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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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이사로 인해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학교별 학력에 대한 경쟁이 매우 심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보고 모의고사별로 학교별 성적을 발표했다. 당연히 학교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것은 다시 반별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시험기간만 되면 담임선생님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교롭게도 내가 전학이 온 날이 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성적이 많이 떨어져 반 평균을 갉아먹었다는 학생들의 명단을 불렀다. 몇 명이 불려 나왔다.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게 했다. 그리고 알몸으로 엎드리게 하고 매를 때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수치와 함께 공포를 느꼈다. 나도 저렇게 친구들 앞에서 발가벗겨져서 매를 맞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으로 인해 중학교 내내 수치와 공포감으로 공부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면 그때의 수치와 공포가 다시금 되살아난다.

한동안 잊혔다고 생각하던 이 기억이 J.M 쿳시의 [야만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쿳시라는 위대한 소설가를 나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소년 시절]로 처음 만났다. 이 책에는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아프리카너로 태어난 쿳시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담겨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쿳시를 지배했던 감정이 바로 '수치감'이었다. 그는 학교의 폭력 앞에서도 매를 맞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폭력 앞에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수치스러워 말을 잘 듣는 학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폭력적인 세상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수치감은 그의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진다.

[야만을 기다리며]에서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치안판사'의 의식의 변화를 보면 마치 쿳시의 어린 시절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국의 변경이다. 그곳은 아프리카가 될 수도 있고, 동남아시아나 남아메리카와 같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제국의 주체가 백인이고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야만인이 흑인이라는 설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남아프리카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배경들이 떠올린다. 소설의 주인공 치안판사는 이곳 제국의 변경의 성에서 30년 가까이 지배자의 역할을 해 왔다. 지배자라고 해서 특별히 야만인들을 억압하거나 학대하지는 않고 그저 질서를 유지할 정도로 통치를 할 뿐이다. 그의 낡은 직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몸을 파는 그 지역의 여성들이나 야만인 여성에게 성적 향락을 제공받고, 가끔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며 일몰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누리는 통치권력의 전부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이 조용히 마감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일에 얽혀들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기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여기에 있는 유일한 관리인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 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P 18)

주인공의 이런 안락한 삶은 '졸 대령'이라고 부르는 비상 지휘권을 가진 인물이 오면서 깨어진다. 졸은 제국 변경에서 야만인들이 서로 연합해서 대규모 반란을 획책한다는 첩보로 인해 제국이 파견한 군인이다. 그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며 야만인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 망상은 주인공이 보기에는 망상이지만, 모든 제국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는 이런 생각에 담겨 있는 제국의 사람들의 교묘한 심리를 어렴풋이 느낀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 꼭 야만인들에게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경에 사는 여자치고 침대 밑에서 야만인의 시커먼 손이 뿔 쑥 나와 발목을 잡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남자치고 야만인들이 집에 쳐들어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법석을 떨고, 접시를 깨뜨리며 커튼에 불을 지르고 자기 딸을 강간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P 19)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졸 대령이 하는 행동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졸 대형은 여행을 하다가 약탈범으로 오해되어 온 할아버지와 아이를 고문하고, 할아버지를 죽게 한다. 또 야만인을 원정한다며 군대를 끌고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야만인들을 끌고온다. 그리고 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다. 치안판사는 이 모든 일이 불편하지만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야만인들의 비명을 애써 외면한다.

"나는 민간인 치안판사가 보통 쓰게 되어 있는,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는 멋진 주택을 마다하고 수년 동안 이곳에서 찾아온 적 없는 군사 지휘관을 위해 마련해둔 창고와 부엌 바로 위에 위치한 어수선한 거처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살면서 불편한 점을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아래 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귀를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뜰은 이제 영구적으로 감옥이 된 듯 보인다.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 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 38)

다행히 졸 대령은 곧 본국의 소환을 받아 떠나고 치안판사는 다시 평안한 일상을 회복한다. 그러나 우연히 길거리에서 졸 대령에게 끌려와 아버지를 고문당해 잃고 고아가 된 여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눈이 멀고, 다리를 절며, 구걸을 한다. 그는 졸 대령이 그녀에게 표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 표시가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결국 그는 먼 거리를 여행에 그녀를 고향에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다시 돌아온 졸 대령에게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쓴다.

