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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 - 지금보다 더 나은 당신의 내일을 위한 철학 입문서
나오에 기요타카 엮음, 이윤경 옮김 / 블랙피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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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스포츠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등산이다. 한 가지 일에 빠져서 답을 찾지 못할 때 등산을 하게 되면 답을 찾을 때가 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문제가 전부가 아닌, 그 주변의 상황까지 넓게 보이며 의외로 쉽게 답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다. 등산을 통해 삶을 넓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도 그런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여러 분야의 독서 중에서 철학서적을 즐겨 읽는다. 철학서적은 다른 책을 3-4권 정도 읽을 시간에 한 권 읽기도 힘들어 독서량은 적은 편이지만, 철학서적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철학을 통해 삶을 조금 더 폭넓고 깊이 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라는 책도 바로 이런 시각을 철학을 바라보게 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은 35명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특정한 분야에 대한 질문에 답을 제시하고 있고, 저자인 나오에 기오타가가 이것을 한 권으로 엮었다. 다른 철학 서적보다 내용이 쉽고, 또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쉽게 읽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인터넷 정보,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대놓고 성(性)을 화제로 삼아도 될까?' '자유경쟁이란 어떤 경쟁일까?' '우리의 삶은 모두 유전으로 결정될까?'와 같은 우리가 접하고 있는 실질적은 문제들을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챕터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반 사람들의 대화가 제시되고,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이어지고, 결론적으로 이런 문제를 접근했던 철학자들의 사상이 소개되는 방식으로 책이 진행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챕터이다. 빅터 플랭클의 [밤과 안개] 책과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삶의 의미를 찾는 문제'를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 챕터에서 먼저 두 명이 대화를 한다. 지우라는 사람은 인접 국가에서 일어난 쿠데타와 독재, 그로 인해 탄압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태주는 듣는 둥 마는 중 하면서 자신의 문제만을 이야기한다. 동아리 농구 대회에서 실수를 했다든지, 리포트를 못 내고 있다는 개인적인 사소한 문제 등을 이야기한다. 지우는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지만, 태우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한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일까?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고통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저자는 이런 문제를 통해 고통의 문제에 접근한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이 경험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과 그의 사상을 이야기하며, 인간은 고통에서 삶의 방향을 전환할 때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프랭클은 '삶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삶'은 수동적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가 처하는 상황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생동하다 보면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야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된다고 여겼다." (P 168)

 

저자는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나만의 삶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말로 질문의 방식을 바꾼다. 심지어 삶뿐만 아니라 죽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다른 챕터들에서도 이런 방법이 이어진다. 어떠한 질문에 대해 답을 할 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질문 자체가 틀려 있음을 이야기한다.

 

쩌면 우리가 스스로나 타인에게 묻고 있는 질문들 중 대부분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답을 찾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이 틀렸으니 당연히 답이 없는 것이다. 이 책은 한 가지 생각으로만 묻고 답하려는 편협한 생각에 빠진 사람들을 오랜 기간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고민한 넓고 깊이 있는 질문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질문과 접하고 새로운 답을 얻게 한다.

 

이것이 철학이 주는 유익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이 삶의 문제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에 눌리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으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넓게 본다면 새로운 질문과 답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철학은 자기개발서처럼 단순히 지금의 삶에 유익을 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을 통해 인생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볼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나오지 않을까? 이 책은 철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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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 21세기 비판이론
스튜어트 제프리스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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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내가 가장 공감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의 인물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김범우라는 인물이다. 태백산맥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렬했던 해방공간에서 중도적이고 민족적인 시각을 가진 김범우라는 인물의 시각을 통해 좌우익의 극단적인 사상과 그들의 만행을 바라보고 있다. 김범우는 미군 특수 요원이라는 높은 지위로 해방공간에 들어왔지만, 우익들의 지나친 만행과 학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좌익들의 테러나 여순 반란 사건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좌우익이 함께 사는 이상적인 한반도를 꿈꾼다. 그로 인해서 우익에게는 빨갱이로, 좌익에게는 반동분자로 몰린다.

