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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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드러나는 내러티브보다는 주인공의 의식을 쫓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기에, 처음부터 진득히 손에 들고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어느 부분 (특히 주인공이 클레어와 만나 함께 여행하는 부분)부터는 조금씩 쉽게 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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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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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스스로를 숨긴다. 주변 사람들은 이 여성이 납치되었거나 살해되었다고 생각한다. 신문 기자들과 방송국의 취재진들이 들이닥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스스로 사라진 여성이 어렸을 때부터 인기를 얻던 SNS 스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편을 의심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인기가 사그라지자, 여자 혼자 꾸민 자작극이었다. 영화화되어서 더 유명해진 길리안 플린의 [나를 찾아줘]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현대인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을 찾아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 실제 모습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실제 자기 자신은 찢기고 망가지고 있다. 우리가 진짜 찾아 나서야 할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그렇게 망가지고 찢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패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이유인지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히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소설은 한 남자가 자신을 떠난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내가 묵었던 호텔에서 아내의 짧은 편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P 11)

 

어떤 문장이나 글 속에는 실제 글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짧은 한 문장에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짧은 편지가 그렇다. 어찌 보면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짧은 글이지만, 이 글에는 두 부부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짧은 문장을 읽다 보면 마치 한 아이가 장미를 껴안고 그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섬뜩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과 유디트라고 이름하는 아내와의 사랑이 그랬다. 둘은 서로 사랑했다. 물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둘은 사랑하면서 할수록 더욱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멀리하지 못한다. 한순간도 상대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망가뜨리고, 스스로 망가져갔다. 그리고 아내 쪽에서 먼저 결단을 내린다. 남편을 떠나기로, 그런데 정말 아내는 남편을 떠났을까.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이 아내인 '유디트를' 찾아 미국을 횡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자는 아내가 묶었던 미국의 호텔들과 시골들을 돌아다니며 유디티를 쫓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매우 낯설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집 나간 아내를 찾는 과정을 보며 절실하다 못해 처절하다. 자신의 폭력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간 아내에게 한 번만 용서를 빌 기회를 얻기 위해 절실히 아내를 찾기도 하고,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간 아내에게 복수하겠다는 처절한 심정으로 아내를 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는 그 어떤 절실함과 처절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못 찾으면 말고.' '이것 말고 딱히 뭐 할 일도 없으니까!' 이런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는 아내가 묵었던 호텔을 전전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고 혼자 뉴욕의 거리를 걷기도 하고, 카페를 돌아다니기도 하며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마치 모든 것을 관조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나는 맥주 한 잔 가져와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커튼이 드리워진 좁은 문틈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좁은 만큼 바깥 광경은 외려 더욱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려 보이는 것이 마치 연기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들은 문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이리저리 산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가슴이 지금처럼 그렇게 예뻐 보이고 또 그렇게 유혹적으로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나는 즐거웠다." (P 43)

 

소설은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외면하고 마주하기 싫어했던 자신의 모습을 아내를 찾는 과정을 통해서 마주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먼저는 클레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주인공이 몇 년 전 우연히 미국에서 만났던 여성이다. 지금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 산다. 그는 클레어와 그녀의 아이와 동행하며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에게 유디트와의 가학적이었던 사랑을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로 표현하면서 그는 자신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내가 그녀를 때려죽일까 봐 두려웠어. 그 두려움은 현재 진형이었지. 한 번은 길거리에서 서로 목을 조른 적이 있어. 집에 돌아와서 반사적으로 손을 씻었지.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씻었지. -중략-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뒤에도 뛰쳐나가봤자 기껏 발코니였고, 그나마도 잠시뿐 곧 다시 방으로 들어가곤 했으니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어, 한 번은 컴컴한 데서 그녀를 때렸는데, 그때 곧바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끌어안은 채 아직 살아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지." (P 130)

 