이제 주인공에게 평온한 나날은 없다. 그는 야만인처럼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졸 대령의 야만인이 일으킬 전쟁에 대한 광기는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야만인들을 잡아 오고, 더 많은 야만인들을 고문하고, 그들을 살해한다. 치안판사를 이 일을 말리다가 결국 야만인과 같은 수치와 고문을 당한다. 그는 발거벗겨지고, 사람들이 침을 뱉고, 그를 때리고 놀린다. 그리고 지배자에서 거렁뱅이 노인이 된다.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흐름은 제국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야만인을 대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의 목소리를 통해 제국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떤 비열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들춰낸다. 제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야만인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야만인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야만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맞설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국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러기에 제국은 끊임없이 야만인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고, 그 공포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 공포를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사람이 바로 졸 대령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치안판사는 졸 대령의 맞은편에서 선 정의로운 사람일까? 저자는 친안 판사 역시 졸 대령과 같은 선상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 역시 같은 제국이 만들어낸 공포와 광기 전염된 사람이다. 단지 그는 그 광기의 한복판에 들어가지 않고 변두리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곳이 바로 제국의 변경이다. 그는 그 변경에서 적당히 제국에 복종하고, 적당히 야만인들을 통치하며, 적당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기를 원한다.

그런데 상황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계속 사람을 발거벗기고 수치를 주는 제국의 공포를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그 수치와 공포를 외면하려 하지만, 그 수치와 공포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자신의 집무실에서도, 자신의 침실에서도, 심지어는 도시와 떨어진 폐허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수치와 공포에 맞서게 된다.

 

이런 경우 다른 소설에서는 불의를 보지 못하는 주인공의 정의감을 내세우겠지만, 쿳시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도 할 수만 있다면 제국의 수치와 공포에 눈을 막고 귀를 막아서 그냥 따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그의 양심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건 그가 정의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양심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두 감정의 차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후자를 예민함이라고 바꾸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민함이라는 감정이 바로 쿳시의 소설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남들은 그냥 수치심과 공포심에 외면하는 것들을 예민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예민함의 감정은 쿳시의 자전적 소설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감정이었이다. 아마 쿳시도 자신의 예민함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예민한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괴롭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뀐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려면 안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사람에게 저렇게 하면 안 되는 아니야? 이런 감정들이 분노처럼 일어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중학교 때의 경험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정확히 수치와 공포의 감정이 아니었다. 분노의 감정이었다. 왜 사람을 발가벗길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왜 아무도 말하지 못할까? 나는 왜 소리치지 못했을까? 이런 감정은 살면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군대에서 상관이 부당하게 부하들을 대할 때,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이 운영될 때, 세상이 비열한 방식으로 소수자들을 발가벗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도 저들처럼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수치감이나 공포감 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분노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치안판사가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놀림을 당할 때 그제서야 분노한다. 