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교때 친한 후배가 있었다. 참 순수한 친구였다.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대하고 농담으로 항상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의 고민상담을 잘 들어주고 따스한 위로도 잊지 않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군에 입대를 한 후 거의 3년 동안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복학한 그를 만났을 때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었다. 그는 3년 전에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시니컬하게 반응을 하고, 상대방의 말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었다.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혼자 멍하니 딴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어떤 선배와 사소한 언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뛰쳐나갔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가끔 그 친구를 생각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 친구가 겪었을 끔찍한 일들이 상상이 된다. 군대의 어두운 곳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내부만의 구석에서 온갖 욕설과 핀잔을 듣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내가 떠올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끝내 그의 고백을 듣지 못해서 그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라 워터스의 [나이트 워치]라는 소설을 읽으며 그 후배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1947년의 배경으로 6명의 런던의 젊은이의 삶을 묘사한다. 거리에는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아직도 전쟁 흔적을 털어버리지 못한 제대한 군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겉으로는 모두들 안정을 되찾은 것 같지만 사람도 거리도 여전히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중 유독 여섯 명의 사람들만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나름 전쟁 후의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쑥 불쑥 그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와 현실에서 뛰쳐 나가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에 불안해 하고, 지금의 삶을 마치 꿈 속의 삶처럼 현실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소설의 초반에는 그들의 과거에 대한 언급이 너무 희미하기에 그들의 자학적인 생각들과 행동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겪었을 끔찍한 일들을 혼자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연 이들은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이 소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전쟁 후의 1947년을 배경으로, 그다음에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을 배경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전쟁이 막 시작하던 1941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섯 명의 인물들이 겪은 전쟁의 광기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를 역 추적한다. 소설의 시작은 '케이'라는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결국, 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인간이 됐단 말이지. 벽 시계도 손목시계도 죄다 멎어서, 주인집 현관으로 들어서는 불구자가 누군지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꼴이. (P 11)

 

케이는 짧은 머리에 잘생긴 청년 같은 외모를 주는 여자였다.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에서 그가 상류층 출신이며 군대와 관련된 일을 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녀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누군가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결국 전쟁의 시기에 같이 일했던 미키라는 여성을 찾아가 자신의 상태를 고백한다.

 

케이는 뒤로 푹 물러나 앉아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뿐 아니라 수천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죄다 똑같은 일을 겪었어.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런던 거리 아무 데서나 손을 뻗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다들 연인을 잃거나 아이를 잃거나 친구를 잃었다고. 근데 난...... 헤어날 수가 없어. 미키.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다고." 케이는 비참하게 웃었다. "헤어나다니. 이 표현 진짜 웃기다! 사람의 애통함이 무슨 무너진 집인가, 지천에 수북이 깔린 잔해를 헤치고 일어나 다른 멀쩡한 곳으로 나와야 한다니...... 키미, 나는 건물 잔해 속에서 길을 잃었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문제는 애초에 나갈 생각도 없다는 거지. 아직도 내 인생 전부가 그 잔해 밑에 깔려 있는데......" (P 148-9)

 

도대체 케이는 전쟁터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녀는 전쟁터에서 어떤 끔찍한 것을 겪은 것일까. 비록 겉모습일지 몰라도 모두들 다 회복해서 아무렇지 않게 사는데 왜 그녀만 이토록 괴로워하며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케이뿐만이 아니다. 헬렌이라는 여성은 줄리아라는 여성과 동거하며 끊임없이 그녀에게 집착한다. 비브는 다정한 레지라는 유부남과 만나다가 어느 순간 레지에게 폭발하며 소리를 지른다. 누구보다도 어둡게 사는 사람은 덩컨이라는 남성이다. 덩컨은 비브의 남동생인데 철저히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양초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과거에 알던 프레이저를 만나자 갑자기 공포에 빠진다. 과연 무엇이 이들의 영혼을 이처럼 처참하게 파괴했을까. 