두 번째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라는 책이다. 그는 아내를 찾으러 다니며 계속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는다. 이 책은 독일 고전소설로서 풍경화가 지망생인 하인리히라는 한 청년이 자연 속에서 자신을 치유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하인리히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면, 주인공은 뉴욕의 도시의 길거리와 미국의 농가의 풍경에서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디트를 만나게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유디트 앞에 더 이상 거짓된 모습이 아닌, 자신의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은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도 매우 간단하다. 주인공이 미국에서 아내를 찾는 과정이 전부이다. 그 과정에서 복잡한 일을 일어나거나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짧은 소설을 읽는데 거의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소설을 읽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주인공이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마치 숨기고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들춰내는 과정과 같아서 읽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또 나의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외면하고 덮고 싶은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알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 소설 속의 주인공이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으며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 책의 작가인 페터 한트케도 소설 속의 주인공이 느꼈던 그 감정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느끼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얼마 전부터 인스타그램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하기에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음 인스타를 하는 순간 현실과는 너무 다른 세계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 속에서는 모두가 화려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멋진 장소를 여행하고, 보기에도 먹음직한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들을 꾸미고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그들의 실제 모습이었을까. 전부는 아니어도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실제로는 상처 입고 찢기고 고통 당하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화려한 모습만 인스타를 통해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점점 시대의 문화가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쩌면 우리도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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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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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남쪽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어린 시절 살던 시골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이미 떠난 지 30 년이 되어서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그 마을을 찾아갔다. 뉴스에서만 보았는데, 실제로 시골마을에 들어서니 빈집이 많았다. 마치 사람들이 떠난 폐허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 한 명 마주치지 않고 마을을 걸어서 마을 끝에 있는 뒷산과 맞닿아 있는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 이르렀다. 사람 키가 넘는 잡초들 사이에 무너진 집터만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영상통화를 했다. 영상으로 잡초가 우거진 우리가 살던 집과 주변을 보여 드렸다. 이것저것 묻던 어머니가 갑자기 말이 없으셨다. 우시는 것 같았다.

 

빚으로 쫓겨나듯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면 밤늦도록 언덕 위의 집에서 아랫마을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롭고 쓸쓸했을 법도 한데, 그때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무언가 기다림으로 인해 희망 비슷한 것들이 있었나 보다. 어린 시절 그곳을 떠난 후 여러 번의 이사를 다녔지만, 이상하게 어린 시절 가족과 관련된 꿈을 꿀 때면 꼭 그 집이 배경으로 나온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기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그 초라한 집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꿈을 꾸었나 보다. 그리고 그 꿈들이 나를 이끌고 여기까지 걸어오게 했는지도 모른다. 굽이굽이 인생의 골목에서 때로는 주저앉고 싶을 때, 그때에 가졌던 감정들이 나를 다음 골목까지 걸어갈 힘을 주지는 않았을까.

 

한지혜 작가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며 다시금 어린 시절 그 집을 생각했다. 저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과 묘하게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항상 일을 나가시던 부모님. 빚쟁이에 쫓겨 숨으시던 어머니. 집으로 올라가던 어둡고 누추했던 길. 쥐가 나오는 어두운 다락방이 있는 집. 그리고 그 다락방 속에서 동화와 세계문학전집들을 읽는 경험까지. 내 인생의 여러 부분과 닮아 있었다. 그 후에 이어지는 세상의 차가움과 맞닥뜨렸던 20대 시절. 퇴사와 함께 삭막한 세상 속에 던져졌던 30대 시절. 그리고 힘겨운 결혼 생활까지. 모든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차갑고 삭막한 세상을 마주하며 걸어간다. 외면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그 시절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저자의 인생관은 어렸을 때 그 어둡던 다락방에서 책을 읽던 시기에 이미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저자가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읽은 동화는 이중홍 작가의 [못나도 울 엄마]라는 동화이다. [못나도 울 엄마]는 밖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당하는 어린아이의 엄마가 실제로 늙고 미치고 가난한 노파일 수도 있다는 내용의 동화이다. 이 동화를 통해 저자는 동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들어선다.