자신과 함께 벌거벗겨지고 놀림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그들을 학대하는 제국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친다. "이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발가 벗길 수 없음을 소리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제국주의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제국주의라는 자신의 삶의 테두리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인간의 내면이 치안판사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치안판사가 쿳시이며, 많은 백인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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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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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강원도나 오지를 여행하다 보면 동굴 탐사를 하게 된다. 몇 백만 년 전 용암이 흘러서 만들어낸 길고 깊은 터널을 따라, 혹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된 침식작용을 통해 만들어 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온갖 신비로운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동굴 속에서 광장만 한 넓은 장소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기어서 겨우 몸 하나만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만나기도 한다. 방문객을 위해 만든 작은 등불들이 없었다면 칠흑 같은 암흑이었을 그곳을 작은 불빛들을 따라 걷다 보면 두려움과 비슷한 경이감들을 느낀다. 그리고 동굴 출구의 빛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을 읽은 경험도 이런 동굴 탐사와 비슷했다. 이 책의 화자인 킨보트 교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킨보트인지, 카를 왕인지, 아니면 나보코프 자신인지 모를 존재의 내면 깊숙한 동굴을 탐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화려하고 현란한 문장에 매혹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모를 난해한 문장과 해석 속에 갇혀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누군가의 내면 깊숙한 곳을 힘겹게 빠져나온 듯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내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대표작인 [롤리타]를 통해서이다. 대부분 사람이 롤리타를 처음 읽는다면 내가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라는 이상한 이름의 중년 남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죽기 직전에 어린 여성에 대한 자신의 성적 집착에 관한 기록을 남긴다. 소설은 마치 험버트 험버트라는 남자의 실제 기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린 여성에 대한 집착을 읽으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특히 어린 여성에 대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어둡고 더러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여자아이를 돈으로 사는 부분에서는 혐오감까지도 느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보코프가 일부러 이런 혐오감을 유도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험버트 험버트의 스스로를 혐오감 있게 묘사한다.) 그러다가 곧 어린 여성에 대한 마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에 대한 애처로운 고백을 읽으며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험버트 험버트의 시선으로 '롤리타'로 불리는 12살짜리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여기까지 끌고 가는 나보코프의 솜씨가 너무 현란해서 읽는 사람은 무기력하게 나보코프의 가리키는 방향을 볼 수밖에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이 나보코프의 놀음에 놀아나 것 같아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런 소설적 독해의 경험은 [창백한 불꽃]을 읽기 전까지 [롤리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창백한 불꽃]을 읽으면서 [롤리타]는 양호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롤리타]라는 배를 탔을 때 지독한 파도를 만나 배멀미를 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창백한 불꽃]을 만나 폭풍우 속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그때의 경험은 잔잔한 파도였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창백한 불꽃] 시집과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의 부분은 고인이 된 셰이드 교수의 시이고, 후반부는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 교수의 주석이다. 머리말 부분에서는 킨보트 교수의 이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 책이 진짜 시집과 해설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는 킨보트 교수의 셰이드 교수에 대한 존경심과 그 시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금세 자신의 주석이 이 책의 핵심임을 이야기한다.