 

나 역시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혼란의 시대에 청춘에 이어서 중년까지 보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차례씩 광풍이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논리로 반대편을 짓밟고 자신들의 사상에 온갖 것을 억지로 끼어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한 방향으로만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나는 그런 극단성과 획일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한 쪽 편의 사람들에게는 색깔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또 다란 편의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편하게 세상을 사는 방법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에 철저하게 순응하면 앞장서서 반대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가장 힘들게 사는 것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 속에 담긴 광기와 폭력을 지적하며 그들이 폭주하며 세상과 사람을 학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여기 태백산맥의 해방공간보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보다, 더 격렬하고 치열했던 시대를 날카로운 사상으로 돌파하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들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프랑크푸랑크 학파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의 학 건물에 모여들었던 당대의 학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호크하이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 하버마스, 호테트 등 주로 이어지는 이 사상가들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와 해방 후의 냉전시대, 그리고 흔히 신좌파 운동으로 불리는 1960년대의 극한 혼란을 지나, 신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현대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까지 그들의 사상으로 세상의 광기와 폭력과 맞섰다. 주로 유대인들이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주장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시오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이들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배하는 획일적인 사상의 폭력에 맞서 그 폭력의 실체에 대한 냉철한 탐구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배세력에게서는 유대인이며 사회주의자들이란 비난을 받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책 서론에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카치의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틑 학파가 마르크스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며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분개했다. 철학자 게오그르 루카치는 아도르노와 프팡크푸르트 학파의 소위 '그랜드 호텔 어비스(Grand Hortel Abyss)'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루카치가 이름 붙이 이 아름다운 호텔은 '각 종 편의시설로 가득했지만 허무와 모순, 심연이라는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벼랑 끝에 선 호텔에 묵었던 손님 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있었다. 루카치는 소펜하우어의 철학이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을 사색한다고 지적했다. '매일 최상의 만찬을 즐기고 예술 감상을 하면서 틈틈이 심연을 성찰하는 일은 그저 섬세하고 안락한 여가생활을 극대화시켜 줄 뿐이다.'라고 루카치는 비아냥거렸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루카치는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처럼 벼랑 끝 호텔에 투숙한 새 고객들은 고통에 대한 도착적 쾌락을 즐겼다고 그는 비판했다. 이들의 경우 물론 쾌락의 대상은 호텔 테라스에 앉아 굽어본 저 심연 밑바닥에서 인간 정신을 파괴시키고 있는 독점 자본주의의 거대한 장관이었다. 루카치가 보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연결고리를 포기해버렸다." (P 24)

 

대부분 부유한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로서 돈벌이를 위해 힘들게 노동을 하거나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적 없이 부유한 사업가나 부모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사색만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혁명가들이 보기에는 신선놀음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과 사유의 과정은 결코 여유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사상가의 사상이 이처럼 치열하고 처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이들은 사상뿐만 아니라, 삶 역시 치열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1920년대에 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의 문제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독일의 후방에서는 노동자들과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앞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에 비해 쉽게 사그라들고, 다양한 계급들이 연합된 바이마르 정부를 탄생시킨다. 대부분 아드르노와 벤야민 등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왜 독일에서는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목을 했던 것은 루카치로부터 언급된 '포드주의'라는 당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론의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포드에 의해서 처음으로 자동차 조립공장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생산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대량생산의 문화는 노동자들에게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소비자로서의 한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착취의 개념을 가지던 소비자는 이제는 자신도 소비의 욕망을 가지는 존재로 바뀐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가 주는 무한한 쾌락과 환상의 꿈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쾌락과 환상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예술로 본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통렬히 비판했던 이유이다.

 

"조립라인은 생산과정을 가속했지만 노동자는 나약해졌다. 그들은 갈수록 기계의 부품이 되어가고 더 나쁜 경우에는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낡은 것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가령 포드의 자동차 공장은 보잘것없는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동적으로 부품을 찍어낼 수 있는 기계가 비치되어 있었다. 인간은 생산적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생산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 그들이 사용하는 이론과 어휘 일부에 이런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 존재론적인 비극으로 보일지 모른다. '내가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차 한 대씩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에게 말했다. 인간은 단지 기계가 되거나 기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들의 정체성은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수동적 소비를 통해 정의되어 있다." (P 132)

 

