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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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치열하게 독서를 한 후 한참이 지나서 그 책을 열어 볼 때가 있다. 당시에 감동을 받았던 구절들이 현광 팬으로 그어져 있기도 하고, 저자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페이지 여백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내 반대 논리들이 적혀져 있기도 하다.  한때 치열하게 정독했던 책들은 펼쳐지는 대로 열어보며, 당시의 감정과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그렇게 떠오르는 대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보면, 어쩌면 내 인생도 이렇게 바라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들, 이것이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감정들,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낙담의 시간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페이지가 되어서 그것들을 관조하며 넘기고 있을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레이스 페일리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이런 감정을 미리 맛보는 느낌이다. 그레이스 페일리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그녀가 살았던 미국에서도 겨우 3편의 단편소설집을 출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출신 이민자의 출신의 유대인이자 여성의 시각으로서 미국적인 삶과 인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을 그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소설을 먼저 번역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그레이스 페일리의 이야기와 문체에는 한번 빠져들면 이제 그것 없이는 못 견딜 것 같은 신비로운 중독성이 있다.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문체는 그녀의 명백한 특징이자 서명이며 흉내 내려 해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P 7)"

무라카미 하루키가 느꼈던 중독성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이 소설의 첫 번째 소설을 [소망]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을 읽다 보면, 마치 메인 요리의 애피타이저를 맛보듯 그녀의 소설의 맛을 조금 알게 된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소설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혼한 한 여성이 연체된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혼한 남편을 만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소소한 대화를 하고, 자신의 감정을 독백처럼 언급한다. 남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까. 아니, 그녀 자신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까. 그럼에도 하루키의 말처럼 모르면서도 알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일까. 마치 인생의 어느 순간인가 한 번은 느껴봤을 감정이다.

"그렇다. 사실 나는 뭘 해달라거나 이건 꼭 해야 한다고 요청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도 뭔가 소망하는 건 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두 주 만에 책을 반납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 학교 제도를 바꾸고 사랑하는 이 도심의 여러 문제와 관련하여 예산위원회에서 연설하는 유력한 시민이 되고 싶다. 내 아이들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전쟁이 끝나게 해주겠다고 오래전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전 남편이든 아니면 지금 사는 남편이든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부부로 살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함께 할만한 됨됨이를 지녔으며, 지나고 보니 사실 한평생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짧은 한평생 동안 한 남자의 됨됨이를 바닥까지 알 수도 없고, 바위 속에 감춰진 그 사람의 여러 가지 이류를 속속들이 알 수도 없다. 바로 오늘 아침 나는 창밖으로 한동안 길거리를 바라보다가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기 2년 전, 시 당국에서 심어놓은 작고 멋진 플라타너스들이 그날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P 19)"

이 소설집에는 유독 '페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페이스라는 이름은 그녀의 3편의 단편소설집에 단골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으로, 그녀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대부분 페이스라는 주인공은 그녀처럼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로 나온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관조하며,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라는 소설이 이런 페이스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중요한 대화가 아주 간절했던 수간, 남자의 모든 세계를 코로 들이마시며 냄새로 느끼고 싶었던 순간, 나의 다정한 언어를 그의 시들지 않는 육체적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할 줄 아는, 적어도 한 명의 똑똑한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 순간, 나는 별도리 없이 아이들 가득한 동네 공원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P 109)"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은 [뭐가 달라질까]라는 소설이었다. 아마 가장 그레이스 페일리 다운 소설이라고 하면 이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한때 좋았던 시절을 누렸던 여자가 독백을 하듯 시작한다.

"나를 만나면 분명 반가울 겁니다. 나는 젊음이 뭔지 제대로 알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요, 행복했던 시절 나는 여느 사람과 달랐습니다. 내게는 그 시간은 한순간의 꿈같은 게 아니었어요. - 중략 - 그럼에도 그 젊은 나날을 잃어버리고 나니, 오랜 기간 희망 없이 향수병을 앓는 기분입니다. 그 시절은 내게 영영 떠나온 고향과 같으며, 그 후로 커다란 기쁨 속에 살기는 해도 낯선 도시에 있는 느낌이었지요. 그래요, 알겠어요. 안녕, 젊은 날들. (P 25)"

소설에서는 돌리라는 여성은 낙후된 도시에서 잭이라는 남편과 존이라는 아들과 산다. 존은 애가 딸린 지니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려고 하고, 돌리는 자신을 자해하면서까지 반대를 한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남편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간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돌리는 존과 결혼하기 전의 앤서니와 뜨거웠던 시절을 회상한다. 결국 잭은 마거릿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지만, 결혼하고서도 계속 지니를 찾아간다. 그렇게 돌리의 삶의 단편들이 순간순간 지나가고, 이제 그녀는 나이가 들어 그 시절들을 다시 회상한다.