"관례에 따라 주석은 시 다음에 오지만, 주석을 먼저 훑어보고 그 도움을 받아 시를 읽어보길 독자에게 권하는 바이다 - 중략 - 단언컨대, 내 주석 없이 셰이드의 시만으로는 인간적인 사실성을 갖지 못한다." (P 35)

이쯤 되면 이 책이 정말 시집과 해설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롤리타의 초반의 험버트 험버트의 독백을 기억나면서 벌써부터 내가 멀미 나는 배에 올라탔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네 편으로 된 셰이드의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소개된다. 시는 마치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새의 시각에서 셰이드가 살았던 집과 그의 인생을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굴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돌로 만들곤 했다.

나 자신을, 나의 램프를, 접시에 놓인 사과를

밤의 장막을 열어 어두운 유리에 비친

모든 가구가 잔디밭에 위에 떠 있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나 기뻤던가, 눈이 내려

어렴풋이 보이던 잔디밭을 덮더니 쌓이고 쌓여

의자와 침대가 정확히

눈 위의, 저 밖의 크리스털 나라에 세워졌을 때!" (P39)

시는 50 페이지가 넘는 꽤 긴 내용이다. 길고 암시적인 단어들로 나열되어 있기에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쉽게 읽혔다. 문제는 시 뒤에 이어지는 훨씬 많은 분량의 주석 부분이다. 흔히 시의 주석은 시를 잘 이해하게 위해서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킨보트가 해석하는 셰이드의 시는 시의 의미보다는 주로 킨보트의 주관적인 이야기뿐이다. 마치 '험버트'가 '로'라는 어린아이에게 집착하듯 킨보트가 당대의 위대한 시인은 셰이드를 존경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감정으로 흠모하는 시각이 나와있다. 롤리타에서 변형된 다른 집착인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젬블라'라는 나라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한참을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당황하게 되었다. 킨보트는 시 속의 단어들 속에서 젬블라의 역사, 문화, 자연 풍경 유추하며 이야기하다가, 젬블라의 혁명과 쫓겨난 카를 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말이 좋아 유추이지, 그냥 킨보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와 끼워 맞추는 억지식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읽으면서 젬블라의 이미지에서 러시아의 이미지를 카를 왕에게서 로마로프 왕조의 마지막 왕 니콜나이 2세 정도는 떠올릴 수 있지만, 과연 '젬블라'라는 나라 이야기를 왜 이토록 장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석의 중간중간에서는 킨보트 자신이 젬블라 태생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반부터 시의 주석은 내용은 점점 젬블라에서 쫓겨 도망 다니는 카를 왕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무언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카를 왕의 이야기에서 카를 왕의 은밀한 어린 시절 이야기, 독특한 동성애적 성적 취향, 젬블라 왕궁에서 혁명군에게 감금되어 있던 상황, 왕궁 지하 통로를 통해 혼자 탈출하여 산을 넘어 도망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를 왕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냥 킨보트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지만, 심지어는 카를 왕이 자신의 아내였던 '디사'라는 여인에 대한 꿈과 그 꿈에 대한 감정까지 이야기할 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디사에게 품었던 감정은 어느 정도였을까? 친근한 무관심과 차가운 존중, 신혼 초에도 어떤 감미로움이나 흥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연민이라든지 마음의 고통 또한 느낄 리 없었다. 그는 그저 무심하고 매정했으며,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내심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대단한 보상을 해주곤 했다. 그는 표면적인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보증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통렬하게 그녀의 꿈을 꾸었다. 주로 그녀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을 대 꾸었는데, 그녀와 아무 관계없는 근심이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거녀의 이미지를 띠고 나타났다. 전쟁이나 개혁이 동화 속에서 불사조가 되어 등장하듯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이 꿈은 그녀에 대한 칙칙한 산문 같은 그의 감정을 강렬하고 특이한 시로 탈바꿈시켰고, 꿈을 깬 후 잦아든 그 시의 파동은 하루 종일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며 그를 괴롭혀서 에는 듯한 그 격통과 찬란함을 - 다음엔 격통만을, 그다음엔 그 번뜩이는 반사상만을 - 다시 떠올리게 했지만, 살아 있는 셀제 디사를 대하는 그의 모든 태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P 257-8)

이쯤 되면 내가 셰이드의 시를 읽고 있는 것이지, 시와 상관없는 킨보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린 왕국과 시간에 대한 애절함을 가지고 있는 카를왕의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러시아를 떠나와 유럽과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산 나보코의 버림받는 어둡고 차가운 내면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 헛갈리는 상황이 된다.