"문화의 차원에서 포드주의는 세상을 현대화했다. 대량생산제품은 T 모델뿐 아니라 찰리 채플린 영화도 포함된다. 기계화는 산업화를 혁명화할 뿐 아니라 예술을 산업화해서 생상과 분배의 가능성을 가속화하고 새로운 예술형식 - 영화와 사진 - 을 가능하게 만들고 예술형식의 - 소설, 회와, 연극 - 활기를 없앤다. 속도, 경제, 찰나의 순간 그리고 오락은 대량생산 문화의 특징이다. - 중략- 베버의 자본이라는 철의 교도소는 일하는 시간 동안 인간을 억눌러 왔다. 이제 문화산업이 여가시간에도 인간을 억압한다. 그들은 생산적 존재에서 소비자로, 창조적 활기로 넘치는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꿈으로부터 모든 똑같은 것을 보고 낄낄거리는 무감각한 영화 관객으로 바꾸어버렸다." (P 132-3)

 

이 책은 초반부터 벤야민의 '구운 사과 향기에 대한 기억'과 '카이저 파노라마'라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장치 등을 언급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싸우려고 했던 대상이 단순히 자본주의가 아닌, 그 자본주의 뒤에서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주며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단지 욕망하는 존재라 바꾸려 하는 거대한 힘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가치와 대항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1930년대 1940년대를 지나면서 그 사상이 바뀐다. 바로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제 새로운 질문에 직면한다. 왜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할까? 1940년대에 이르러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등은 자본주의의 횡포 대신 나치나 파시즘적인 야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야만에 동조하는 대중들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된 사상인 '비판이론'이 정립되게 된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머에게 이렇게 쓴다. '내 생각에 우리가 관례적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연결해서 생각했던 그 모든 고통이 아주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유대인에게 집중적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 같다네. 비판이론을 낳게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사회 연구소의 토대이자 공식적인 목적인 되어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이 이제는 학파의 관심 대상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1947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프롤레타리아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목적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존재 상황으로 진입하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P 307)

 

이 연구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그 야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역사철학테제]나 미완성이지만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대작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주로 미국에 피해있던 이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보고 경악한다. 그들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개인주의에 강력한 반감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더욱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목표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하버마스 등에 의해 이어진다.

 

이렇게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의 광기와 그 사상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뒤에 있는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항상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았다.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 때 마르크스주의자와 유대인으로 공격을 당하고, 프랑스로 망명 와서는 독일인으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미국에 건너와서는 지독한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받다가,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로 돌아가서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중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1960년대의 신좌파 운동이 극렬할 때는 그들로부터 극심한 모욕과 핍박을 당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폭력에 반대하다가, 학생들이 강단을 점검하고 그를 조롱하고 모욕을 당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일화에 의하며 여학생들이 강단에 올라가 브래지어를 벗고 가슴을 보이며 그를 조롱했다고 한다. 결국 그 충격으로 강의를 관두고 등산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어찌 보면 발터 벤야민의 죽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왜 아드로는 자신의 사상과 뿌리가 같을 수도 있는 신좌파 운동의 폭력에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책의 핵심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서론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1969년에 아드로노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 히틀러 시대에 창궐했던 권위주의 성격과 그에 따르는 순응주의 정신이 신좌파와 학생운동에서 되살아나 활보하는 양상에 주목했다. 학생운동과 신좌파는 반권위주의적인 듯 행세하지만 자신들이 전복의 목표물로 지목한 억압적 구조를 그대로 복사하고 있었다.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일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성찰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라고 아드르노는 섰다." (P 27)

 

우리는 흔히 어느 학파나 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그 학파나 학자가 주장한 사상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그 사상의 내용보다 그 사상을 완성하기까지의 사유의 과정이 중요할 때가 있다. 과연 그 사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그 사유의 과정의 핵심을 이 시대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회가 야만과 폭력성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다.

 

