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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 상 ㅣ 십팔사략 1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평점 :
거대한 자연 풍경을 보며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잠시 넋을 잊을 때가 있다. 중국 역사가 그렇다. 방대한 영토와 그 영토 속에서 세워졌다 사라지는 수많은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보면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잊을 때가 있다. 이런 중국 역사는 여러 권의 책들로 출간되어 부분적으로나마 우리가 접하게 된다. 삼국지나 초한지, 또는 열국지 같은 인기 있는 시대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어 읽힌다. 그러나 정작 중국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책은 드물다. [십팔사략]은 바로 방대한 중국 역사를 한 권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십팔사략]은 송나라 말엽과 원나라 초에 살았던 증선지(曾先之)가 원나라 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칩거하면서 지은 역사서이다. 중국에서 전설로 알려져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살았던 송나라와 원나라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함께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많이 읽혔던 책이다. 아쉽게도 [자치통감]이 잘 알려진 반면 [십팔사략]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인간사랑에서 원문을 번역하고 그곳에 해석까지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1,2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합치면 1400페이지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러나 단순히 페이지를 넘어서 그 속에 방대한 중국 역사가 담겨 있다.
[십팔사략] 1권은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해서 은,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통일과 혼란시기를 거쳐 서한과 동한, 삼국시대와 위 진 남북조시대를 다루고 있다. 2권에 비해서 더 혼란했던 중국의 역사를 다루며 보설(補說)이라는 형식을 통해 십팔사략에 대한 저자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다.
먼저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삼황오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삼황오제는 원래 중국의 민간설화로 이어지다가 사마천의 [사기] 때부터 역사로 편입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최근에 중국 신화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는데, 삼황오제와 관련된 전설들이 많이 있다. 반고와 여와에 의한 창조설화와 관련되어 복희씨의 언급이 많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해설을 통해 중국 역사에서 삼황오제가 역사로 편입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원래 황제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등장한 것은 전국시대 이후다. 황제 신화 및 숭배가 전국시대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그 내용도 훨씬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전국시대 후반기에 들어와 천하통일에 대한 염원이 높아지면서 황제에게 패한 뒤 전신(戰神)으로 숭앙된 치우는 살벌한 전쟁을 상징한데 반해 황제는 통일을 상징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P 58)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한족의 역사가 끊어질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 증선지와 같은 사람에들에게 삼황오제의 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허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신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신화와 전설은 나름대로 선사시대 조상들의 사고와 생활양식을 구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편수하면서 사마천의 [사기]를 전범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와 발해사 등응을 삭제한 김부식의 소행은 사마천이 삼황오제와 같은 신화를 왜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김부식이 신채호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63)
두 번째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이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던 이유는 잘 알려진 것처럼 법가 사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진나라가 처음 법가 사상을 받아들인 것을 진효공이라는 사람이 위나라 출신 공손앙을 받아들이면서부터라고 한다. 공손왕은 진효공에게 나라를 통치하는 도가의 무위지치(無爲之治)와 유가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진효공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법가의 법치(法治)와 병각의 역치(力治)를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진효공이 반응을 보였다. 십팔사략에서는 공손왕이 진효공에게 말한 법치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백성을 10가구 내지 5가구 단위로 묶은 십오의 제도로 묶고, 사로 감시하며 책임을 지는 연좌제를 실시한다. 간사한 자를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를 끊는 요참에 처한다. 고발한 자에게는 적을 벤 것과 동일한 상을 내리고, 은닉한 자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내린다. 싸움에 공을 세운 군공자는 각각 그 공에 따라 작위를 받고, 사사로이 다투는 사투자는 각각 그 경중에 따라 형벌에 처한다. 남녀노소가 힘을 다하는 육력으로 본업인 농사와 길쌈인 경직에 열심히 일하며 곡식이나 포백 즉 속백을 많이 생산하는 자는 그 자식의 부역을 면제해 주는 복신을 허용한다. 상공업 등의 말업에 종사하며 고리 등의 말리에 취하는 자와 태만하여 가난한 자는 처자까지 모두 잡아들여 관노로 삼는 수노의 조치를 위할 것이다." (P 190)
이렇게 진나라가 엄격하다 못해 잔인한 공포정치를 펼치자 진나라가 부강해졌다. 그리고 진시황에 의해 진나로 천하통일이 될 때까지 이 엄격한 공포정치가 이어진다. 이런 통치는 중국 역사의 곳곳에 드러나고, 한국에서도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멸하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극형들이 이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중국 미학 입문]이라는 책으로 알려지 이택후(리쩌허후)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중국의 사상들이 사회주의라는 얼굴을 쓰고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안에는 중국식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팔사략을 통해 법치주의가 진나라 시대 이후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얼굴을 바꾸면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진나라 이후의 혼란을 통일하고 유가정책을 편 한나라 시대에도 여전히 잔인한 공포정치가 보이는 곳이 많다. 현대에도 중국에서 체육관에서 흉악범들을 공개처형 시키는 등의 공포정치를 펴는 것은 아마 이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된다. 법에 의한 강력한 공포정치는 단기간에 쉽게 효과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반드시 그 피해가 있다. 법치를 세운 공손왕도 자신이 만든 법치로 인해 죽었으며, 진시왕과 그 자손 역시 그 쓰디쓴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관심을 가진 부분은 서한과 동한으로 나누어지는 시기이다. 우리가 흔히 한나라로 알고 있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정확히는 서한과 동한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왕망이 세운 15년간 존속했던 신나라가 있다. 보통 중국 역사에서 신나라는 역적 왕망이 한 왕조를 찬탈해서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십팔사략에서는 왕망을 그렇게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후에 그의 무리한 개혁이 신나라의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전부일뿐이다.