 

1944년을 배경으로 하는 2부가 시작되어서야 그 비밀이 조금씩 드러난다. 1944년의 런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독일 폭격기들이 폭탄을 투하한다. 건물이 송두리째 날라가고 사람들은 그 폭탄에 몸이 찢겨 생명을 잃거나 불구가 된다. 케이는 미키와 함께 구급 대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폭발로 폐허가 된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폭파된 건물 속에서 시신과 부상자들을 접한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에서 흘린 피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폭탄에 몸이 갈가리 찢긴 시신들을 접한다. 그러면서도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청년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초반에는 전혀 연관이 없던 것 같던 이들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쟁 시기에 이리저리 관계를 맺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런던에 폭탄이 떨어지던 날, 그 폭탄과 함께 케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삶이 산산조각 나는 그 진실이 밝혀진다.

 

이 소설은 시간의 역구성을 통해 케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상처를 쫓아가기에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이들이 전쟁 때 어떤 상처를 당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했다면, 그래도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올라가며 그들이 경험한 끔찍한 전쟁의 시대와 그 시대의 광기로 인해 상처들을 발견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이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묻지 말아 달라!"

 

보통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를 한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느냐? 어쨌든 그곳에서 무사히 돌아왔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렇게 않게 적응하며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잃어버리고 와야 하는 것이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왜 그 잃어버린 것을 외면하려 할까. 그들이 통과했을 전쟁터의 폐허 같은 끔찍한 공포를 왜 외면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에 여러 가지 아픔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때로는 일제시대와 태평양 전쟁 때 위안부나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겨우 생명만 가지고 돌아온 사람들. 6.25전쟁 때 가족들이 처참히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사람들, 군사정권 때 고문하고 학살로 가족이나 자식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배가 침몰하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까지.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말한다. 살아남았으니 그냥 살아가라고. 그들이 과연 그냥 살아갔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케이를 비롯한 5명의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전쟁의 상처를 잊으며 서서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리고 앞에 언급했던 그 후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그는 다시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자신의 이전의 모습은 그 군대의 어둡고 힘들었던 시간에 놓고 변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세라 워터스는 우리에게는 [핑거 스미스]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스릴러로 유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역사를 배경으로 시대와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세라 워터스의 진짜 놀라운 점은 시대와 상황으로 인해 찢겨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너무도 끔찍하리만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트 워치]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시대의 광기, 그리고 그 전쟁의 공포와 광기 속에서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파괴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임슬립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다준 과거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 부분만 바꾸면, 오랜 기간 자신이 겪었던 불행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눈앞에서 바로 그 사건이 펼쳐진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되지만, 이상하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 사건이 그냥 일어나도록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운명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과거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철학적인 주제보다 내가 타임슬립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 인생을 바꾼 끔찍한 사건인데, 그 시점으로 가서 다시 그 사건을 바라보니 그냥 꿈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감독 특유의 솜씨로 몽환적이고 모호한 아름다움을 가진 장면으로 비치기도 한다.

 

[커먼웰스]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영화는 타입슬립과 관련된 소설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가족 소설이나 성장 소설, 자전적 소설 정도가 될 것이다. 경찰관인 픽스는 아름다운 아내인 베벨리와 살고 있다. 두 딸인 캐롤라인과 프래리 라는 두 딸을 키운다. 지방 검사보인 버트는 테레사라는 아내와 함께 캘, 앨비, 홀리, 저넷이라는 네 남매를 키우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버트가 우연히 픽스의 파티에 갔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픽스의 아내 베벌리와 키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키스가 두 가정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 막장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오릴 것이다. 둘 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고, 각각 배우자에게 들켜서 물건을 때려 부수는 싸움을 하고, 여자들끼리 만나서 머리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개된다. 이런 시끄럽고 끔찍하고 지저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묘한 분위기로 회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두 가정이 베벨리와 버트의 키스 이후 파탄이 난 후 50년 후의 상황에서 진행이 된다. 픽스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상황이었고, 픽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프래리의 시각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소설의 처음은 프래리의 세례 파티 때 초대받지도 않은 버트가 방문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왁자지껄한 파티 분위기가 묘사되고, 그 분위기 속에 진을 들고 생뚱맞게 서 있는 버트가 묘사된다.