이제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치며 조금 위험한 마무리를 하려 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흔히 보수주의냐 진보주의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놓고 싸운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하면 어쩌면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의 탈을 쓰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려는 야만성과 폭력성이 우리가 바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 순간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가면을 바꾸어 쓰고 우리에게 접근한다. 우리가 주목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가면이 아니라, 그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바로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다. 아쉽게도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 점점 우리 사회의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도 우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배우고, 그들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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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 인간 역사의 가장 위대한 상상력과 창의력 Philos 시리즈 6
월터 아이작슨 지음, 신봉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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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우리 시대의 천재들을 보면 존경심을 넘어 경이감마저 든다.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나와는 다른 천재성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좀 더 올라가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의 생애나 그들의 작품을 접하면, 이들을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와 같은 작품의 언급만으로도 그가 우리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그가 생전에 만들었던 수많은 발명품과 시대를 앞서갔던 창의적인 생각들을 접하다 보면 '이 사람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이다!'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책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들이 산산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월터 아이작슨은 스티브 잡스나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위대한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의 전기로 유명한 전기 작가이다. 그가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쓰면서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빈치에 대한 전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동안의 고리타분한 천재성 예술가의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 ?이 책은 다빈치의 평범성에서 출발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의 핵심은 어떻게 평범한 인간인 다빈치가 천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창조성의 원천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의 노트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노트에 그림과 함께 필기했다. 한 장마다 빼곡히 그림과 글로 쓰인 그의 노트는 몇 만 페이지에 이를 것으로 추측하지만, 지금은 4분의 1 정도인 7200페이지가 전해져 온다. 저자는 당시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현존하는 7200페이지 이상의 노트는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전체 분량의 4분의 1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5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기록은 스티브 잡스와 내가 회수할 수 있었던 1990년대 잡스의 이메일과 전자 문서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창조력 응용의 기록을 낱낱이 제공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뜻밖의 횡재라고 할 수 있다." (P 150)

 

 

그곳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의 진화의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처음부터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갈고닦고 준비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 그가 끊임없이 그 작품을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음이 그의 노트에서 나타난다.

 

"이 노트의 아름다움은 막연한 생각, 반쯤 완성된 아이디어, 덜 다음어진 스케치, 윤색되지 않은 논문 초고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레오나르도의 널뛰는 상상력, 근면함이나 규율과는 거기라 먼 총명함과 잘 어울린다. 그는 종종 자신의 노트 메모를 정리하고 다듬어 책으로 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과 꼭 닮았다. 그는 많은 그림 작품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논문 초고를 붙들고 가끔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문장을 다듬었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완성된 글을 대중 앞에 내놓지 않았다" (P 152)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식을 그대로 암기하고 주어진 일을 단기간에 빨리 완성하는 그런 천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낙제점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고, 또 예전의 생각과 새로운 생각을 접목시켰다. 저자는 바로 이런 레오나르도의 창의성이 천재성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가 이렇게 창의성을 가졌던 이유를 그의 출생환경에서 찾기도 한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공증인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명한 공증인들을 배출했고, 만약 다빈치도 사생아가 아니었다면 제도화된 교육을 받고 공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생아였기에 12세가 되기 전까지는 피렌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했고, 제도화된 교육은 주판 교육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런 자유로운 어린 시절과 함께 12세 때부터는 아버지의 부름으로 피렌체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의 피렌체는 모든 혁신적인 기술과 예술이 모인 곳으로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모두 모여 있었다. 저자는 특히 레오라르도가 그 시대의 건축가인 저 브루넬리스키와 알베르티가 다빈치의 창의성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브루넬리스키는 얼마 전 알쓸신잡이라는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피렌체의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 후 14세에 이르러 베르키오라는 화가 밑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시기에도 그는 단순히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협업의 과정에서 스승과 다른 독특한 창조성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작품에서는 스승이 그린 생동감 없는 천사와 그가 그린 생동감이 넘치는 천사가 유달리 차이가 난다.

 

"두 천사를 비교해보면 레오나르도가 스승을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알 수 있다. 베르키오의 천사는 멍해 보이고 얼굴도 밋밋하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자기 옆에 있는 훨씬 생동감 넘치는 표정의 천사에 대한 감탄뿐이다. 케네스 클라크는 이렇게 섰다. '그는 자기 동료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자 처럼 처다보는 듯하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베로키오의 천사가 절대 진입할 수 없는 상사으이 세계에 속해 있다." (P 85)

 

 

그 후 이 책의 서론에서 나오는 대로 서른 살에 밀라노 통치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밀라노로 이주하며 그곳에서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같은 대표작들을 그리게 된다. 특히 최후의 만찬은 동작의 한순간을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순간 속에 담긴 동작을 묘사하는 것과 더불어, 레오나르도는 '모티 델라니마(moti dell'anima)', 즉 영혼의 동작을 전달하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는 '그림 속의 인물들은 관람객이 그들의 태도를 통해 그 의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려져야 한다"라고 했다. [최후의 만찬]은 이러한 금언이 잘 반영된,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생기 넘치는 작품이다." (P 363)

 

 

또 최후의 만찬은 당시의 최신의 기법이 적용된 그림이다. 그 기법을 소실점이다. 당시에는 막 원근법이 발전되기 시작했고, 레오라르도 다빈치는 소실점을 통해 그 원근법을 완성한다.

