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글에서 '주체'라는 단어와 함께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구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조주의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마르크스적 용어)이나 사회, 언어나 의식구조 등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회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채오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P 27

비록 구조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런 구조주의의 시작을 마르크스에게서 보는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왜곡된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의식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 있고, 이런 이데올로기를 깨는 방법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의 국가체제나 경제체제가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끌려 가고 있다가,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알튀세(알튀세르)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가 군대나 학교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이론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호명'모델이다. 내가 경찰이나 누군가에서 호명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즉시 나도 모르게 그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알튀세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이 이론이 이데올로기의 전부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페테 슬로다익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슬로터다익은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조정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냉소적인 주체'라고 한다. 지젝은 이 슬로터다익의 사상을 이어받는다.

"슬로터다익과 지젝이 주장하는 바는 이런 냉소가 이미 공식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냉소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냉소주의적 주체는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전망이 이미 왜곡되어 있다는 것, 그런 왜곡된 전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29

지젝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 믿음은 생각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의 믿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돈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제젝을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이것을 그는 이렇게 인간이 그렇다면 인간은 이 이데올로기 체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순전히 이원론적인 방법이 아닌, 삼원론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이원론적인 방법은 이데올로기와 현실을 이원론으로 나누지만, 삼원론적인 방법은 현실에서 상징계로 인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실재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것을 상징계 내부의 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유령이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화되지 않은 실재계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런 유령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이야기함으로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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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탈근대성'이란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근대성이 추구한 거대서사(거대담론)과 대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도 불리는데, 탈근대성은 사회-역사적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문화적 반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위험사회 이론'에서 시작된다. 그는 산업화로 인해 세상이 여러 가지 위험요소에 처해 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더 알지 못하는 위험요소가 생긴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현상은 세상을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대서사나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탈근대는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종말로 설명된다. 거대서사란 모든 삶과 사물의 총체성을 해명하고자 하는 해석 혹은 서사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인데, 리오타르는 (다른 거대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거부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보편성을 위해 삶의 구체성과 사물들의 개별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비판 철학자들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나?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을 썼다. 이 책에서 지젝은 리오타르 등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 굴복했다고 비판한다."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03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제조된 위험', '자귀재귀적인 올가미', '재귀성'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또는 '우리는 우리가 짠 거미줄에 걸려 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지젝은 탈근대적 시대 이전에는 대타자의 존재를 믿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믿는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 상황을 우화에서 벌거벗은 왕을 옷을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백성들의 시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비교를 통해 지젝은, 우리가 모두 실재 너무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부인을 '마치 ~인 것처럼'이란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 마치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판사 앞에 섰을 때에 그 판사가 무식한 늙은이가 아닌 것처럼, 마치 그 판사가 법이 연명되는 통로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충실한 시민으로 남기 위해 실제로 새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닌 것처럼 해동한다." (P 103-4)

"그래서 대타자는 우리가 모두 개별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사기 또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모두 왕이 (실재계에서)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상징계에서) 새 옷을 입고 있다는 기만에 동의한다. 그래서 지젝이 '태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의 '재귀성'으로 특징지어진 새로운 탈근대란 시대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왕이 옷을 입었다고 믿지 않음을 뜻한다." (P 104)

지젝의 대타자에 대한 설명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상징적 효력이라는 단어이다. 대타자가 상징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타자와 대타자의 시선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력의 효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유명한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영하 작가의 '옥수수와 나'라는 작품에도 언급된 이야기이다)

"상징적 효력'이란, 어떤 사실이 진실이 되려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사실이 대타자에게도 알려졌음을 알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지젝은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미친 사람에 관한 농담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치료가 끝나서 퇴원했다가 다시 병원을 찾은 사람은, 집에서 닭을 만났는데 그놈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의사가 화를 버럭 내며 당신은 인간이지 낟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 닭도 그것을 알까요?'라고 대답한다." (P 104)

탈근대화 시대에는 점점 이런 상징적 효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젝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가 오히려 인간을 스스로 억압하게 된다고 본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반대하고 스스로를 피지배 아래에 놓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타자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형국이다. 지젝은 이것을 '탈근대성의 역설'이나 '타자의 귀환'또는 '규제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탈근대성이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가 실제로는 어떤 부정으로 다가와 규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습관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 유사하다. 헤겔에게 습관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반응의 하나로, 이 반응은 세부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더 심오한 문제에 참여하게 한다." (P 113)

또한 이러한 대타자에 대한 부정은 또 다른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다.