 

"앨버트 커즌스(버트)가 진을 들고 나타나면서 세례파티의 분위기는 딴판으로 달라졌다. 픽스는 미소 띤 얼굴로 문을 열고,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그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앞쪽 포치의 시멘트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앨버트 커즌스였다. 픽스는 지난 삼십 분 동안 문을 족히 스무 번은 열어주었는데 커즌스는 그를 놀라게 한 유일한 존재였다." (P 9)

 

버트는 픽스와는 업무상으로 경찰서에서 몇 번 스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파티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동료 한 사람뿐이었다. 그 동료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픽스의 파티에 갈 거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다. 주 중에 온갖 복잡한 사건에 시달리고 주말에는 임신한 아내와 세 명의 아이가 북적이는 전쟁통 같은 집을 벗어나기 위해 버트는 파티를 떠올리고 방문한다. 그냥 가기 멋쩍어 세례 파티에는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는 진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세례 파티는 술 파티로 바뀌고, 술 파티에 오렌지가 섞이고, 분위기는 금세 이상한 분위기로 바뀐다. 그리고 그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버트와 비벌리는 키스를 한다. 6명의 아이들과 두 병의 배우자, 그리고 본인들의 인생을 끔찍하게 바꾸어 버릴 이 사건을 저자는 이렇게 매우 모호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아름다움의 발명지가 되어온 이 도시에서 그녀는 아마도 그가 대화를 나눠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을 것이고, 단연코 부엌에서 옆에 서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핵심은 그녀의 아름다움이었고, 그 사실은 분명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오렌지를 하나씩 건넬 때마다 그들이 손가락 사이에 작은 전류가 흘렀던 것이다. 그는 매번 그것을 느꼈고, 그 찌릿한 불꽃은 오렌지 자체만큼이나 생생했다." (P 30)

 

어쩌면 당사자들이나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회상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때 버트가 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가 진을 가지고 오지만 않았어도, 진에 오렌지를 넣지만 않았어도, 둘이 같이 오렌지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둘이 닫힌 공간에 있지 않았어도... 이런 상상을 수없이 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 아픈 과거를 매우 아름다운 색깔로 묘사하고 있다.

 

6명의 자녀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정은 이혼을 하고 비벌리는 두 자녀들을 데리고 버트와 함께 버지니아로 가서 산다. 그리고 버트의 전 아내인 테레사는 4명의 자녀들을 키우다가 여름이면 그 네 명의 자녀들을 버트에게 보낸다. 결국 6명의 자녀는 여름이면 함께 시간을 보낸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8명의 식구의 여름 날들을 저자는 묘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8명이 시장통과같이 북적이면서 보내던 여름 어느 날 버트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8명은 왜건에 끼어 타서 호숫가의 모텔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버트와 비벌리는 다음날 점심까지 잠을 자고, 아이들끼리만 남자 6명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호수로 여행을 간다. 캐롤라인이 아빠에게 배운 옷걸이로 차 문을 여는 기술로 버트의 차를 열고, 아이들은 거기서 총과 술을 꺼내서 호수로 간다. 호수로 가는 무더운 길을 걸으며 캘은 자신이 챙겨온 알레르기 약을 나눠주고, 아이들은 알레르기 약을 술이나 콜라와 함께 먹는다. 다른 가정의 6명의 아이들, 낯선 호수길, 총, 알레르기 약, 진과 콜라. 이런 단어들과 묘사들이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뜨거운 오전 태양 아래 베나들릴 네 알과 크게 꿀꺽한 진 한 모금만큼의 잠을 자게 될 앨비 옆에 그들이 마신 캔을 내려놓았다. 캘은 홀리와 새 여동생들에게서 나머지 약을 받아 비닐봉지에 넣고,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초코바가 녹기 시작했고 총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그들은 그것들을 전부 다시 종이 봉지에 넣고 호수로 향했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그들 다섯은 부모와 함께 왔다면 허락받았을 만큼보다 더 멀리까지 헤엄쳤다. 프래니와 저넷은 동굴을 찾으러 갔다가 해안 작은 숲에서 서로 뚝 떨어져 있던 두 남자에게 낚시하는 법을 배웠다. 캘은 미끼 파는 가게에서 호호스 과자 한 봉지를 훔쳤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봉지에 든 총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P 122)

 

이 여름날의 경험 뒤에 프래리의 시각에서 이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 여름 내내 그런 식이었다. 그들 여섯이 함께한 매년 여름이 그런 식이었다. 그 나날이 늘 재미있었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나날이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뭔가를, 진짜 뭔가를 하고도 결코 들키지 않았다." (P 123)