 

"아마도 착하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그 동화는 그러나 내가 이제까지 읽은 적 없던 잔혹동화였다.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은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흔한 놀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놀림에 속상해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놀림이 진실이기를, 내게 다른 부모가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부모는 지긋지긋한 가난 대신 넓은 집과 예쁜 옷을 주는 부모일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언제고 부자 엄마나 부자 아빠가 찾아오면 크게 좋아하는 내색 없이 적당히 아쉽고 슬픈 척 지금의 가난한 부모와 헤어지리라 다짐했다. 내가 믿고 따르던 동화의 세계도 늘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런 내게 [못나도 울 엄마]는 현실이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P 30)

 

저자는 그렇게 차갑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길들을 걸어간다. 그냥 어쩔 수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차가운 인생길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따스한 눈을 느끼며 걸어간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참 괜찮은 눈이 온다]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살아왔던 인생길들을 '골목'으로 표현하며 그 골목에서 마주했던 풍경들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대학 졸업 후 힘들게 했던 취직과 막막했던 퇴사의 과정. 결혼 후 자녀를 키우면서 놓지 않았던 글쓰기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지금의 시대를 자신과 같이 힘겹게 걸어가고 사람들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는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가 걸었던 골목들은 [못나도 울 엄마]의 동화 속에 나오는 냉혹한 현실의 세계였다. 작가의 말대로 잔혹한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골목들의 바닥을 움켜쥐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간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물의 삶 같지만, 실은 한자리에 꽂혀 한자리에서 늙어가는 식물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수명 다한 식물을 뽑아내다 보면 흙 위에서 어떤 꽃을 피웠고 어떻게 시들었든 한결같이 넓고 깊은 흙을 움켜쥐고 있다.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도 열매도 실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마음이 정체될 때, 옴짝달싹할 수 없게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 낮고 낮은 삶 사는 우리에게 부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P 182)

 

독서의 경험 중에서 특히 에세이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저자의 살아온 인생과 그 인생을 살아온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특히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작가일수록 그가 쓴 에세이에는 인생의 묵직함이 담겨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때로는 소소한 이야기 속에, 때로는 삶의 깨달음 속에, 인생의 차가운 골목을 걸어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특유의 글의 향기가 난다. 그것이 이 책에서는 작가가 골목에서 맞는 눈의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동화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동화이다. 이 동화 속에서는 하나님이 천사에게 차가운 겨울날 쌍둥이 소녀의 어머니를 데려 오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이 명령이 너무나도 잔혹하다고 생각해서 천사는 거부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천사를 세상에 던져 둔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깨달을 때까지 하늘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 오랜 기간 천사는 세상 살이를 하면서 인생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때 고아가 된 쌍둥이를 돌보고 있는 한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들 어려운 시기라고 말한다. 길가 상가에는 퇴직 후 마지막 재산을 털어 넣었던 자영업자들이 자신의 가계에 폐업이라는 푯말이 붙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냉혹한 경쟁 속에 내 몰려 치열하게 공부를 마친 사람들은 막상 아무 곳에도 취직하고 길거리로 나오고 있다. 경쟁 속에서 밀리고 짓밟힌 사람들이 차가운 거리에서 눈을 맞고 있다. 이들이 살아가는 골목에서 다음 골목까지 넘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혹하지 않을까. 그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한 순간 느끼는 따스한 눈.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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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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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나이가 들수록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따스한 분은 아니셨다. 그래도 내게는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분이셨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세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더 나아가 세상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의 관계들이 하나의 단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관계들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나면, 다른 모든 감정들은 사라지고 단순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지면 자기중심적이 되고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계급 갈등, 지역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어려운 것은 이런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사의 감정을 아주 묘한 필치와 세련된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가 있다. SF 작가로는 드물게 흑인이며, 또한 여성인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세계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있다. 그중 계속 소장하면서 읽고 있는 시리즈가 비채 출판사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실력을 인정받은 해외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이다. 이미 단편집인 [블러드 차일드]와 장편소설인 [킨]이 출간되었고, 얼마 전 [와이들 시드]가 출간되었다. 항상 그렇듯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은 환상적이면서도 묘하다. 어떻게 보면 뒤틀려 있는 듯한 괴상한 세계와 그 세계 속의 관계들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필립 K, 딕과 어느 부분에서는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와이들 시드]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의 '도로'라는 존재는 타인의 육체를 바꾸어가며 4천 년간 생명을 이어가는 불사의 존재이다. 도로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손들을 퍼뜨렸고, 이제 이 자손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이주시키면 새로운 종족을 만들고 있다. 그의 목적으로 오로지 자손들의 번식을 통해 강한 능력을 가진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도로가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오지의 부족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300년 동안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야낭우라는 늙은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불사의 몸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치유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육체를 바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숨긴 채 자신의 부족 속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늙어 가는 육신은 타인을 속이는 방법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20살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감추고 있었다. 도로는 이런 야낭우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야낭우 역시 도로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막강한 힘을 느낀다. 도로는 야낭우에게 자신을 따라오고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그녀는 도로의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그에게 저항해 본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쪽으로 빠지는군, 나는 여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 도로. 명령하는 남편은 이미 열 명이나 겪어봤어. 당신을 열한 번째 남편으로 맞이할 이유가 있을까? 거절하면 나를 죽일 거라서? 당신 고향에서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아내를 맞이하나? 죽이겠따고 협박해서? 글쎄, 어쩌면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디 한번 확인해볼까?" (P 48)

