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여자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지음, 윤병언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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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밤새 힘들게 진통을 한 후, 결국 수술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다음날 저녁에 병실에서 회복 중인 아내를 간호하다가 병원 측으로부터 아이의 호흡수가 빨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덜컥 겁이 나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내와 함께 신생아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역시 꼬박 세었다. 그렇게 이틀을 거의 잠을 자지 못하면서 아내와 아이를 챙겨야 했다. 어느 순간 무서운 세상 앞에 혼자 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 아내와 아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무게감... 그럼에도 피하거나 숨을 수가 없음을 느꼈다. 이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곧 호흡수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아내도 비교적 빠른 회복을 하고 있다.

이 경험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랑이란 달콤하고, 짜릿하고,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때로는 거친 풍랑 속에서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상대의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숨고 싶고, 때로는 도망가고 싶어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그 무게감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랑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삶을 통해 배워간다.

아내와 육아전쟁을 벌이면서 틈틈이 [못생긴 여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는 작가가 쓴 소설로서 칼비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레베카'(성경의 리브가의 이탈리아식 이름)는 못생긴 아이로 태어난다. 그냥 못생긴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얼굴까지 돌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게 못생긴 아이다. 그것도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다. 아버지는 외면하고, 어머니는 숨어 버린다.

엄마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를, 자신이 만들어낸 찌그러진 머리와 잔인한 얼굴 윤관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안아보려 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감히 젖을 먹여보라는 말 한 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다. P12


이렇게 아이는 엄마의 젖 한 번 물어보지 못하고, 커다란 저택의 2층 구석방에서 갇혀서 자라게 된다. 레베카의 부모들은 그녀가 아버지와 바깥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의 놀림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렇게 커간다. 아이 역시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사는 법을 배워간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여자아이들은 크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도 될 수 있고 선생님이나 배우, 심지어 공주님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아이는 다르다. 그녀가 아는 것은 하나, 자신은 영원히 못생긴 여자로 남으리라는 것뿐이다. P92


아버지는 레베카에게 따스한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머니 역시 그녀를 안 아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넘어져서 얼굴에 피멍이 들어도 그냥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점점 그녀는 레베카와 남편, 그리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도망을 가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렇게 레베카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려서 결국 강물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레베카에게는 부모에게 받지 못하는 사랑을 주는 '에르미니아' 고모와 유모 '마달레나', 그리고 초등학교에 가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인 수다쟁이 친구 '루칠라'가 있었다. 피아니스트인 에르미니아 고모는 레베카의 소질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음악은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고, 또 음악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게 된다.

레베카가 음악으로 소통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피아노 스승인 '렐리스' 선생님의 어머니이다. 렐리스의 어머니 역시 한때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으나 지금은 피크병(치매의 일종)에 걸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피아노를 치고, 그 피아노 소리를 듣고 레베카는 렐리스의 어머니와 친구가 된다.

레베카는 죽은 어머니의 일기장과 렐리스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못생겼기에 자신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와 가정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숨어 버린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처럼 도망가거나 숨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인생에 당당히 맞서 그녀만의 삶을 살아간다.

앞에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랑은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고, 도망가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숨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주변에 가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변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 그들을 비난하지만, 막상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 역시 자신의 무책임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그렇게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에서도 가정의 얽히고설킨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으로 숨어버린 어머니, 자신에게 둘러싼 미묘한 상황에서 피하기만 한 아버지, 자신의 욕망대로의 삶을 살기만 한 에르미니아 고모... 과연 그들을 비난할 수가 있을까? 그들 역시 자신의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과 달리 삶을 당당히 맞선 레베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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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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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모든 선택이 과감했다.

그러기에 실수도 많았고, 후회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알아갈 수록 선택이 망설여진다.

한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기에, 그 선택의 결과를 오로지 내가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한다.

그러다보니 점점 선택의 순간들을 놓치고, 과거의 결심들은 흐려진다.

어떤 때는 내 삶이 흐르는 물결에 그냥 휩쓸려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더 어렸을 때의 그 무모하고도 과감한 선택이 그리워진다.