 

어떻게 이런 묘한 시선으로 폭풍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시절들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은 소설의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조금 풀렸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이고, 작가인 앤 패칫 역시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속의 이야기의 화자인 프래리가 바로 앤 패칫의 또 다른 자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한 시절을 작가 역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는데 한참을 애를 먹었다. 과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 분위기를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모호하면서도 담담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과거의 묘사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인생을 후회나 원망이 아닌, 그렇다고 긍정적인 시선도 아닌, 참으로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과거도 돌이켜 보면 마치 꿈을 기억하듯 모호하고 담담하며, 어떤 때는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개 새 아시아 문학선 22
메도루마 슌 지음, 곽형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일본과 관련하여 주의 깊게 본 두 개의 뉴스가 있다. 하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이다. 아베 총리가 관광 가이드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극진하게 트럼프 대통령을 모시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또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에 2만 명 이상 함몰되어 있는 한국인 중 자신의 부모나 형제의 이름을 빼달라는 5년간의 한국인 가족들의 탄원을 일본 재판부가 2초 만에 거절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일본 법원은 5년간 피나게 노력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주의 문장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왜 이렇게 일본은 미국과 한국에 대해 두 개의 극단적인 태도를 보일까? 태평양 전쟁 패전과 원자폭탄 투하라는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게 미국은 보기만 해도 움츠려드는 트라우마가 있는 강대국일 것이다. 반면 한국은 35년 동안 자신들이 철저하게 짓밟았던 경험이 있는 만만한 나라일 것이다. 강자에게는 철저하게 약하고, 약자는 철저히 짓밟는 속성은 다만 일본인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의 근원적 본성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폭력성이 인간의 약육강식과 닮은 점이다.

 

오키나와 출신은 작가 메도루마 슌의 [무지개 새]는 바로 이런 인간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가였다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지금은 미군 기지가 있어서 일본에서도 가장 차별을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작가의 고향인 오키나와 북부는 오키나와에서도 더욱 차별을 받는 곳이다. 메도루마 슌은 바로 이런 오키나와의 문제점을 소설로 지적하는 작가이다.

 

[무지개 새]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미군이나 미군 기지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유라는 어린 여성과 그 어린 여성을 이용해 남성들을 갈취하는 포주 역할의 가쓰야의 이야기를 다룰 뿐이다. 마유가 당하는 성적 학대와 그런 마유를 관리하는 가쓰야의 내면의 갈등이 담담하게 그려질 뿐이다. 초반에는 너무 잔혹한 성적인 표현으로 인해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쓰야는 마약에 취해 동물처럼 사육당하는 마유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만, 그 감정에 끌려다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 역시 히가라는 남자에게 학대를 당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쓰야와 마유가 어렸을 때부터 당했던 폭력과 학대가 드러난다. 가쓰야는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선배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당하고 돈을 갈취당한다. 그리고 그 조직 위에 '히가'가 있었다. 히가는 특히 가쓰야에게 집중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행하고, 가쓰야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말도 못 하고 하가의 폭력을 당해야 했다. 결국에는 히가의 심부름꾼이 되어 돈을 갈취해서 상납하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가쓰야는 동급생들에게도 배척을 당하게 된다. 마유가 당하는 폭력은 더 끔찍했다. 같은 여중생들에게 끌려다니며 성적인 학대까지 당하다가 결국 가쓰야에게 끌려와 마약에 중독되어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있었다. 가쓰야와 마유에게 히가는 어릴 때 당한 폭력으로 인해 극한 트라우마를 느끼는 존재였다. 그러기에 그가 행하는 잔혹하고 끔찍한 폭력에도 소심한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순응을 한다.

 

"그 후 3개월 동안 심호흡을 할 때마다 늑골이 아파 운동도 할 수 없었다. 뼈에 금이 간 것 같았지만, 폭력을 당한 사실을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꼭꼭 숨기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가쓰야는 그때 자신이 피하지 않았아도 히가가 정말로 얼굴에 돌을 떨어드렸을지 생각했다. 히가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이후 그와 계속 만나면서 그렇게 확신했다. 첫 대면에서부터 깊이 각인된 히가에 대한 공포심은 가쓰야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P 64)

 

소설 중반이 갈수록 가쓰야와 마유가 당하는 폭력과 함께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당하는 폭력이 묘사된다. 미군 기지를 통해 생활을 이어가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에게 순응적이다. 미군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강간하고 살해해도 그것에 데모만 할 뿐이지 격렬히 저항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유의 모습이 중첩이 된다.