 

그럼에도 야낭우는 도로가 사신의 자손들을 죽인다는 협박과 자신에게 죽지 않는 아들을 낳아준다는 유혹에 빠져 그를 따라나선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도로이지만 야낭우의 야생성을 다루기에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도로는 야낭우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이 도로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 된다. 야낭우를 복종시키거나 죽여야 하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

 

"그녀는 돌아서서 도로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뒤따르며 최대한 빨리 아이를 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반항하지도 못할 테고, 독립심은 사라질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죽이기에는 너무 귀중한 존재이지만 후손을 납치했다가는 분명히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보 하는 갓난아기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격리되어 있으면 결국 복종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P 62)

 

도로와 야낭우는 함께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바다에 이르러 도로에게 속해있는 노예선을 타고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도로가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는 한마을에 정착을 한다. 도로는 그곳에서 야낭우를 자신의 아들인 아이작과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아이작은 도로의 아들로 신비한 능력은 있지만, 도로와 야낭우처럼 불사의 존재는 아니다. 결국 아이작은 죽고, 도로와 야낭우는 다시 만난다. 야낭우는 도로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라져 가는 인간성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도로 역시 야낭우가 절실하다. 둘에게는 세월의 시간만큼의 적대감이 있지만, 또한 둘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고 대등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는 전혀 접해 보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SF 소설이라고 정의하기도 힘들고, 판타지 소설이라고도 정의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은 살육과 지배욕의 화신인 도로라는 존재와 생명과 치유의 존재인 야낭우라는 존재의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힘들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과의 관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적대적인 관계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또 다른 단편소설인 [블러드 차일드]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외계종에게 지배를 당한다. 외계종은 인간 아이를 양육하고 키우고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그 외계종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도 아닌, 증오의 관계도 아닌 묘한 관계를 이룬다. 마치 도로와 야낭우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미국사회에서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또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가 속했던 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마치 암호문처럼 자신의 소설에 특별난 존재와 특이한 관계 속에서 펼쳐 놓치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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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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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이 항상 실재 상황이고, 내가 기억하는 것이 항상 진실이라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 놓이고 이로 인해 몸이 아프거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압박을 받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땐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잘못 봤나 보다!' '그땐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왜곡되게 생각했나 보다!'라고 넘길 때가 많다. 심지어 주변 사람까지 그렇게 말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본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할까.

