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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영화나 만화를 보면서 주인공을 통해 나 자신의 투영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이 고달팠거나, 학창시절에 학교와 성적에 압박을 당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그런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게 하는 잠시의 이상적인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는 마징가 Z나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고는 했다. 여자친구들은 캔디나 들장미 소녀 하이디였던 것 같은데, 그 시절 여자친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에 잘 알지는 못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는 홍콩 영화의 주인공들을 좋아했다. 성냥개비 하나를 물고, 절대로 총알이 떨어지지 않는 총을 들고 난사를 해다는 주윤발이나 유덕화와 같은 홍콩 르와르 영화의 주인공들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현실에 적응하면서부터 이런 인물들과 분리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오쓰이치의 [메리 수를 죽이고]는 현실의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음울하고, 때로는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그중 이 소설집의 대표 작품인 [메리 수를 죽이고]는 흔히 이야기하는 한 오덕 소녀의 성장기이다. 주인공은 뚱한 체구에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는 외톨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잊기 위해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 빠져있다.
"나는 초라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런지 체형은 호빵 같았고, 소극적인 사고방식에 말재주도 없고, 굼뜨고, 뭘 해도 자신감이 없으며, 누가 말을 걸면 얼굴을 붉히고, 웃음소리는 흉하고, 촌스러운 안경을 쓰고 있어 이성은 물로 동성에게도 무시당했으며 반에서는 음침하고 기분 나쁜 여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살아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나도 창작물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P 179-180)"
주인공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판타지 만화와 소설 동호에게 들어갔고, 그곳에서 가사라기 루카라를 필명으로 소설을 쓰기 한다. 비록 고등학교 친구들이 돌려보는 유치한 소설이었지만, 제법 글 실력을 인정받아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녀의 소설마다 '메리 수'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메리 수란 유명한 영화나 게임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와 2차 소설을 쓸 때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을 투영해 이상화시킨 인물로 대부분 미소년이나 미소녀로서 청소년의 나이에 함대를 지위하거나 무한한 능력으로 전쟁을 승리하는 등의 허무맹랑한 존재이다. 스타트랙이라는 영화의 2차 소설에서 메리 수라는 열다섯 살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 후 이런 특성을 가진 주인공들을 메리 수라고 부른다. 루카는 자신의 소설에서 메리 수가 등장하지 않게 온갖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어떤 소설을 써도 메리 수가 등장한다. 그만큼 자신이 현실에서 억눌려 있고, 다른 자신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카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과 대화를 하고, 여러 가지 취미를 익히며 자신 안에 메리 수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 한다. 그렇게 점점 성장하다 보니 이제는 그녀의 소설에 더 이상 메리 수가 등장하지 않게 된다. 문제는 이제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킹카가 되어 대학생 생활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예전의 자신의 소설의 메리 수를 만나게 된다. 작가의 대부분의 소설처럼 판타지적인 소설이지만, 단순히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매우 깊이 있게 보여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는 중단편 정도의 분량인 [염소자리 친구]라는 소설도 실려 있다. 구약성경의 아사셀의 염소라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마다 한 마리의 염소를 택해 광야로 내 보낸다. 자신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이것을 아사셀의 염소라고 부른다. 이 소설도 판타지적 요소가 있지만, 단순히 판타지 속에서 학교 폭력의 처참함을 묘사하고 있어서 너무 인상 깊게 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 있게 읽은 소설은 처음에 실려 있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이다. 이 소설 역시 성장소설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있었는데 내가 지나치고 읽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은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로부터 잉크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잉크를 버리려던 주인공은 우연히 잉크를 다시 줍고, 잉크를 쓰기 위해 일기를 쓰고, 일기를 쓰면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급은 빠른 호흡을 통해 한 남자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그 짧은 이야기에 인생과 치유가 담긴 소설이다. 특히 주인공이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자녀가 자는 모습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툇마루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나나코와 가케루가 있는 다다미방으로 돌아갔다. 한 이불을 덮고 잠든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얼굴이 서로 쏙 빼닮았다. 나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 쓰레 가방에서 일기장과 잉크병과 펜을 꺼내 그날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탁상 조명의 불빛 아래 글씨를 써 내려가는데 어느 틈에 나나코가 눈을 뜨고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와 만난 의미. 카케루가 태어난 의미. 어머니가 나를 낳은 의미. 아버지가 어머니와 만나 의미. 뭔가 왈칵 치밀어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만 기적 같았다. 지금, 내 곁에 나나코가 있고, 가케루가 존재해,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몹시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케루. 내가 태어난 의미 바로 그것. 내 미래의 결정체. 그리고 나는 또한 아버지를 생각했다. 예전에 품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 작가를 뒤따르려 가족을 버리다니 어리석은 남자다. 하지만 그 감정도 이제는 풍화되어 버렸다. 시간이라는 바람에 깎여나가 뾰족했던 부분이 곡선을 띠었다. 지금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네"라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내 펜으로 글을 쓰게 된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P 22-3)"
이 외에도 이 책에는 작가가 여러 가지 필명으로 섰던 다양한 스타일의 소설이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 [에바 마리 크로스]라는 소설은 인간 악기라는 소재를 등장시켜 마치 에드가 엘런 포우의 소설처럼 어둡고 기괴하다. 오래전 영화인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분위기도 풍긴다. 그럼에도 작가의 소설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상처받은 인간'이다. 상처 받은 한 인간이 치유되는 과정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이 작가의 메리 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