grand의 의미로 존경을 더한 Grandfather의 형식과 의미를 우리말 할아버지와 유사하다고 본다해도 빗나가는 것은 아닐듯 합니다. 한세상, 한평생, 한세월 등은 모든 살아온 날들 (모든 사는 동안)을 의미하며 한껏은 가득히나 충만히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요. 한가득은 완전히 가득 담은 것을 뜻합니다. 한길은 큰길을 뜻한다는 군요. 한갓의 어의가 '다른 것 없이 오로지. 다만, 단지'라고 하니 '온전하다' '순일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차가운 곳'을 뜻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한데'라는 말은 사방과 하늘을 가리지 않는 곳(노천露天)이라는 뜻이 있다는군요. 집체의 바깥이라는 뜻도 있던데 여기서 말하는 집체가 집과 한자 體가 결합되어 집이라는 건물 밖이라는 뜻으로 집체의 바깥이란 말이 쓰인 것인지 집체集體(1.물체가 한 곳에 모여 이루어진 것, 2.힘,동작,지혜,개념 따위가 하나로 뭉친 것. 저는 총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군요)에 포함될 수 없는 따로 떨어진 무엇(사람이라 한다면 외톨이? 그보다는 이방인이 더 적절할듯도 하군요)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한데'에서의 '한'은 광활한 곳에서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 만들어진 어휘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차가운 곳이란 뜻도 담게 된듯 합니다. 원시부족사회에서 동굴이던 움집이던 원시가옥 밖 툭터진 곳으로 가는 수렵채집 활동은 거대 집단 보다는 소수정예일테죠. 그때 부족사회 내에서 느끼던 안전과 안정감, 제재나 소소한 충돌 등이 다소 적어지니 소속감이나 집단의식에 향수를 느낀 이들이 범위의 외곽이라는 감상을 느끼며 '소속에서 따로 떨어진'이란 의미로도 '한데'란 어휘를 사용한게 아닌가 싶군요. 그러다 문자의 창제 이후 해당어휘를 사전화하여 담으며 '집체의 바깥'으로 어의를 기록한듯 하네요. 결국 한데란 어휘는 광활한 곳, 제재 없는 무제한의 상황 등에서 인간이 느낀 감상이 담겨있으니 하늘과 크다, 넓다는 의미에서 확장되어 변화된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결국 '한'과 한의 변화형 '하나'가 접두사로 쓰일 때 의미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대자연과 하늘과 우주 그리고 그를 보며 충만해지던 사람의 감상이 담겨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담은 '한'이란 어휘의 변화형인 '하나'를 인격화한 어휘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란 우리말을 사용하는 문화에서 한글로 쓰여져있는 '하나님' 또 우리말 발음과 뜻으로 '하나님'에 익숙해진 터라 '참'이라며 다시한번 강조하는 성경의 표현이 어색하게 다가왔습니다. 왜 굳이 '하나님'이라 이르는 온전한 말씀에 '참'이라는 꾸미는 말이 더해져야 했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외국어가 번역된 말임이 문득 떠오르자 그제야 납득했습니다. 다양한 신들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진짜 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참 신'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로 쓰여진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참 하나님' 이라는 굳이 더할 필요 없었던 이중 강조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면모를 성경 속에서 보이고 계시기에 때론 질투하시고 분노하시고 징벌하시고 시험하시고 환난을 주시고 포용하시고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고 보시며 흡족해 하시고 사랑하시면서 함께하는 여러 면모를 보이십니다. 이 모든 면모를 보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걸까요?


[내가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附從)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長壽)시니... 신명기30:2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0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03]


하나님께선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가 있으니 생명을 택하라는 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순간 즉 '마음이 패려한 자'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경우 삶을 살며 자기 노력이 성취를 이루는듯 하다해도 결국 사망과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잠언에서 알 수 있는 바이죠. 생명을 택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 부터 마음을 돌이켜버리는 것 그 자체가 스스로를 결박하고 제한하고 한계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니 이 자체가 저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말씀이겠지요.


-'부종하라'는 히브리어 발음 '다바크'로서 '굳게 매달린다'는 뜻이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하네요.(신명기 30:20 어휘설명, QT라이프 성경 p311)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잠언 14:14] '패려한자'는 히브리어 발음으로 '수그' 라 하며 '나뉘는 자', '떼어놓는 자' 라는 뜻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마음을 돌이킨 자'를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잠언 14:14 어휘설명, QT라이프 성경 p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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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사회 -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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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주저앉아버리면 변화의 기회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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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사회 -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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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라는 소제목이 의역된 도서명 '근시사회'의 아래에 있다.