"이렇듯 작은 대타자의 구성 외에, 대타자의 붕괴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은 진짜 실재 속에 존재하는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실재 속에 타자'에게 라캉 정신분석학이 붙인 명칭은 '타자의 타자'이다. 타자에 타자에 대한 믿음, 즉 실제로 배후에서 사회를 조정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존재는 편집증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P 114)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상황의 틀을 깨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현상황의 틀을 깬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젝에 따르면, 탈근대적 주체의 곤경을 해결하려면 탈근대의 가능 조건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이런 곤경들의 의미를 갖는 지평 혹은 상징계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 정치적 행위는 곧 혁명이다. 물론 행위의 속성상 혁명 이후에 어떤 세상이 나타날지는 말할 수 없다. 일부 비판가들이 지젝의 사유를 모호하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시점에서 지젝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오직 좀 더 나은 세계, 자신의 향락에 점령당하고 오직 노예 상태 속에서만 쾌락을 발견하는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열리리라는 희망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자본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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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분노나 경악을 넘어 충격에 빠지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자신이 알지 못한 세상 속에 던져진 느낌이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황을 보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위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의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를 단순한 SF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았다. 영화 초반부터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다.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경찰관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주변의 현상들이 왜곡되며, 무언가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결정적으로 모피어스라는 인물을 만나며 네오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모피어스는 레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민다. 빨간약을 먹으면 그동안의 이상한 일들은 모두 잊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파란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을 접하게 된다. 결국 레오는 파란약을 먹게 된다. 그리고 레오가 매트릭스의 기계 안에서 깨어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수많은 인간들이 벌거벗은 채 매트릭스라는 기계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장치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보는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으며 그들이 믿는 현실에 순응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레오와 함께 자신들이 믿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을 함께 접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충격이 이와 같지 않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선진적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도 아니었다. 봉건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매트릭스와 같은 거대한 무속신앙의 지배를 지도자와 국민이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미리 예견하고 지적한 책이 있다.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실질적으로 시민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대적인 이성이 아닌, 기복제화(祈福除禍)의 무속신앙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무속문화는 생산력의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도를 더해가는 경향이 보인다. 그 원인이 아마도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기복제화의 쾌락주의적 무속문화 간에 어떤 친화력이 작용하는 데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 숭배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인식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현세적이며, 초월적 존재나 이념의 세계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성을 넘은 절대적 윤리 규범은 상상될 수도 없다. 오로지 쾌와 불쾌가 도덕 기준이 될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세속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무속신앙과 상통하면서 외래의 상품 숭배와 토속의 물신 숭배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징이 되어버린 셈이다." 차인석, [근대성과 자아의식] (아카넷, 2016) P 29

 

여기서 저자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무속신앙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를 자본주의와 무속신화의 '친화력'에서 보았다. 즉 우리들 마음속에는 기복제화에 맹신하는 무속신앙적 사고가 남아있고,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처럼 현대 자본주의에 열광하는 이유가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물신숭배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석은 우리와는 다른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에도 적용이 된다. 중국 학자인 '리쩌허우'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그나마 이택후라는 이름으로 그의 중국 미학 사상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란 책에서 중국의 사회주의 과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상으로 중국 사회처럼 최단 시간에 그토록 광범위한 지역이 사회주의화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사회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사회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사회를 경험하지도 못한 채 급속이 사회주의화가 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몇 천년 동안 중국 시민 속에 있었던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사상과 음양사상 등을 유물론과 변증법에 비교한다.

 

"그러나 중국 근대에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의 전제가 없었으며, 기나긴 봉건사회와 반식민, 반봉건 사회 이후 곧바로 사회주의가 들어섰고, 따라서 사회의 정치, 경제적 구조에서건 사람들의 문화심리구조면에서건 결코 자본주의의 세례를 거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또한 기나긴 봉건사회가 낳은 사회, 심리구조가 자본주의사회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 의해 결코 파괴되지 않았으며, 날은 습관, 세력과 관념, 사상이 여전히 완고하게 존속되면서 심지어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싶은 곳에까지 침투해 있었다는 점을 얘기해 준다. 그것들이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라는 옷을 입고,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목 아래, '문화대혁명'에서나 심지어는 그 이전에 각종 복벽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 이택후,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 (지식산업사) P 49

 

지금의 현상황은 지도자나 지도자의 측근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우리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무속신앙과 비합리적인 물신숭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지식의 전당이라는 대학교에서 축제 때마다 굿판이 벌어지고 있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고사상을 차리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선거때마다 묏자리를 보러 다니고 있다. 심지어 여러 종교에서 그 종교의 교리와는 다르게 이런 기복제화의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런 무속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입신양명과 물질적인 복이다. 그를 위해서는 도덕이나 정의도 모든 차후의 문제가 된다. 그것이 마치 거대한 매트릭스 기계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의식이 국정 농단의 핵심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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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을 읽을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주체'라는 단어이다. 지젝의 책을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주체'나 '주체화'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해서 독해가 방해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젝에게서 '주체'란 무엇인가?