 

"[최후의 만찬]의 원근법에서 단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소실점이다.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모든 선이 모여드는 하나의 점'이라 했다. 이렇듯 멀어지는 선들은 예수의 이마를 향한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름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벽면 중앙에 작은 못을 박았다. 우리는 예수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뚫린 못 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방사선상으로 퍼지는 가느다란 선들을 벽면에 새겨 넣었다. 이것은 천장의 들보, 태피스트리 꼭대기 부분 등 가상의 방 안에서 서로 평행하는 직선을 잘 보여주고, 이 직선들은 점점 멀어지면서 그림 속 소실점으로 수렴한다." (P 368)

 

 

이 책을 읽으면서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이라는 팝 케스트를 통해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들었었다. 방송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창의성을 얻은 과정을 이야기하며 한국의 교육과정을 이야기한다. 한국을 비롯해 현대인들이 배우는 교육은 근대이후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동자와 군인 등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성보다는 주입식 암기 교육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다 보면 창의성이 사라지고, 현실에 주어진 일만 빠르고 능률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한국에서 교육을 받으면 천재도 평범한 사람이 된다고 한탄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학업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천재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창의성을 개발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트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창조성을 개발했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와 방식으로 정리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천쟁의 일생을 따라가는 전기가 아닌,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다루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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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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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EBS에서 방영한 [스페이스 레이스 (한국 방영 제목 : 우주전쟁)]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이 드라마는 미국과 소련이 우주 탐사선을 보내기까지의 경쟁에 대한 드라마였는데, 드라마의 시작 부분은 폰 브라운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오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로켓 부분의 개발은 주로 폰 브라운이 담당했고, 원자폭탄의 부분은 하이젠베르크가 담당했다. 미국의 동료 과학자는 하이젠베르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감시가 치밀한 하이젠베르크에게 치약에 메시지를 담아 전달한다. 치약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쪽지의 내용은 오로지 "E=MC2"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었다. 이 쪽지를 본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개발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깨닫고 핵무기 개발을 일부러 지연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그들이 맞딱드렸던 공포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이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예전의 드라마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은 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원자폭탄이 개발되는 과정을 마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과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경쟁하던 내용과 실제로 원자폭탄이 히로미와 나가사기에 떨어졌을 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개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발하고 충격을 받는 장면, 그리고 실제로 원자폭탄이 사용되었을 때 받은 충격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로 과학 역사를 다룬 책들이 딱딱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 책은 마치 대하드라마를 보듯이 원자폭탄의 개발과정의 흐름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여러 명의 과학자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이라면 단연 '오펜하이머'이다. 오펜하이머는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야 미국 핵무기 개발의 책임자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책임자로 임명된다. 한때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서 책임자로 임명되는데 어려움을 받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고 책임자로 임명된다. 이후 그들은 독일과의 경쟁을 통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 같은 독일의 양심적인 과학자들이 일부러 핵무기 개발을 지연시켰다고 말한다.

"공포 정치를 자행하는 독재 정권 하에서 독일의 핵물리학자들이 양심의 목소리에 따라 원자폭탄 제조를 막으려고 시도한 반면, 두려워할 만한 강요를 전혀 받지 않은 민주주의 국가의 동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무기 개발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사실은 역설처럼 보인다. (P 183)"

반면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개발을 합리화시킨다.

"만약 우리가 이 무기를 개발해 공개 실험을 통해 그 끔찍한 본질을 세상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조만간 다른 부도덕한 국가가 비밀리에 그것을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다. 미래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인류가 적어도 그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게 훨씬 낫다. (P 287)"

또 처음에는 원자력의 개발을 나름 평화적 목적에만 한정시키겠다는 의도도 보인다.

"인류는 우리가 발견하고 개발한 것과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래의 이것을 파괴적 목적이 아니라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 (P 287)"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정말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생각을 가졌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신들의 직면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힘 앞에 자신들의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런 말들을 했을까? 그들의 생각이 순진했다는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기 원자폭탄의 투하 이후에 발견되었다. 이 책에는 원자폭탄 투하 이후 과학자들이 느꼈던 죄책감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느꼈던 정신적인 혼란은 언급하고 있다.