[제시렘의 선택]이란 책은 영국의 권위있는 SF문학상인 아서클라크상을 수상했다.

그러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SF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가까운 미래의 세계에 테러로 인해 MDS(모체사망증후군)이란 바이러스가 퍼지고, 그로 인해 임신한 여자들은 모두 죽게 되고 신생아는 사라진다.

이로 인해 사회는 극도의 혼란과 공포 속에 빠진다는 배경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SF소설과는 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MDS가 발병해 임신한 여성들이 죽고, 신생아들이 사라진다는 배경만 빼면, 대부분의 것들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다.

특히 16세의 어린소녀 '제시램'의 세계는 여타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세계과 같다.

학업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부모님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좋아하는 남자와 다른 여자의 만남으로 인해 질투하고, 나름대로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구하겠다는 환상에 빠져보기 하고....

그럼에도 이 소설은 여타의 장르소설과 같지 않게 우리에게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내 자의에 의한 진정한 선택인가?'



소설은 어린 '제시렘'이 누군가에 의해 방안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읽는 사람들은 왜 제시렘이 갇혀 있는지, 그를 가두워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의 독백적인 회상 속으로 들어간다.

MDS가 발병하고 세상이 혼란에 빠지지만 제시는 여전히 옆집 친구인 '샐'이나 서로 좋아하지만 아직 감정표현을 못한 '버즈'라는 남자 친구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곳곳에 테러나 폭동들이 일어나고, 주변의 임신한 여성들은 계속 죽어간다.

제시와 친구들은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계획을 가진다.

이언이라는 아이의 주도로 '요피'라는 모임을 만들고, 에너지 안 쓰기 운동이나 공항폐쇄등의 운동을 한다.

제시 역시 이 모임에 빠져 부모님에게 에너지를 쓰지 말라거나, 비행기 여행을 하지 말라고 강요를 한다.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한 아이들은 이 모임의 허구를 깨닫고 점점 다른 길로 흩어진다.

이언은 정치적인 야망으로 요피의 모임과 참석자들을 이용했었고,  리사는 아이들끼리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하고, 버즈와 몇 명의 친구들은 동물실험을 반대하고 테러하는 극단적인 모임에 가입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MDS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의 아버지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잠자는 미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든다.

MDS가 발병하기 전의 저장한 배아를 16세 이하의 소녀를 대리모로 만들어 아이를 출생시키는 것이다.

배아를 잉태한 소녀는 임신기간 마취상태에 빠지게 해서 MDS의 발병을 늦추고, 아이를 출생한 후에는 죽게 된다.

제시는 이 프로그램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이 프로그램에 자원한다.


제시의 선택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즉흥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이 강했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좋아하는 남자친구들와는 다투고, 부모님은 이혼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제시는 자신이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집 나간 아빠를 돌아오게 하고, 이 프로그램만이 인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아빠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칭찬을 기대했던 아빠는 오히려 강하게 반대하고, 주변 친구들도 반대를 한다.

여러 가지 반대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제시의 선택은 더 구체적이 되고, 확고해 진다.

이 책은 제시의 순간의 선택들이 그녀 안에서 확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마치 그녀의 몸 속에서 또다른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처럼....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눈이 번쩌 뜨였다.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기억해내려 애쓰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벽난로 불길 쪽으로 돌아보았지만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일어나서 거친 카펫에 발을 내려놓았다. 암흑이 마치 망토처럼 목을 조여왔다. 검은색 형제조차 없었다. 오직 칠흙같은 어둠뿐이었다. - 중략- 온 세상이 숯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산 채로 땅에 묻히는 상상을 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어둠뿐이겠지. 어둠이 얼굴을 짓누르겠지. 밖으로 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겠지. 사람들이 마취를 했는데도 잠이 들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따면.... (P257)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님방에서 방사능처럼 나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아빠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양파와 마늘을 썰면 썰수록, 점점 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이해를 못 해서 그래.이게 아주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만약 이 결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만 이해시킬 수 있다면, 나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내게 힘을 준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이 평온하고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 이해시킬 수 있다면, 나한테 화내지 않을텐데, 분명 두 분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엄마 아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나는 공항의 무빙워크에 올라탔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수선을 떨고, 짐을 부치고, 갈팡질팡하고, 가슴 아파하는 시간을 모두 뒤로하고 이제 탑승구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날아갈 것이다. 이것은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다. (P284-285)


주인공의 확신이 점점 강해질수록 이 책을 읽는 나는 오히려 그 확신이 점점 의심스러웠다.