그러다가 다시 후반부네 이르러서는 카를 왕의 이야기와 함께 젬블라에서 온 그라두스라는 암살자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느 정도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라두스의 등장과 그의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또다시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주석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셰이드의 죽음과 셰이드의 시, 그리고 그 시에 대한 킨보트의 해석의 동기들로 마쳐진다. 그러나 힘겹게 동굴의 출구에 가까워져 출구에서 비치는 빛을 보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다시금 나보코프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그라두스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젬블라'라는 왕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인지, 카를 왕이 킨보트 자신인지, 아니면 킨보트의 환상이 만들어 낸 인물인지,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다 읽은 후까지 쉽게 나를 쉽게 동굴 출구로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심리적인 해석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롤리타]를 읽고, [창백한 불꽃]을 읽고 난 후 왜 험버트 험버트나 킨보트에서 나보코프가 보이는 것일까. 화려한 러시아의 귀족 가문으로 태어나, 평생을 유럽과 미국에서 유랑하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음에도 영원한 이방인의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했던 작가의 어둡고 외로운 내면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묻어 나오는 것처럼 느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이끌로 가는 롤리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험버트 험버트나 스스로 몰락한 젬블라 왕국의 왕이라고 믿고 있는 킨보트 교수나, 어쩌면 이들은 나보코프 자신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나보코프의 문학적 자존심의 대단했다고 한다. 자신을 고리키 이후에 이어지는 러시아 문학의 정통 계승자로 여길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어를 버리고 영어로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비애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런 감정들이 킨보트 교수의 주석에서 번번이 비치고 있다. 킨보트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끝까지 자신을 카를 왕국의 왕으로 믿고 살아간다. 진짜 그가 왕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과대망상증에 빠진 환자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보코프는 누구였을까. 아무래도 언제 가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멀미가 가라앉은 한참 후가 될 테지만. 비록 아직도 혼란스럽지만 나보코프가 만든 차갑고 어두운 동굴을 탐사하는 시간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험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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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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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내가 처음 보고 느낀 것은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이었다. 마을 끝에 있어서 산과 마을 사이의 경계가 되는 마지막 집이었다. 집을 오르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돌계단을 올라야 했고, 그렇게 집 마당에 올라서면 마을의 집들이 대부분 보였다. 집 뒤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연례행사저철 도시락을 준비해 나와 형제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빛바랜 사진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지만, 그때의 이미지들은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어떤 때는 그때의 따스한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와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어떤 때는 그때의 아픈 감정, 수치스러운 감정,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들이 튀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런 기억들과 감정들이 뒤엉켜있다. 그것은 내 몸에서 수술이나 약물로 분리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내 안에 뒤엉켜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이 바로 ‘나’이고,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간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읽으면 한 여성 안에 존재하는 이런 기억과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진과 같은 여러 장의 이미지들을 만나게 된다. 전쟁 전후의 빈곤한 캐나다 시골 마을, 친근할 것 같지만 날카로운 마을 사람들의 시선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보수적 종교의 무거운 공기, 부유한 윗마을과 가난한 시골마을, 나무 건물의 낡은 학교, 그리고 그 학교의 폭력적인 선생님과 거친 학생들, 이런 이미지들이 엘리스 먼로의 뛰어난 묘사와 함께 마지 사진처럼 보여진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에 나와 있는 가정과 집에 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낡은 농장과 기찻길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때로는 폭력적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파키슨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어머니, 이런 것들이 엘리스 먼로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정의 이미지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녀 속에 있던 삶의 경험들이 주는 이미지들이 그녀의 소설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이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지 못한 한 소녀의 슬픈 이미지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눈보라치는 캐나다의 벌판 속에 혼자 발거벗겨져 버려진 것 같은 외롭고 쓸쓸한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거지 소녀]란 소설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한층 더 강하다. 소설을 통해 로즈라는 여성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면서 순간 순간 페이지를 멈추어야 했다.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아파서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녀가 경험해야 했던 차가웠던 세상과 삶의 경험들이 페이지의 손끝에서 전달되어 마음 속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로즈와 그녀의 새어머니인 플로의 애증관계로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죽고 가구를 수리하는 거친 일을 하는 아버지와 결혼한 여자가 플로였다. 후에 플로는 작은 가계를 운영하며 로즈와 이복 남동생 브라이언을 돌본다. 사춘기의 예민한 소녀인 로즈와 입과 행동이 거친 플로는 거의 매일같이 싸운다. 그러다가 플로가 ‘장엄한 매질’이라고 하는 혹독한 매를 로즈가 아버지에 맞는다. 플로는 그렇게 처참하게 매를 맞는 로즈를 고소해 하기보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런 플로에게 로즈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사실 어린 소녀가 폭력적이지만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와 미운 새어머니이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유일한 사람인 폴로에게 가지는 감정이란 매우 복잡하다. 놀라운 건 엘리스 먼로가 그 모든 감정을 짧고 덤덤한 묘사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홀로 있는 폴로를 기억해 내는 나이 든 로즈의 시선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부엌 창가에서 차가운 호수를 내다보며 로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들으면 좋아할 만한 사람은 플로였다. 최악의 의심이 멋들어지게 확인되었다는 뜻으로 그녀가 세상에! 하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플로는 해트 네틀턴이 죽은 바로 그곳에 있고, 로즈는 어떻게 해서도 플로에게 가닿을 수 없었다. –중략- 이삼 년 전 로즈가 양로원에 입원시킨 이후 플로는 말문을 닫았다. 플로는 스스로를 완전히 거두어들였고, 하루 종일 교활하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칸막이를 두른 침대 한구석에 앉아서 누가 뭐라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씩 간호사를 깨물어 감정을 드러내는 때를 제외하고는.” (P 47-8)