"1945년 8월 6일은 아인슈타인과 프랑크, 실라르드, 라비노비치처럼 원자폭탄 사용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암울한 날이었다. 하지만 메사 위에 있던 사람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어쨌든 그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을 잊고 열심히 일했다. 이제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 이 최초의 순간에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러리라고 생각한 것처럼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무방비 상태의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고통을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한 일을 부끄러워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개인의 자부심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P 365)"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경쟁 과정, 더 나아가 소련과의 수소폭탄의 경쟁 과정은 더 충격적이다. 1952년에 실시된 태평양의 한 섬에서 실시된 수소폭탄의 실험의 끔찍함이 묘사되어 있다.

"태평양에 길이 1.6Km, 깊이 53m의 폭발 구덩이가 생겼다. 최초의 슈퍼에서 나온 불덩어리, 즉 지름이 5.6Kmsk 되는 돔 모양의 화염이 사라지고, 거대한 버섯 모양의 연기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자마자,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엘루겔라브 섬이 통째로 사라지란 것이다. TNT 3메가톤 (300만 톤)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방출된 그 폭발은 최초의 원자폭탄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상과 심지어 매니액의 계산마저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P 488)"

저자는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의 개발로 태양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지구에서 재현했다고 말한다. 그 후 소련 역시 수소폭탄을 개발하게 되고, 세계는 핵 전쟁의 위기에 빠져든다. 인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관심이 있는 부분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책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른 주장들이 많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 언급한 하이젠베르크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원자폭탄 개발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온 자료나 하이젠베르크와 대화를 나눈 스승인 유대인 학자인 보어 등의 증언을 통해 하이젠베르크는 최선을 다해 원자폭탄을 개발했고, 단지 미국보다 실력이 안 되어서 늦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어느 사실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히틀러가 죽기 전에 하이젠베르크가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오펜하이머가 V2 로켓을 개발했다면, 어쩌면 세계 최초의 피폭 국가는 일본이 아닌 미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니 끔찍하기까지 했다. 인류가 개발하고 있는 핵무기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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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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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프로이트가 전지전능한 인생의 해석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원인을 과거와 타인에게 돌린다. 내 모습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프로이트는 이렇게 위로한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과거의 탓이야!' '네가 비뚤어진 것은 모두 부모의 학대 때문이야!' '네 잘못이 아니니, 너를 학대할 필요 없어!' 인생의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프로이트는 잠시의 위로를 준다. 그러나 그렇게 프로이트와 친구가 되어 과거에만 얽매여 있다면 우리는 과연 앞으로 나갈 수가 있을까?

프로이트에 익숙한 한 젊은이가 늙은 철학자를 찾아온다. 이 젊은이는 자기혐오와 세상과 타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세상은 복잡하며, 인생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늙은 철학자는 세상은 단순하며 오늘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젊은이는 철학자에게 따지듯 질문하고, 철학자는 젊은이에게 차근차근 아들러의 심리학을 설명해 준다. 이것이 바로 기시마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의 내용이다. 이 책은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화 형식은 일반인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고 있다.

프로이트에게 친숙한 현대인에게는 아들러의 심리학은 다소 생소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한다. 먼저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다. 트라우마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트라우마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목적 때문에 트라우마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과거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빠져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를 포기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울타리 속에 칩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트라우마를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의 감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분노에 빠져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분노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허을 통해서 받은 충격 - 즉 트라우마 -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P 36)"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재.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안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P 37)"

이렇게 말하면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라는 개념 속에 숨어있던 사람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과거의 상처 나 타인의 잘못 때문이며 자기 책임을 회피하던 사람은 아들러의 심리학에 벌거벗은 것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아들러에 의미면 인생은 결국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들러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용기'이다. 익숙한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금 불현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 중략- 비유하자면 오래 탄 차를 운전하는 상태인 거네. 다소 덜거덕거려도 차의 상태를 고려해가며 몰면 되지.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몰라. 매리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다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P 62-3)"

이 용기에는 심지어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까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진정한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거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열등감 역시 타인의 시각에서 남과 타인을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P 186)"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P 187)"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원망의 옷으로 감추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았다. 책 속의 철학자와 대화하는 젊은이는 매번 소리를 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냐고. 그런데 이런 젊은이의 목소리가 읽는 동안 내 안에서 똑같이 울려 나온다. 그러나 젊은이가 점점 아들러의 심리학을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책임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듯이,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점점 아들러의 심리학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치 나를 얽매고 있던 것들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지나치게 세상이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꼭 읽도록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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