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에서 [일대종사]라는 영화가 있다. 무술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무술영화라기보다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 인물들을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소룡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고 중국인들에게 영웅시되는 엽문(양조위 분)이다. 그러나 영화 내내 주목을 받는 주인공은 따로 있다. 여성의 몸으로 자신의 가문의 무술을 지켜가는 궁이(장쯔이 분)라는 여인이다. 영화에서 궁이는 무술을 통해 엽문과의 교감도 나누기도 하지만, 평생 혼자의 몸으로 가문의 무술을 자키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혼란한 중국 근대 시대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과 홍콩으로 피난 등이 이어지지만 궁이는 시대의 흔들림 속에서 끝까지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아간다. 이 영화의 압권은 기차역에서의 궁이와 궁이의 아버지를 죽이고 친일파가 된 일석천과의 대결이다. 시대의 변혁을 상징하는 달리는 기차 옆에서 구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쿵푸로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매우 처연(凄然) 하면서도 비장(悲壯) 하게 그려진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시대의 소음]을 읽으면서, 전혀 다른 배경과 전혀 다른 주제의 영화인 [일대종사]를 떠올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시끄러운 기차역에서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한 음악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대표적인 음악가로 알려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피아노 실력과 작곡 실력으로 소련의 대표적인 음악가가 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에 계속해서 비판을 당하고 숙청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후르쇼프 이후 그는 더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었지만, 공산당의 이념과 본인의 음악 추구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 당해야 했다.

소설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챕터의 제목은 모두 특정한 장소를 가리킨다. 1부는 '층계참에서', 2부는 '비행기에서', 3부는 '차 안에서'이다. 이 제목들은 모두 주인공 드미트리의 인생에서 특정한 시기와 장소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특정한 시기의 장소에서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는 내용이다. 이 장소들은 매우 함축적인 이미지로서 주인공의 그간을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1부 '층계참에서'는 어느 정도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가족도 이룬 드미트리가 자신의 집 엘리베이터 옆 층계참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주인공이 스탈린 시대에도 인정을 받지만,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형식주의라는 비판에 몰려 숙청의 위기에 몰린다. 그는 엘리베이터 옆의 층계참에서 자신을 잡으러 오는 군인들을 예상하며 공포에 떨고 주인공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2부의 '비행기에서'는 중년이 된 드미트리가 미국에서의 공연과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간의 인생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는 숙청 위기에서 어찌 보면 비굴하게 권력층의 예술 방향에 수긍하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는 소련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미국에서 공연과 연설을 하고 온다. 그는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가적 신념과는 다른 공산당의 이념을 선전 도구로서 연주를 하고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그런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며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3부에서 '차 안에서'는 이제 노년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드미트리가 주인공이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쇼프 시대를 회상한다.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 니나가 죽고, 그는 후르쇼프에 의해 러시아 연합 작곡가 조합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시대가 그를 몰아붙인다. 그는 평생 가입하지 않던 공산당에 가입헤 되는 날, 아내가 죽었던 날처럼 슬피 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는 당에는 가입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마지막 신념마저도 지킬 수가 없었다.

각 내용마다 권력자와 시대는 바뀌지만 소설의 시작 내용은 비슷하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1부, P17)"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다.(2부, P91))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3부, P67) 각 시대마다 시대의 권력은 그를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도록 놔두지를 않았다. 심지어는 마지막 남은 예술가로서의 영혼까지도 통제하고 짓밟으려 한다. 그럼에도 드미트리는 묵묵히 시대의 공포와 소음을 뚫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세상은 그를 겁쟁이라고 하고, 드미트리 스스로도 자신을 겁쟁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인 줄리언 반스는 그를 겁쟁이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주인공 드미트리를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고 몸부림친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면서도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이중적인 면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킬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에 불과했으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 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 영웅으로 살아간다. 혹은 그 반대거나, 아니면,  더 흔한 경우는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도 겁쟁이로 산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도끼날에 반으로 쪼개진다. 차라리 산산이 쪼개져 조각들이 한때는 딱 들어맞았음을 헛되이 기억 하려고 애쓰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과연 드미트리가 자신의 음악과 자신의 영혼을 지켰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노년에 공산당에 가입하고 나서야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만큼 울었다는 것은 마지막 자신이 지켜야 할 것까지도 권력층에 의해 모두 빼앗겼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니다! 울 수 있다는 것, 시대의 소음 속에서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것, 그런 망므을 가졌던 것, 그것만으로도 그가 마지막 예술가의 양심은 지킨 것이 되지 않았을까?

몇 천만 명을 학살한 스탈린의 광기의 시대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혼란스러운 시대는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어떤 예술가는 대우를 받고, 어떤 예술가는 핍박을 받는다. 근대와 현대의 격변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예술 자체보다는 권력과의 관계로 평가절하되기도 하고 과대포장되기도 했다. 과연 권력과 시대와 무관한 예술가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지키려는 사람을 존재하지 않을까?

줄리언 반스는 전작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받았다. 위대한 문학상을 탄 작가가 이처럼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이런 줄리언 반스의 흡입력을 기대하고 [시대의 소음]을 읽는다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다. 전작보다 주제는 무거워졌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소설가는 영화감독들이 초기에는 인기를 위해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성공한 후에는 인기와는 상관없이 진정 자신이 하고 싶었던 주제를 다루는 것을 많이 보았다. 어쩌면 줄리언 반스도 이 책에서 진정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시대의 소음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삶을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이웃 2017-09-0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소설입니다.
번역에 대해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번역자는 번역에 충실한 것 같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처한 예술가들과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평소 궁금했습니다.
저자의 단편을 읽을 수 있어 좋네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