정말 제시는 선택이 본인의 확고한 의지였을까?

어쩌면 주위에서 만든 환상에 속은 것은 아닐까?

단순히 그 나이의 부모에 대한 반발심리나 영웅심리는 아닐까?


그럼에도 제시는 이 선택이 단순한 선택을 넘어서 소명처럼 커져간다.

이 책에 처음부분에서 제시는 자신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날 수 있도록 태어났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확고해질수록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날아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이고, 자신이 생명을 버리고 값진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한 소녀의 관점에서 매우 진솔하게 풀어가고 있는 소설이다.

또한 저자는 이 소녀의 선택에 여러 가지 반대 상황을 제시할 뿐, 어떤 것이 맞거나 그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현실이 아닌, 현실같은 상황을 소설을 써 내려갈 뿐이다.

과연 제시램의 선택을 옳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우리가 살면서 매일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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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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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작품 [로드]가 영화로 개봉되던 시기에 원작을 읽게 되면서였다.

핵전쟁 이후 멸망한 잿빛 세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신도 없다.

오직 끔찍한 살육과 약탈, 그리고 불탄 잿빛 세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잿빛 세상을 오직 살기 위해서만 걸어간다.

이 소설을 읽고 암울한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너무도 담담히 그려내는 작가의 기교에 반했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에 대해서, 그의 작품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핏빛자오선]은 코맥 매카시가 1985년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코맥 매카시가 비로서 대중작가로서의 발을 내딛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드]에 비해서는 상당히 읽기 어려운 편에 속했다.

[로드]를 거이 하루만에 읽은 반면, [핏빛자오선]은 거이 나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분량이 방대하기도 하고, 문체가 읽기 쉬운 편은 아니다.

또 그의 특유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담담한 사실적인 문체로 인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소설은 후에 발표되는 [국경을 넘어서]와 [평원의 도시] [모두 다 이쁜 말들]과 같이 서부시대의 국경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인 1840년대는 미국의 서부 켈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던 시기여서 미국의 영토가 서부로 팽창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 서부에는 대부분 인디어들이 있었고, 남부의 텍사스의 방대한 영토는 멕시코 소유였다.

텍사스에 미국인들이 정착하면서 멕시코와 국경 분쟁이 생겼고, 멕시코와의 전쟁 이후 텍사스는 자치국가가 되었다가 후에 미국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그 후에서 미국과 멕시코와의 작은 분쟁들은 계속되고, 일부의 약탈자들은 애국주의라는 이름 아래 멕시코까지 넘어가 약탈을 한다.

또한 멕시코에서도 인디언들을 학살하기 위해 미국 사냥꾼들을 불러 인디어의 머리 가죽을 벗겨오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은 미국 동부 테네시에서 가출을 한 후 텍사스까지 흘러 들어간다.

그는 그 곳에서 '판사'라 불리는 '홀든'이라는 인물과 '토드빈'이라 불리는 인물을 만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일 수도 있는 '판사'라는 인물은 신의 존재나 도덕 등을 믿지 않고, 살육과 피만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후에 소년은 멕시코를 약탈 하는 군대에 들어갔다가 인디언의 습격으로 겨우 목숨만 건져서 멕시코 치와와 감옥에 갇힌다.

그는 그 곳에서 다시 토드빈을 만나고, 토드빈의 주선으로 글랜턴과 판사가 이끄는 인디어 사냥꾼 무리에 함류하게 된다.