지젝이 말하는 주체를 알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코키토(cogito)'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통해 지금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어쩌면 악마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록 악마가 자신을 속일지라도, 속임의 대상이고 생각의 주체인 자신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그래서 나온 명제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근대철학이 바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코키토'에게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탈구조주의 이르러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의 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반면 지젝은 이 데카르트의 '코키토'를 계승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 하이데거주의자, 인지과학자, 생태주의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페미니스들은 한결같이 '코키토'로 알려진 데카르트적 주체를 현대적 사유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이들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지젝의 비판적 사유에 매료된 사람들은, 지젝이 학계의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데카르트적 주체 모델을 받아들이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1



 

현대 사상가들이 '코키토'를 반대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가 외부 세계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함의 상태이다. 그 완전함은 어떤 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의 주된 결함 역시 아무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의지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달리 말해, 개인에게 은총으로 보였던 모든 것들은 또한 불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개인은 전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기 책임 아래 있으며, 자기 통제에 따른다. 객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5



 

탈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주체를 부정하고, 주체는 외부 세계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 반면, 탈구조주의자들은 주체적 생각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지젝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완전한 주체의 존재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주체는 외부의 영향들을 자신 안에서 통합해가며 새로운 생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 과정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설명한다.



 

"지젝은 이 영화 속 인조인간들이 지닌 위상을 들어, 우리 인간이 탈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힘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화 속 인조인간들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주입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 신화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의 요소들을 개별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93

 

 

 

결국 지젝에게 있어서 주체화란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과 자기만의 생각이 통합되는 자기화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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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쓴 책을 읽다가 난해함에 혀를 내두르고, 그에 대한 쉬운 인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지젝의 인문서로 가장 잘 알려진 영국 학자 토니 마이어스가 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책이다. 문제는 인문서도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몇 편에 걸쳐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주제는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세 명의 사상가인 헤겔, 마르크스, 라캉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과 마르크스, 라캉의 사상으로 현대문화와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한다. 문제는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 나름대로 한 번 더 이들의 이론을 비틀어서 사용하고 있다.

먼저 헤겔의 이론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이야기하는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더 나은 통합을 이끌어 가는 과정이다. 헤겔은 관념이 이렇게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지젝은 여기서 통합보다는 '테제'에 반대되는 '안티테제'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모순의 존재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헤겔 본인 시대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독창적으로 헤겔을 읽는다. 지젝에게 헤겔과 그의 변증법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인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이 명제를 통해 헤겔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6



 

결국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모순된 관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순된 관념이 있기에 모순되지 않는 관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의 정치학이다. 마르크스는 문화나 정치를 이루는 상부구조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하부구조, 또 다른 용어로 토대(base)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지젝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헤겔의 변증법이 지젝에게는 이데올로기 비판에 필요한 분석 도구를 제공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그런 분석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서, 지젝은 자신의 작업을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원하도록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로 간주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9



 

마지막으로는 가장 난해한 라캉이다. 이 부분이 지젝이라는 철학자를 가장 특색 있고 매력 있게 만들어 주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라캉의 난해함이 지젝의 철학을 더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이어받아, 심리학을 통해 사회 전반을 해석한다.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영역을 이야기한다.

상상계는 불완전한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완전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라캉은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상계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좇아가던 자아가 언어와 상징의 세계를 만나면서, 이를 통해 상상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라캉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언어나 상징을 통해 규정하기보다는 언어가 이런 것들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나 사회가 만든 언어나 상징 속에서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계는 이런 언어의 상징계에 갇힌 자아가 원래 존재하는 실체를 좇아가는 것이다. 라캉은 실재계를 상징계에 의해 난도 당하기 전에 온전한 모습이라고 했다.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이 호칭은 지젝이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유럽 각국의 화장실 디자인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영화 등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 확장하고 자기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젝의 작업에 개성을 부여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지젝이 국제적인 비평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66



 

사실 이런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라캉의 이론이 어떻게 지젝에게서 펼쳐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더 쉽지 않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지젝의 책을 더 읽어가며 발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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