또 역자 해설에서 역시 왕망에 대한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다. 그는 서한의 멸망은 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한의 혼란 상황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동양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는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존속기간 15년의 신나라가 있다. 신나라는 국가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왕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탓이다. 신나라의 역사는 중국 정사에 포함돼 있지 않다. 반고의 [한서] 왕망전에서 왕망을 역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반고가 그를 '왕망' 내지 '망'으로 일관되게 부르고 있는 게 그렇다. 최근의 논저들도 그를 두고 기만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한 간신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서에도 왕망이 관직에 들어선 후 신나라 황제가 되기까지 31년의 긴 세월 동안 누군가 왕망을 반대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나라의 패망은 건국 이후의 문제점들로 인한 것임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설령 왕망이 아닐지라도 민란이 일어나 왕조가 뒤집힐 상황이었다. 탈법과 부정비리가 판을 치던 상황에서 그는 뇌물을 탐하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을 매번 부하들과 빈민에게 나눠주었고, 녹봉과 하사받은 상 등도 구제활동에 쏟아부었다. 개인생활 또한 청렴결백했다. 그는 결코 앞에서 푸성귀를 먹으면서 뒤에서 고기를 먹는 이중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P 437)
그러나 가장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왕망과 신나라의 멸망에 대한 저자의 평가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십팔사략 원문 자체보다 역자의 해석에서 날카로운 부분들이 더 눈에 띄는데, 특히 왕망의 부분이 그렇다. 왕망이 개혁에 실패하고 신나라가 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는데, 마치 칼에 배이듯이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은 왕망의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해당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면 성공을 거뒀을 공산이 크다. 지식인과 서민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그의 즉위를 반겼다. 그러나 황제의 차원을 넘어 '성군'이 되고자 한 게 문제였다.
당시 근데 퇴직 관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고, 학자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관리 선발의 폭을 넓히고, 관리와 백성의 개별적인 병역 물자를 지급해주고, 대량의 공공시설을 세웠다. 이는 그의 개혁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갖게 했고, 더불어 더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열렬한 지지자들은 곧바로 적대세력으로 돌변한 이유다.
당시 재화는 한정돼 있었다. 그가 추진한 일련의 사업은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돼야 했다. 재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이는 재정파탄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방법을 택했다. 가장 완벽한 개혁을 위해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갈등의 핵심인 토지와 노비 문제에 대해서 그는 시건국 원년인 서기 9년에 이같이 선포했다.
'이제부터 천하의 밭을 개명해 왕전이라 하고 노비는 사속이라고 하고, 모든 매매는 일괄적으로 금한다.'
[맹자]가 역설한 정전제를 겨냥한 조치였다. 성스로운 정전제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은 모두 변경으로 압송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지주 호족의 반발이 거셌다. 이 정책은 실행가능성이 없는 데다 실제적인 강제조치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얼마 후 없던 일이 되자 기대가 컸던 농민들도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토지제도의 실패는 곧 왕조의 패망을 의미했다." (P 440)
[십팔사략]의 1권은 특히 중국의 혼란 시기를 많이 다루고 있기에, 많은 왕조가 세워지고 몰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이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는지에 대해 나름 역사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해석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역자의 보설이다. 그는 매 단락의 후반부에 방대한 양의 보설을 통해 십팔사략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해설하고 있다. 어떤 때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어떤 때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그 사건이 가지는 이면의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중국 과거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이 시대의 우리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십팔사략을 비롯해 많은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던 저자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사를 통해 날카로운 통찰을 가진 지식인이 한 명 더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점점 역사적인 통찰이 흐려지고, 시대에 흐름에 생각 없이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대이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에 다시금 역사와 고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