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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ㅣ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평점 :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는 것에 있다. 소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전쟁 소설을 읽으며 참혹한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있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마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옷장을 통해 나니아의 세계로 들어가듯 소설은 전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이런 많은 소설 중에서도 나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아주 독특한 세계로 데려 간 소설이 있다.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다. [설국]의 마력은 소설을 펼치는 순간부터 첫 문장을 통해 읽는 사람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데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한 문장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을 일본의 눈 내리는 한 시골마을로 데려간다. 비록 공간적인 배경은 있지만, 이곳은 단순한 공간의 장소가 아닌 인간 깊은 곳에 존재하는 허무의 공간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편에서 저자인 허연 작가는 바로 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허무의 공간을 여행한다.
저자는 먼저 [설국]의 배경이 된 일본의 에치고유자와 마을을 여행한다. 눈 내리는 어느 날 그는 무작정 일본으로 향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차를 탄다. 물론 작가가 탑승했던 기차나 그 선로가 아니었고, 이제는 폐쇄가 되어 그 터널을 더 이상 지날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한 작가의 시각으로 기차를 타고 에치고유자와 마을로 향한다. 그리고 설국의 낯선 공간의 느낌을 받는다.
"기후대가 바뀌었다는 걸 느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치고유자와 역은 놀랍도록 습했다. 맑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할 정도로 사위는 흐렸고 공기는 눅눅했다. 낮인데도 해거름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P 45)
"에치고유자와의 음습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만큼 지배적이면서도 숙명적이다. 특히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이 땅의 기후는 특별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P 45)
허무의 공간이 설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러기에 저자의 여행은 단순히 지명을 쫓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타계한 작가의 마음속의 근원에 존재하는 허무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그가 에치고유자와 마을에 도착했을 순간부터 그는 설국에 도착했는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마음에 도착했는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휩쌓인다.
"설국에는 벗어나고 싶어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겨나는 묵직한 자기장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으로 에치고유자와에 도착한 날 역 풍경도 예사롭지 않았다. '쓸쓸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습도가 이제 막 설국에 입국한 나를 사로잡았다." (P 48)
이 책의 초반부가 소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를 따라 에치고유자와 마을을 여행했다면, 후반부부터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한 인간의 인생의 궤적을 쫓아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출생하고 자란 곳은 오사카 지역 인근 아바라키 시 부근이다. 그는 몰락해 가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와 함께 이미 두 살과 세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거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일곱 살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열 살 때는 누나마저 죽는다. 결국 그는 열다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그와 함께 산다. 그 시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죽음과 어둠, 그리고 허무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요카와 초등학교와 이바라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할아버지와 보내는데, 그는 훗날 '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 방 안에 앉아 동쪽 하늘을 보는 것이 유일한 일과였다'라고 술회한다. 참 막막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집이라고 해봐야 하루 종일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일자무식의 식모뿐이었으니 그에게 인생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유소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P 135)
저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마음에 인생의 허무가 깊게 자리 잡은 시기를 청춘의 시기로 본다. 그는 도쿄제국 대학을 다니던 스무 살 무렵 열네 살의 카페 직원이었던 '하쓰요'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 청혼을 했지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파혼을 당하고 하쓰요는 잠적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죽을 때까지 하쓰요가 사라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깊은 허무 속을 헤맨다.
작가는 설국의 배경인 에치고유자와를 시작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향인 이바라키, 그의 또 다른 대표 소설인 [이즈의 무희]의 배경이 된 이즈반도 등을 여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허무의 세계를 여행한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좋아해서 이 시리즈를 소개하는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이란 팝캐스트를 즐겨듣는다. 그 방송에서 저자인 허연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늪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조금 알았다고 생각하면 다시금 알 수 없다는 작가였다. 그가 지긋지긋했다!"
저자에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애증의 존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단순히 작가의 생애나 작품의 장소를 여행하는 책이 아니라, 작가 마음속의 허무를 여행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인간 안에 있는 허무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간 저자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의 허무의 근원과 그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알아가면서 감탄을 했을까? 아니면 그의 깊은 허무 속에 같이 빠져서 허우적 거렸을까? 어떤 것이든 덕분에 나 같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여행기에서도 읽을 수 없는 독특한 세계로의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