개인 소비문화가 어떻게 공동체의 공존 의식을 짓밟은 채 개인의 자아충족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짚으며 저자의 논리가 전개된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기업과 금융경제, 의료, 정치 전반에 흐르는 근시안성에 대해 충동사회라며 지적하고 있다.


문명화의 역사를 '지속적인 문명화를 위해 개인의 충동성과 근시안성을 억누르도록 사회가 능숙하게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과정 혹은 개인이 그렇게 하도록 점점 능숙하게 유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저자의 관점이 저자가 충동사회라 부르며 지적하는 이 세계에 대한 해석을 불러온 것일 거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주장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시장과 자아의 통합, 편협한 이기적 만족, 자아 만족감, 자아표출, 자기애적 성향, 자기추적 기술(칼로리 계산부터 일상 전체를 대중에게 중계하다시피하며 자아를 표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빠르게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 쾌락원칙, 도마뱀뇌의 작용(대뇌변연계의 작용으로 장기적 이익과 지금 이 순간의 단기적 이익 사이에서 단기적 이익이 우선하게 되고 강렬하게 이 순간의 이익 취득에만 주력하게 되는 것) 등 다양한 표현으로 이 세계가 근시안적이며 충동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의 주장과 논리 전개가 너무도 설득력 있어 무척이나 가독성이 높은 저작이다. 번역자의 노고가 감사한 저작이기도 하다.


사실 이 도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목차도 보지 않고 읽다 보면 그러한 근시안성이 소비활동과 금융경제, 기업 운영(기업이 인수합병과 자사주 매입 등 주가수익률 우선으로 자본효율성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논지가 의료와 정치로까지 이어지는 것에 놀라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편향과 이것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될수록, 이러한 자기중심적 경제를 더 지속 가능하게 하거나 단지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임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자기애적 성향은 충동사회에 대한 그리고 이제 장기적 헌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논리적 반응이다.'


'유권자들은 정치를 자아표출과 정체성 형성, 정서적 만족을 위한 또 다른 영역처럼 취급하도록 권유받는다.'


의료와 정치부문은 사실 한국의 입장과 크게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공감 가는 소소한 부분들이 저자가 든 미국의 사례와 앞으로 크게 닮아갈 여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의료민영화 등) 우려되기도 한다.


후반부의 '나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라는 저자의 말이 공감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의례 많은 이들이 현시대에 대한 해결책이라며 내놓는 미심쩍은 대응안 보다 나은 무언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를 지적해주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문제가 무엇인가 의구심을 갖다가 명백히 문제를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일이 아닌가 싶다.


저자와 같이 현시대에 대한 의구심이 또 질려버릴 자아표출 욕구가 문제를 인식하도록 해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SNS 사용률과 가입률이 감소하고 있으며 SNS를 다시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시민들이 일어설 유럽과 미국도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촛불을 든 한국도 그렇고 시민들이 느리게라도 일어설 때는 일어서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주저앉아버리면 변화의 기회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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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교양 (반양장) -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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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단순한 구분. 이것이 시민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다.'

 

'나의 세계관과 타인의 세계관이 다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소통하지 못할 것임을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소통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소통의 시작은 내가 타인의 세계관을 논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시 말해서 타인이 나와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 시민은 세상의 주인이고, 역사의 끝이며, 그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시민은 언제나 역사의 끝에 서 있다. 미래를 선택함으로써 오늘을 역사로 바꾸는 권한과 의무는 시민에게 있다.'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일의 세계를 시장의 자유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정부의 개입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시민 각자가 현명하게 나의 이익에 따라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은 사회 전체를 살 만한 사회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민은 세상의 주인이고, 역사의 끝이며, 그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어들이 충분히 언급했으니 책에서 몇 줄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을 일독해 보란 권유를 대신하려 한다. 『지대넓얕』때도 그랬지만 책의 내용만큼이나 저자의 정신이 돋보이는 저작이다 싶다.

 

책의 요소요소에서 감흥어리게 하는 저자의 입담이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남다르게 느끼도록 한다.

 

"가자! 시민들이여 세상의 주인인, 역사의 끝인, 그 자체로 자유인 시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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