 

이후 로즈는 플로의 품을 떠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진학하고 그곳에서 패트릭이라는 남성을 만난다. 순수한 학자를 추구하는 학생으로 알았지만, 나중에는 그가 백화점 체인의 상속자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로즈가 패트릭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그녀가 재벌이여서가 아니다.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패트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패트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돈의 양이 아니라 그가 주는 사랑의 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안쓰러움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고 믿었다. 마치 그가 군중 속에서 커다랗고 단순하고 빛나는 물체 – 가령 순은으로 된 거대한 달걀 같은, 용도는 미심쩍지만 살인적으로 무거운 물체 –를 들고 다가와 자신에게 바치는 듯, 아니 실은 마구 떠안기며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누자고 애원하는 듯했다. 그걸 그에게 도로 떠안긴다면 그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설명에는 뭔가 빠진 것이었다. 그것은 로즈 자신의 욕구, 재산이 아니라 흠모를 바라는 욕구였다. 그가 사랑이라고 말하는(그리고 그녀 역시 의심하지 않는) 그것의 크기, 무게, 광채는 그녀를 감명시켜야만 했다. 비록 그녀가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선물이 또다시 그녀에게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패트릭 자신도 로즈를 흠모하면서도 은근히 에둘러 그녀의 행운을 지적했다.” (P 147)

 

너무나 사랑에 굶주려 있기에 그녀는 패트릭이 가진 고리타분함과 그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다. 로즈와 패트릭의 사랑은 그녀의 삶처럼 위태위태하다.

 

그녀는 패트릭과 결혼하지만 패트릭과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에 못 견뎌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탈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패트릭과 이혼을 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는 중년의 로즈는 치매가 걸린 플로를 돌보기 위해 다시 고향인 핸래티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핸래티 마을과 플로를 이제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비록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이 삶을 어느 정도 스스로 극복했고, 극복해 가고 있음을 암시하며 소설을 끝맺는다.

 

로즈가 패트릭과의 결혼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계속해서 성적 일탈로 자신을 망가뜨려 가는 부분에서 그녀에 대한 연민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해!'라고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덮고 나서 한참 후에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의 그녀의 기억과 감정들이 수풀처럼 그녀의 삶의 얽어매고 있었고, 그녀는 그 수풀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주변 사람들과 플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층 부드러워진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로즈 안에 있던 어린 시절의 로즈가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소설을 마친다.

 

엘리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떠오르는 같은 한국 여성 작가가 있다.  은희경 작가이다. 처음 그녀의 단편소설인 [아내의 상자]를 읽었을 때의 당혹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탈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워낙 젊은 시기에 읽어서인지, 읽으면서도 그녀가 왜 스스로를 그렇게 무너뜨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도덕적인 잣대로 그녀를 판단하고 비판했었다. 그 후 그녀의 작품들인 [새의 선물]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작품들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마치 로즈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선 속에 가두어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이 나온다. 오랜 시기가 지난 후 다시 [아내의 상자]를 읽으며 갈기 갈기 자신을 찢어가면서도 살고자 몸부림쳤던 한 여성을 대면할 수 있었다.

 

엘리스 먼로의 작품들이 은희경 작가의 소설들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엘리스 먼로의 작품에서는 따스한 소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에서처럼 처절한 삶 속에서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여성이 등장하지만, 끝에는 항상 자신과 타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특히 [거지소녀]라는 작품에서 이런 이미지가 강하다. 결국 그 시선이 바로 엘리스 먼로 자신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떠나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 삶들이 자신의 일부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 먼로가 그녀의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치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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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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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새 신작이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거지 소녀]이다. 국내 출판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꾸준히 구입해서 읽다 보니 이 책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읽으려 하니 무언가가 꺼림직했다. 책장 한구석에 오래전에 구입했던 앨리스 먼로의 대표작인 [디어 라이프]가 읽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 책을 펼쳐 보고 싶은 욕구를 묻어두고 [디어 라이프]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창조한 그녀만의 단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소설을 읽은 사람을 그 소설만이 창조한 독특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에 있다. 마치 3D 입체 영화를 보듯, 소설을 펼치면 새로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읽는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빨아들이는 소설이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 속 세계일 수도 있고, 작가가 경험한 과거의 세상일 수가 있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펼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광활한 캐나다의 기차여행,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캐나다의 벌판, 보수적인 종교적 색채가 강한 캐나다의 도시들, 전쟁이 막 끝나 모든 것이 뒤숭숭한 1950년대,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사랑하고 상처받는 여인들, 이것이 바로 엘리스 먼로가 만들어 내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이 소설의 세계들이다.