 

"육교에서 바라보니 적어도 1000명은 넘어 보이는 데모대와 비교해 경찰의 기동대와 제복 경관은 다 해도 100명 정도뿐이다. 그런데도 데모대는 어디까지나 얌전하게 도로 끝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잘 보니 빠른 걸음으로 육교 아래를 지나가는 데모대 안에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기지의 철조망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온통 둘러쳐져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지를 철거해라, 범인인 미군 병사를 넘기라고 외치는 구호를 듣고 있자니 짜놓은 대본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여름 해변가에서 강제로 위를 보고 눕혀져 미군 병사 3명에게 팔 다리를 제압당한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얼굴 전체를 거의 뒤덮을 정도로 검고 커다란 손으로 입을 틀어 막힌 소녀의 눈이 공원에서 가쓰야를 보고 있던 소학생 시절 누나의 눈으로 바뀌었다. 온몸에 땀이 쏟았다. 부릅뜬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쓰야의 가슴을 도려냈다. 응시하는 눈은 어느새 마유의 눈으로 바뀐다. 몸 깊숙한 곳에 비틀어 박힌 돌의 감촉에 가쓰야는 숨을 깊이 내뱉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다." (P 114)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히가의 폭력은 더 잔혹해지고, 가쓰야와 마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까지 간다. 그럼에도 가쓰야는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하기의 폭력을 그대로 감당한다. 이 정도이면 폭발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폭력과 학대에도 가쓰야는 빨리 그 폭력이 지나가기 만을 바랄 뿐 사소한 반항 한 번 못해 본다. 폭발한 것은 가쓰야가 아니라 마유이다. 마유의 반항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고 그들은 히가에게서 해방 아닌 해방을 맛본다.

 

이 소설의 제목인 '무지개 새'는 오키나와 전설에서 오키나와 숲속에 살고 있는 새라고 한다. 베트남 전이 한창일 때 미군들이 오키나와 숲속에서 극한 훈련을 하다가 무지개새를 만나면 그는 베트남에서 살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나오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가쓰야는 중학교 때 오키나와 숲을 여행하면서 무지개 새를 만나기를 빌었다. 자신이 하기의 폭력에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하기의 폭력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또 어떤 피해를 입을지 두려워 그 폭력에 묵묵히 순응해 갔다.

 

폭력이 무서운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사람의 인격과 내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한 폭력은 가해자에 대한 공포와 함께 폭력에 대해 무기력하게 순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은 가쓰야나 마유가 당한 폭력을 통해 오키나와가 일본과 미국에 당하고 있는 폭력을 묘사한다. 그리고 폭력 앞에 무기력한 가쓰야와 마유의 모습을 통해 오키나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하기에, 두렵기에 잔혹한 폭력 앞에서도 순응하는 모습을 잔혹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모습을 떨쳐 버리고 일어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요즘 시끄러운 학교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학교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한 아이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그 폭력에 대한 처벌에 너무나도 소심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어려서 폭력을 당하는 아이는 그 폭력과 함께 철저하게 인격이 파괴되어 폭력 앞에 길들여지게 된다. 반대로 어려서 폭력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누리게 되는 아이들은 커서도 그 폭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다. 이것이 폭력 앞에 우리가 단호해져야 할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으면서 얻는 유익 중에 하나는 소설의 시대와 장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화려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사교계와 조국전쟁으로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처참한 모스크바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는 어둡고 음침한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라스꼴리노코프와 걷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으면서는 치열했던 한국사의 골짜기들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쉽게도 현대 소설에서는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해외 뉴스로만 접하던 역사의 격동기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소설을 만났다. 엘리 스미스의 [가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연작소설이다. 사계절을 나타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소설로 네 편의 소설이 연작으로 발간되었고, 특이하게 [가을]이라는 제목이 첫 권이다. 소설의 시작은 영국 해변가로 떠내려 온 시체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미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만, 생기 넘치는 소녀들의 놀이를 감상하며 잠시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잊기도 한다. 어머니의 품에서의 따스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무슨 소설의 시작이 이럴까?라고 생각하지만, 곧이어 앞의 내용과는 전혀 단절된 것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 바로 본 시대는 브렉시티 투표가 가결된 바로 직후의 상황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민 여성인 어머니와 단둘이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역시 힘겨운 삶을 사고 있다. 그나마 아스 아슬하게 유지되던 삶이 브렉시티 이후 더욱 냉혹한 차별에 던져지게 된다.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 이민 가족의 후예인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당시의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정을 배제한 체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사는 마을의 하이 거리에는 엶 축에를 알리는 깃발이 내걸렸다. 빨간색, 흰색, 파란색의 비닐 조각들이 찌푸린 하늘에 걸려 있다. 당장 비가 내리지는 않고 도로도 말라 있지만 삼각형 비닐 조각들이 맞부딪치게 하는 바람 때문에 하이 거리에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마을의 분위기도 음울하다. 엘리자베스는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을 지나친가. 분에서 시작해 위쪽 창까지 전면에 '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글자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P 72-3)