그 후 이 소설은 대부분은 소년이 함류한 글래턴의 군대가 멕시코 북부 지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인디언이나 일반 멕시코인들을 학살한 잔혹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의 특유의 매혹적인 문체로 주변의 배경이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동녘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웠다. 땅이 하늘로 빨려드는 삼라만상의 끝에서 태양은 미지의 테두리가 걷힐 때까지 불은 남근처럼 불쑥 솟구쳐 단호히 버티고 앉아 그들 뒤에서 악의로 약동했다. 자잘한 돌의 그림자가 연필처럼 가느다랗게 모래 위로 늘어지고, 사람과 말의 형체가 지난밤이 떨구고 간 가닥인 양 혹은 다가올 밤으로 이끌 촉가인 양 앞으로 길게 서렸다. 모자 아래 얼굴을 지우고 고개 숙인 채 나아가는 모습은 행군 도중 깜빡 잠든 군대 같았다. 아침나절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마차의 식량 자루를 더럽히며 누워 있던 그를 묻고서 부대는 다시 길을 나섰다.(P 67)

 

글랜턴의 부대는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팔기 위해 전투적인 아파치뿐만 아니라, 선량한 인디언들, 심지어 노인과 여자, 아이까지 학살하고 그들의 머리가죽을 벗긴다.

또한 술집마다 들어가 멕시코인과 싸움을 하고, 그들을 학살해 그들의 머리가죽도 인디어 머리가죽처럼 벗겨서 팔아버린다.

이런 잔인한 과정을 저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마치 남일인듯 사실적으로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셋째 날 밤 그들은 1.6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사막에서 타오르는 적의 모닥불을 바라보며 폐허의 벽 속에 웅크렸다. 판사는 모닥불가에 그 아파치 아이와 같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검은 딸기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 보았다. 몇몇은 아이를 놀리며 웃어 땠고, 육포를 주기도 했다. 아이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지한 눈으로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침에 군인들이 말에 안장을 얹는 동안 판사는 아이를 한쪽 무릎에 앉히고 얼러 댔다. 토드빈은 안장을 들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10분 후 말을 끌고 그 자리에 오니 아니는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P219)

 

글래턴의 군대는 점점 더 잔혹해지고, 글래턴을 비롯한 군인들은 점점 살육의 광기에 사로잡혀 간다.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묵시록의 군대처럼 저자는 그들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적으로 그린다.

 

그들은 밤새 사와로 선인장 숲을 통과해 서쪽 구릉지로 향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이고, 세로로 홈이 팬 선인장 기둥이 마치 폐허가 되어 버린 광대한 신진처럼 엄숙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어둠을 수놓았다. 나직이 울리는 올빼미 울음소리 말고는 덩벗이 고요했다. 촐라 선인장이 빽빽한 지대에서는 선인장 가시가 말에게 들러 붙어 말발굽을 뚫고 뼈까지 침투하기도 했다. 바람이 언덕을 타고 불어오고, 끝도 없이 이어진 능선을 따라 야생 독사의 노래가 번져 갔다. 행군을 계속해 나가면서 분위기는 점점 황량해졌고, 급기야 물도 떨어졌다.(P316)

 

결국 부대는 켈리포니아 경계의 콜로라도 강에 이르러 나룻배를 약탈하고 버려진 요새에 머문다.

글랜턴과 판사, 부대원들은 주변 인디언과 멕시코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여인들을 성적 노리게로 삼으며 광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어느날 밤 보복에 나서 유마 인디언의 습격으로 글랜턴과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죽고, 판사와 소년, 토드빈과 전진 신부인 토빈만이 살아남는다.

마지막 생존을 위해 판사와 소년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소년은 겨우 판사의 손에서 빠져나온다.

오랜 시절이 지나 소년은 어느 술집에서 우연히 판사를 만난다.

그때 판사는 자신의 니체적 인간관을 이야기 한다.

