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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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얻는 유익 중에 하나는 소설의 시대와 장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화려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사교계와 조국전쟁으로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처참한 모스크바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는 어둡고 음침한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라스꼴리노코프와 걷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으면서는 치열했던 한국사의 골짜기들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쉽게도 현대 소설에서는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해외 뉴스로만 접하던 역사의 격동기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소설을 만났다. 엘리 스미스의 [가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연작소설이다. 사계절을 나타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소설로 네 편의 소설이 연작으로 발간되었고, 특이하게 [가을]이라는 제목이 첫 권이다. 소설의 시작은 영국 해변가로 떠내려 온 시체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미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만, 생기 넘치는 소녀들의 놀이를 감상하며 잠시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잊기도 한다. 어머니의 품에서의 따스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무슨 소설의 시작이 이럴까?라고 생각하지만, 곧이어 앞의 내용과는 전혀 단절된 것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 바로 본 시대는 브렉시티 투표가 가결된 바로 직후의 상황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민 여성인 어머니와 단둘이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역시 힘겨운 삶을 사고 있다. 그나마 아스 아슬하게 유지되던 삶이 브렉시티 이후 더욱 냉혹한 차별에 던져지게 된다.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 이민 가족의 후예인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당시의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정을 배제한 체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사는 마을의 하이 거리에는 엶 축에를 알리는 깃발이 내걸렸다. 빨간색, 흰색, 파란색의 비닐 조각들이 찌푸린 하늘에 걸려 있다. 당장 비가 내리지는 않고 도로도 말라 있지만 삼각형 비닐 조각들이 맞부딪치게 하는 바람 때문에 하이 거리에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마을의 분위기도 음울하다. 엘리자베스는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을 지나친가. 분에서 시작해 위쪽 창까지 전면에 '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글자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P 72-3)

 

이런 혼란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권을 갱신하려고 한다. 사소한 행정착오와 행정 직원의 냉대, 그리고 여권이나 신분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가 부딪히는 영국의 관료 사회의 냉대는 마치 내가 그런 냉대를 받는 듯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종잇조각 한 장이 대체 멀 증명할 수 있다는 거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접수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깐 실례하겠다면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수화기에 손을 대고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적절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도록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뒤로 작은 줄이 이어져 있다. 모두 이 접수원을 통해 수속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P 139)

 

소설은 엘리자베스가 겪는 영국 사회의 냉대와 함께 어린 시절 경험했던 대니얼이라는 남성의 따스한 교류의 기억이 교차에서 진행된다. 젊은 시절 많은 예술가와 교제하면서 예술과 인문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대니얼은 나이가 들어 우연히 옆집에 살았던 어린 엘리자베스와 우정을 이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통해 예술과 인문에 대한 지식을 경험하고 그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처음 강변에 떠밀려 와 죽은 시체의 시선으로 영국 사회를 보듯이, 영국 사회에서 냉대를 받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때나마 자신에게 따스한 감정을 주었던 대니얼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엘리자베스 안에, 그리고 영국 사회 안에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을 인간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남기기도 한다.

 

이 소설은 특정한 스토리보다 엘리자베스의 의식과 시선을 따라 이어지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직접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관공서나 도서관, 병원 등에서 당하는 차별 등을 마치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소설의 읽는 사람을 엘리자베스가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실 오랜 시간 뉴스를 통해 영국의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 상황을 보면서 그 사태에 대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브렉시티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 영국 사회의 결정이 다소 이해가 되곤 했다. 수없이 밀려드는 난민과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의 사회와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게도 느껴 지다가도,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지지도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한심하게도 느껴지도 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일까? 이 책은 이런 혼란 상황을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온 나라에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폭풍에 송전선이 철탑을 부러뜨리고 나무와 지붕과 차량들이 위의 상공을 지져 대듯 그 사건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패배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 사람들은 구굴에서 '유럽 연합이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정당화되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실감과 충격을 느겼다." (P 78-9)

 

이런 묘사와 함께 어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따스했던 감정의 교류의 장면들을 묘사하며 아직 영국 사회에 남아 있을 인간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소설의 말미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대니얼이 의식을 찾는 장면을 묘사하며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의 영국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간접 체험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과연 이것이 영국 사회만의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 역시 최근 들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과 정치, 남녀 편을 가르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대신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처럼 전혀 다른 상황의 사람들과의 따스한 교류는 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는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다리까지 부수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브렉시티의 혼란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해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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