 

이런 혼란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권을 갱신하려고 한다. 사소한 행정착오와 행정 직원의 냉대, 그리고 여권이나 신분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가 부딪히는 영국의 관료 사회의 냉대는 마치 내가 그런 냉대를 받는 듯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종잇조각 한 장이 대체 멀 증명할 수 있다는 거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접수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깐 실례하겠다면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수화기에 손을 대고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적절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도록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뒤로 작은 줄이 이어져 있다. 모두 이 접수원을 통해 수속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P 139)

 

소설은 엘리자베스가 겪는 영국 사회의 냉대와 함께 어린 시절 경험했던 대니얼이라는 남성의 따스한 교류의 기억이 교차에서 진행된다. 젊은 시절 많은 예술가와 교제하면서 예술과 인문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대니얼은 나이가 들어 우연히 옆집에 살았던 어린 엘리자베스와 우정을 이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통해 예술과 인문에 대한 지식을 경험하고 그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처음 강변에 떠밀려 와 죽은 시체의 시선으로 영국 사회를 보듯이, 영국 사회에서 냉대를 받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때나마 자신에게 따스한 감정을 주었던 대니얼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엘리자베스 안에, 그리고 영국 사회 안에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을 인간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남기기도 한다.

 

이 소설은 특정한 스토리보다 엘리자베스의 의식과 시선을 따라 이어지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직접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관공서나 도서관, 병원 등에서 당하는 차별 등을 마치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소설의 읽는 사람을 엘리자베스가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실 오랜 시간 뉴스를 통해 영국의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 상황을 보면서 그 사태에 대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브렉시티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 영국 사회의 결정이 다소 이해가 되곤 했다. 수없이 밀려드는 난민과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의 사회와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게도 느껴 지다가도,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지지도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한심하게도 느껴지도 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일까? 이 책은 이런 혼란 상황을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온 나라에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폭풍에 송전선이 철탑을 부러뜨리고 나무와 지붕과 차량들이 위의 상공을 지져 대듯 그 사건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패배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 사람들은 구굴에서 '유럽 연합이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정당화되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실감과 충격을 느겼다." (P 78-9)

 

이런 묘사와 함께 어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따스했던 감정의 교류의 장면들을 묘사하며 아직 영국 사회에 남아 있을 인간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소설의 말미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대니얼이 의식을 찾는 장면을 묘사하며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의 영국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간접 체험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과연 이것이 영국 사회만의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 역시 최근 들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과 정치, 남녀 편을 가르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대신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처럼 전혀 다른 상황의 사람들과의 따스한 교류는 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는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다리까지 부수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브렉시티의 혼란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해 주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기 초이면 꼭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보통 설문지로 가정의 형편을 적어 내는 것이다.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들을 적어 내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손을 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모두 눈을 감아 보라고 말하며 '집에 텔레비전 있는 집 손들어 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없는 아이들도 친구들에게 가난하게 보이기 싫어 일부로 들기도 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 같다. 내 안에 타인과 비교의식이 생긴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애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런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똑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에 있는 것이 친구네 집에는 없고, 반대로 친구네 집에 있는 것이 우리 집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우리 안에는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으로 대표되는 어린 시절의 내밀한 기억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 작가가 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란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책은 1952년 여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 23)

 

주인공은 그날의 세세한 기억들과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날 입었던 옷, 라디오에서 방송한 드라마의 내용,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들, 그리고 그날의 결정적인 장면들까지.