그는 인생을 춤으로 보고, 그 춤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잔혹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 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 쫓겨날 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기이게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능 니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 중략 - 전쟁에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다네.(P427)

 

 

비록 두 편밖에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두 번째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세계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코맥 매카시는 사람들이 종교나 신앙이 없어지고, 도덕이 없어지고, 오로지 생존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세상과 인간의 실체라고 말하려고 한다.

아마 그것이 그가 살아왔고, 느꼈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10살짜리 아들을 바라보며 썼다는 [로드]와 비교를 해 보니, 그나마 [로드]를 쓸 당시의 저자의 심경이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점점 생존경쟁이 치열해 지는 현대인의 가슴을 잔혹하게 위로해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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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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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은 오래 전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항상 어디로 튈지 몰라서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엉뚱한 농담으로 상대를 혹케 하던 이들이 지금은 너무나 뻔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모두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 매여있고, 눈에는 생기가 없어지고, 배는 나오기 시작한다.

꿈이이나 미래와 같은 이야기는 없어지고 오직 하루 하루 사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누가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하는 것일까?

가끔은 조직사회라는 것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기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자라고 부를만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찰스 부코스키가 쓴 [우체국]이란 소설에 나오는 ''치나스키'라는 인물이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치나스키'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한량'이자 사회 부적응자이다.

직장을 다니기는 하지만 대부분 지각과 결석이다.

상관에게 항상 대들고, 조직의 규율에 반항한다.

항상 여자를 만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경마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침이면 술에 덜 깬 모습으로 출근을 한다.

그나마 그런 직장 역시 오래 다니지를 못한다.

 

이 책은 작가인 찰스 부코스키가 우체국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치나스키'라는 인물이 2년간 우체국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다시 11년간 우체국 사무직으로 일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이 좋아 우체국 사무직이지 하루를 소포나 편지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근무조건은 매우 억압적이고 열악했다.

그 조직 속에서 인간은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일들을 한다.

이 책은 그런 조직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무너뜨리는지를 잘 묘사한다.

 

현장 주임은 양철 분류함 앞에서 서서 나를 가리켰다. 사무원들은 아주 빨리 우편물을 꽂고 있었다. 그들이 미친 듯이 오른팔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통통한 여자애도 우편물을 제자리에 쑤셔 놓고 있었다.

"이 분류함 끝에 쓰여 있는 숫자들이 보이나?"

"네"

"1분당 꽂아야 하는 개수를 가리키는 거야. 60센티미터 트레이라면 23분 안에 마쳐야 해. 자넨 5분이 늦었어."

현장 주임은 분류함에 써 있는 숫자 23을 가리켰다. "23분이 표준이라고."

"저 23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내가 말햇다.

"무슨 뜻이야?"

"제말은 어떤 남자가 페인트 통을 들고 와서 저기다 23이라는 숫자를 써놓았을 뿐이라는 거죠."

"아니야, 아지지. 이 시간은 몇 년 동안 검증된 거고 재확인 된 거야."(P221)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 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 입었고, 아주 천천이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20)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치나스키는 끊임없이 상사에게 대들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경마장에 간다.

그 사이 그는 베티, 조이스, 페티라는 세 명의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고 페티에게서는 마리나 루이즈라는 딸까지 낳는다.

저자는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딸이 태어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너무나 담담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우체국 사무직을 11년째 되던 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자신이 더 이상 있을 곳이 아님을 깨닫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냥 먹고 노는 것이 꿈이 치나스키의 삶이 한심하게 느껴지다가도, 우체국이라는 규격화된 조직사회가 숨이 막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치나스키가 그 곳을 나올 때 나조차 자유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과연 치나스키와 같은 인물은 우리는 부적응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의 표현대로 조직사회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사람이 진정 착실한 인간일까?

사회는 그런 사람을 성실하고 바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일평생을 사는 것이 성실하고 바른 삶일까?

아직 인생을 조금밖에 살지 못해 어떤 삶이 정답인지 알지는 못하겠다.

다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조직사회에서 흐물흐물 녹아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때로는 치나스키처럼 그런 조직사회를 마음껏 비웃으며 자신의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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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 성석제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0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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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가끔씩 사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 '선'이라는 것이 무너졌다.