 

첫 소설 [일본에 가 닿기를]이란 소설은 기차 여행을 주 배경이다. 소설은 그레타라는 여성이 남편 피터의 배웅을 받으며 어린 딸 케이티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레타가 기차를 타고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이동하는 며칠의 시간이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밴쿠버는 캐나다의 서쪽 끝에 있고, 토론토는 동쪽 끝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피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녀가 마음을 두고 있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만난 연극을 하는 그레그라는 남성을 일탈을 한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가끔 연극을 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연극이란 그녀의 소설에서 평범한 삶에서의 일탈을 통로와 같은 소재이다.) 이 소설에서 기차 여행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주인공 그레타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한다.

 

"그 순간 새로운 공포심이 일었다. 만약 케이티가 객차 끝까지 이쪽 저쪽 돌아다니다가 어찌어찌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면, 혹은 누군가가 문을 열었을 때 따라 나갔다면, 객차들 사이에는 다른 객차로 넘어갈 수 있는, 각 객차들을 연결하는 짧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서면 기차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 뒤에도 무거운 문이, 앞에도 무거운 문이 있었고, 통로 양쪽에는 덜컹거리는 금속판들이 있어다. 그 금속판들이 기차가 정차ㄹ할 때 내려지는 계단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P 35

 

나 역시 오래전에 기차의 연결칸들을 통과할 때며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작가는 객차의 연결칸의 혼란스러운 공포를 지금 그레타의 심리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문센]이란 소설에서는 전쟁이 끝나가는 1940년대 후반의 춥고 황량한 캐나다 시골마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시골 마을의 교사로 부임한 젊은 여생이 기차 플랫폼에 내리면서 시작이 된다. 그녀가 맞닥뜨리는 춥고 황량한 시골마을과 그녀의 인생이 묘사된다.

 

"남자들은 모두 숲속 제재소에서 내렸고 -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잠시 뒤 눈 덮인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하얀 목조건물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여자가 포장된 고기 꾸러미를 챙겨 일어셨고, 나를 따라 일어섰다. 기관사가 다시 '샌'하고 외쳤고, 문들이 열렸다. 여자 둘이 전차에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고리를 든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도 날이 아주 춥다고 대답했다." P 46

 

[자갈]이란 소설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었다. 대부분 단편소설은 읽는 속도가 느리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는 시간이 긴 것이 아니라, 한편의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주는 기분에 빠져 다음 소설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갈]이란 소설이 그랬다. 다른 소설들은 비교적 빨리 읽었지만, 이 소설을 읽은 후에는 엘리스 먼로의 다른 소설들을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평범한 타운의 가정의 어머니는 연극을 하는 젊은 '닐'이라는 남성을 선택하고, 어린 주인공과 언니는 엄마를 따라 닐이 거주하는 마을 외곽의 트레일러에서 함께 머문다. 어머니는 자유를 선택했지만, 딸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소설은 어린 주인공의 시각에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잘 표현한다. 결국 언니인 카로는 이런 혼란스러움과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주인공은 이것을 평생 짐으로 짊어지게 된다.