 

"그릇을 치우고 밀랍을 입힌 식탁보를 걷어낸 뒤에도 어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어 있는 쥐구멍만 한 부엌에서 꿈지럭 거리며 연신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식탁에 묵묵부답 앉아 있었다. 그러다 돌연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붙잡고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이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게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내 어머니의 비명과 함께 "애야!"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실에서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라요!" 어두 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 손에는 나무 뭉치가 박혀 있던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다." (P 24)

 

그러나 부모님은 곧 화해하고, 그 후 이 사건은 한 번도 가정 안에서 화제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주인공의 의식 속에 남아 있고, 주인공은 그날 이전의 자신과 그날 이후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싸움의 상처가 주인공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이 평생 그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남겨진 것은 트라우마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물론 그 부끄러움의 감정의 실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마치 그날과 그날과 관련된 소소한 일상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전쟁 직후 건물을 부수고 재건축할 때 날리는 먼지, 흑백 영화, 흑백의 교과서 비옷, 짙은 색 외투 때문에 내 눈앞에 떠오르는 1952년의 세계는 과거의 동유럽 나라들처럼 한결같이 회색이다. 하지만 거리의 담장 너머로 늘어진 장미, 등나무 꽃, 어머니 치마처럼 푸른 바탕의 붉은 무늬가 새겨진 옷도 있었다. 식당의 벽지도 장미꽃무늬였다. 그 사건이 벌어졌던 일요일은 날씨가 좋았다. 당시의 세계는 의례적인 정적만이 감돌았다." (P 65)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다녔던 가톨릭 학교 (소설에서는 기독교 학교로 번역되어 있는데, 소설 내용상 가톨릭 학교가 맞을 거 같다)에서 그녀가 흠모하거나 닮고 싶어 하던 선생님이 우연히 그녀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던 장면이다. 가톨릭 학교여서 축제가 많았는데, 그날도 늦게까지 축제에 참여하고 새벽에 선생님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렸고, 마드무아젤 L.이 내가 사는 동네까지 학생을 데려다주는 일을 맡았다. 새벽 1시경이었다. 나는 식품점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게에 불이 켜지더니 구겨지고 얼룩덜룩한(오줌을 누고 옷으로 그냥 닦았기 때문에) 속옷 바람으로, 잠이 덜 깨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산발한 어머니가 현관 불빛 아래에 나타났다. 마드무아젤 L.과 몇몇 학생들이 하던 이야기를 뚝 멈췄다. 어머니가 어물 머물 인사말을 건넸지만 아무도 답례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이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져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졌다." (P 118)

 

주인공에게 있어서 1952년은 단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사건만이 일어난 시기가 아니었다. 단지 그 사건이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해 주인공은 가톨릭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시선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전까지는 당연히 여기던 세계가 그녀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각인시킨 사건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던 사건이다. 그녀가 다른 가정과 친구들에게서 보았던 교양 있고 풍족한 모습과 그녀의 집에서는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그 부끄러움의 실체와 결과를 이렇게 고백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P 137)

 

소설은 저자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내밀한 경험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첫 문장과 처음 묘사되는 사건이 너무 강렬했기에 이후의 소소한 묘사들과의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왜 이렇게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삶과 말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가면서 이런 세세한 것들이 바로 주인공의 내면을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내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부끄러움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흔히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미 치유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랫동안 씨름했던 그 내면의 문제를 이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내어 놓는다. 한때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남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상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멀어졌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아니, 그것을 토로하며 가까웠던 사람도 멀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은 더 부끄러움이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담담한 시선으로 이제 그 부끄러움을 글로 이야기한다. 이 소설 이후 작가는 변했을까?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도 자신의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글쎄, 다른 것은 몰라도 이전보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내밀한 이야기들이어서 마치 소녀의 일기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