이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또는 내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그리고 그렇지 않았던 예전이 그리워진다.

 

성석제 작가의 [왕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이 책의 주인공인 '장원두'라는 인물 역시 변해 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소설은 도시에 살던 주인공이 어릴 적 친구인 재천으로 부터 '큰형님이 가셨다'라는 소식을 전화상으로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큰형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고향에서 왕의 역할을 하던 '마사오'라는 사람이다.

마사오는 그 지역의 건달이었다.

'건달'이라고만 이야기하면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마사오의 정체성을 잘 표현할 것이다.

예전에는 시골에서는 주먹 꽤나 쓰는 사람이 단지 싸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대소사를 관할했다.

마사오 역시 그 동네에서는 최고의 주먹이자, 동네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마을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는 왕 같은 존재였다.

특히 주인공과 재천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 마사오를 신화 속의 존재처럼 우러러 보았다. 

그런 마사오가 죽게 되자 주인공은 그의 장례에 참여하러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예전을 회상하고, 그 예전과 너무나 달라진 고향과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당혹감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에서 마사오는 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주먹으로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지만 권력이나 돈을 탐하지는 않았다.

낭만을 알고, 의리를 알고, 약한 자를 도와 줄 줄 알았다.

이에 반해 마사오를 비겁하게 린치하고 그 동네에 처음으로 조직을 만든 조창용과 조창용이 죽은 후 마을을 양분하고 싸우고 있는 재천과 황포는 현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창용은 도시 조직의 똘마니가 되어 시골을 장악하고, 이미 중풍으로 인해 힘을 쓰지 못하는 마사오를 함정에 빠뜨려 불구로 만든다.

그리고 재천은 이런 창용을 음모로 죽게 하고, 황포와 싸움을 한다.

이들은 힘을 가지기 위해 무엇이든지 한다.

군인이나 경찰과 같은 권력과 손을 잡고, 상대를 모략하고, 칼과 도끼로 상대방을 난자한다.

90년대 이후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없다.

그들은 이미 그 '선'을 90년대에 넘어 갔다.

이제는 그 '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올라서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섭고, 시대가 무섭다.

 

마사오는 구 시대에 지켜얄 할 선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선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사오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나, 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존재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지키게 하는 인물이 있다.

 

예전에 내가 살 던 시대도 그랬다.

내가 살았던 동네, 내가 살았던 학교, 내가 시간을 보냈던 집단들 속에는 마사오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지키게 하는 인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인물들은 쓸쓸히 퇴장을 한다.

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하면서......

 

마사오가 구시대의 인물이고, 재천이 현 시대의 인물이라면,

마사오를 존경하면서도 재천의 절친한 친구인 주인공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마사오라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살았고, 그 세계가 무너질 때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그런 마사오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세계를 세우는 재천에게 어정쩡하게 끌려 간다.

그는 창용이 마사오를 함정으로 끌어들여 린치를 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 자기 친구 재천인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정쩡하게 재천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마사오가 죽은 고향 동네의 새로운 왕이 되려는 재천의 계획에 어정쩡하게 동조한다.

주인공은 선이 없어지는 시대에 어정쩡하게 동조하며 따라가는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선이 있던 시대를 그리워하나 그 시대로 돌이킬 힘은 없이나 새로운 시대에 저항할 용기나 힘은 없다.

그러기에 그냥 시대의 흐름에 어정쩡하게 따라갈 뿐이다.

 

 

오늘도 하루 종일 선이 없는 시대를 살다가 왔다.

도로에서는 무턱대고 클락션을 울려대는 차들, 헨드폰에서는 말도 않 되는 사기성 문자와 전화들이 오고 있다.

거리의 뒷골목에는 타인의 청약통약 비싼 가격에 산다는 광고나, 심지어 사람의 장기를 구입한다는 광고들이 버젓이 걸려 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무엇인가를 외쳐되고 있다.

나는 그런 시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 온다.

그리고 성석제 작가의 [왕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읽으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킬 선(線)이 있었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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