 

"어머에게 그 시절을 떠올려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나는 그 문제로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는다. 어머니가 차를 몰고 우리가 살던 그 시골길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다. 그곳은 많이 변해서 농사가 신통치 않던 땅에 지금은 유행하는 집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집들을 보며 느낀 경멸의 감정을 얼마간 드러내며 그런 말을 꺼냈다. 나도 그 길에 가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가족 안에 일어난 무서운 사건을 애써 지워버리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자갈 채석장이 있던 자리에도 집이 지어졌고, 그 아래 땅은 반반하게 다져졌다." P 139

 

[기차]라는 소설은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 편 안되는 엘리스 먼로의 소설 중의 하나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여성의 긴 인생에서의 짧게 지나가는 사랑과 그 사랑의 여운이 어떻게 인생에 묻어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남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소설은 한 남성이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연히 기찻길 옆의 한 여성이 사는 농장에 머무르게 된다.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여성이 암이 걸린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연애, 그리고 여성이 병이 들고 남성이 여성을 돌보는 구조는 앞의 [메이벌리를 떠나며]라는 소설과 비슷한 구조이고, 엘리스 먼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구조이다) 여성을 돌보던 남자는 또 홀연히 떠나고, 소설 말미에서 이 남성이 이렇게 여성을 떠나는 이유를 언급된다.

 

이 책의 뒷부분의 소설은 대부분 엘리스 먼로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앞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시골마을과 언니의 죽음, 병든 여인, 그리고 재혼 등의 모티브들이 모두 그녀의 삶에서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라이프] 등을 읽으며 마치 그녀의 인생의 단편을 사진을 보듯이 보게 된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긴 인생과 그 인생에서 짧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인생에 주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 사랑의 영향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때로는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으면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 때다 있다. 마치 소설 한 편을 다 읽고 인생을 다 산 느낌과 비슷한 허무함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엘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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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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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역사 소설에서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판타지 소설에는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독특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여행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 등에서도 그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세계가 있다. 이렇게 소설은 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르거나 복잡한 세계관으로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 때로는 백지에 소설의 세계관과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소설의 세계를 그림으로 잘 표현한 자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그림들이 실려 있는 책을 만났다. 이런 소설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린 책이 있다. 바로 [소설&지도]라는 책이다. 이 책은 유명한 고전 19편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멋진 지도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지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되는 지도이다. 어린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읽고 그 독창적인 세계관과 배경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지도를 보니 당시의 경험이 새롭게 떠오른다. 소설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방황했던 세계란 한눈에 펼쳐지는 느낌이다.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와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 트로이, 오디세우스를 유혹에 빠지게 한 오기기가, 노래로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유혹한 세이런, 부하들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이 폴리페모스까지 환상의 세계가 멋진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스 크로스]의 배경이 되는 무인도도 아주 멋지게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단순히 지명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로빈스 크로스가 겪었을 외로움과 절망, 배고품,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관심을 끈 지도는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쓴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책의 배경이 되는 지도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노예로 이곳저곳을 팔려 다녔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을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그가 태어났던 곳과 그가 팔려 다녔던 곳, 그리고 그가 노예해방 운동을 했던 곳들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를 통해 그의 일생이 보이는 것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도 매우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피쿼드 호의 구조가 아주 잘 그려져 있다. 또한 피쿼드 호가 쫓는 모비딕이란 고래의 이미지도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여행]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강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책이고, 만화나 영화로도 자주 접했던 원작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미시시피강은 단순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남북전쟁 전의 남부의 상황을 표현해 내는 이미지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부분을 언급한다.

 

"소설 속 비유와 인물이 대단히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까닭에 가끔은 미시시피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깜박 잊을 정도다. 강은 늘 변화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고, 항상 스스로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마크 트웨인의 강(강을 다니는 배에서 도선사로 일한 적이 있기에 미시시피는 정말로 그 강이었다)은 옛날 옛적부터 전해져온 상징이 아니라 뭔가 미국적인 것에 가깝다." (P 73)

 

이 책에서는 내가 아직 읽지 않는 소설들에 대한 지도가 더 많이 등장하지만, 지도를 보면서 읽지 않은 소설들도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읽은 소설을 하나의 이미지나 지도로 그려 보면 어떻까 하는 마음까지도 들 정도로 소설의 세계를 매력적으로 그린 지도로 가득 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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