 

[우먼 인 윈도] 속의 여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광장공포증'을 겪고 있는 '애나'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한때 잘나가는 소아 정신과 의사였지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직 혼자 집 안에 갇혀서 창문으로만 세상을 내다본다. 남편과 딸아이와도 별거 중이어서 오직 전화로만 대화한다. (사실은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부분은 나중에 밝혀진다) 하루 종일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오직 니콘 카메라의 망원 렌즈를 통해서 이웃집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바깥세상과의 통로이다. 때로는 인터넷의 SNS를 통해 이웃들을 들여다본다.(이것 역시 가상 공간이라는 의미나 빼면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하루 종일 혼자서 스릴러 고전영화를 보고 의사가 준 여러 가지 약물을 절대로 함께 먹지 말라는 술과 함께 여러 신경안정제들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가 생긴다. 이웃집에 이사 온 알리스타 러셀과 제인 러셀의 가정을 반듯한 소년인 이선이라는 아이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집에 이사 선물을 전해 주러 왔다가 그녀와 대화를 한다. 이선은 대화 중에 친구들과 떨어져 먼 곳으로 혼자 왔다며 갑자기 외로움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그런 이선에게 잃어버렸던 정신과 의사로 직업의식과 함께 모성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따스하게 대한다. 얼마 후 이선의 어머니인 제인 러셀도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병이 발병한 후 처음으로 타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히 러셀의 집의 창문을 보다가 제인이 칼에 찔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급하게 911에 신고를 하고 제인을 살리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광장 공포증으로 인해 순간 정신을 잃게 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의사와 형사, 그리고 이웃집의 러셀과 아들 이선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분명히 칼에 찔린 것을 보았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알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으로 판명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헛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장공포증으로 신경 안정제와 여러 가지 약물을 와인과 함께 먹으며 하루 종일 고전 스릴러를 보는 여자가 본 것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그녀도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게 된다.

 

"락트인 증후군 원인으로는 뇌졸중, 뇌간 상, 다발성경화증, 독극물 등이 있다. 신경학적 증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과적인 증상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말 그대로 감금되어 있다. 문은 잠겼고, 창문은 닫혀 있다. 빛이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공원 건너편에서는 한 여자가 칼에 찔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암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나를 제외하고는. 가족과 별거 중인 데다, 술에 절어 세입자와 섹스를 해대는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웃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형사들은 농담하는 줄 안다. 의사는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물리치료사는 나를 그저 가여운 사람으로 여긴다. 갇혀 있는 여자, 영웅도 탐정도 아니다. 나는 갇혀 있다. 세상 밖에." P 338

 

이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40주 동안 베스트셀러로 1위를 한 작품이다. 게리 올드먼과 같은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어서 곧 개봉할 예정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은 현대인의 심리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잔혹한 환경에 의해 상처받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가두어 두고 있는 현대인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내가 쇼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쇼크는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움은 변형되어 공포가 괴었다. 그리고 필딩 박사가 등장할 때쯤, 나는 극심한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박사는 그렇게 간단하고 효율적인 단어로 내 상태를 표시했다. 나는 이 집이 제공하는 익숙한 경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저 거대한 하늘 아래에서, 외계의 야만의 땅에서 이틀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P 456

 

소설을 읽는 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술과 약물,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한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내 안에도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적인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악마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비록 내가 환상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나란 존재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 자신이 존재하며, 그 존재만큼은 진실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보고 있는 것도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며 결국 나마저 나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봤다.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라고, 그럼에도 내가 나만은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마저 나 자신을 믿지 못힌디면 결국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아의 붕괴일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본 것을 믿었다. 남들이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가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정말 그녀가 본 것이 진실이었을까. 궁금한 사람은 소설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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