"시끌벅적하게 소란을 피우고 한시라도 빨리하려고 서둘렀던 그 모든 게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존은 평생 도안 지니를 찾아가는 길에 어째서 마거릿에게 예의를 지키는 전화를 걸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잭 말인데요, 그는 진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내 편이었을까요, 아니면 반대편이었을까요? 그리고 앤서니. 내가 몇 번이고 그에게 굴복하고 또 굴복했을 때 대체 앤서니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P 47)"

사실 이 소설집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한편 읽고, 또 다른 편으로 바로 넘어가기엔 무언가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또 한편을 읽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선뜻 와닿지 않아 다시 읽기도 했다. 조금은 우울하기도 하고, 조금은 위트 있기도 한 그녀의 문체를 읽으며 삶의 단면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삶은 단면 단면들은 격렬하고, 치열하고, 어떤 땐 우울하기도 하지만, 결국 지나가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노년에 인생이라는 책을 열어보았을 때 미소 짓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래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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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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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극장에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한 SF 영화를 볼 기회가 있다. 스크린 가득 넓은 우주 공간이 펼쳐지고, 우주선에 연결된 가느다란 생명선 하나에 의지해 우주 공간을 유형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가 일어나서 생명선이 끊어진다. 그리고 남자는 넓은 우주 공간으로 던져진다. 그는 그렇게 점점 스크린 밖으로 멀어진다. 산소가 남아 있는 한 남자는 오랫동안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산소가 다 사라져 그의 생명이 멈춘 후에도 그의 육체는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만약 그의 영혼이 있다면 그의 영혼조차 그 광대한 우주 공간을 떠돌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치 우주 공간을 떠도는 존재가 나 자신이 된 것처럼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 나 자신이 심연(深淵)의 우주 공간으로 내가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 고안해낸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 오로지 광대함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 세계 속으로 내가 던져진다면, 내 기억과 육체도 모두 무(無)로 변하는 어둠으로 내가 던져진다면,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느끼는 공포는 어떠할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이런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내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광대하고 어두운 공간 속으로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시점을 놓쳐 버리기 일수이다. 점점 그가 묘사하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공간 속으로 던져지고, 어느 순간 그 세계에 대한 경이감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처음 도스토옙스키의 만난 것은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이다. 이 소설을 통해 페테르부르크의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을 라스콜니코프의 뒤를 쫓아 걸었었다. 심약한 라스콜니코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악마적인 생각들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읽으면서 매 순간 이 정도에서 이 책을 덮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멈출 수 없이 심약한 영혼의 여행에 끝까지 동참했었다. 소설을 끝냈을 때 아쉬운 마음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금 어둡고 광대한 세계 속으로 던져진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 방대하고, 더 절망적이고, 더 복잡한 인간 영혼 속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답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된다. 타락한 인간 영혼을 대표하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에게서 난 배다른 세 아들 드미트리와 이반, 알료샤가 있다. 아버지와 같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즉흥적이고도 다혈질적인 드미트리,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무신론자인 이반, 그리고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알료샤, 이렇게 세 아들이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가 있는 카라마조프가에 오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아버지 표도르와 큰 아들 드미트리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드미트리가 아버지와 집 안에 폭력을 행사하고 간 며칠 후 아버지 표도르가 살해당한다. 결국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몰리고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단순한 내용이 방대한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위대한 소설가인 도스토옙스키는 말년에 이런 단순한 내용을 이렇게 방대한 분량으로 소설로 완성했을까. 과연 그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카라마조프가로 대표되는 인간 영혼의 어둡고도 음습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스스로 타락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표도르는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이 목소리를 통해 그 표도르가 러시아의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말한다.

"지금 바로 이 지주에 대해 말해두려는 것은 그저, 그가 괴상하지만 주위에서 꽤나 자주 마주치게 되는 유형, 즉 너절하고 방탕할 뿐만 아니라 아둔해빠진 인간 유형 - 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할 줄 알고, 오로지 이런 일 하나만 할 줄 아는 듯싶은 그런 자들에 속하는 유형이었다는 점이다 - 중략 - 동시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우리 군 전체에서 가장 아둔한 반미치광이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이건 얼뜨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반미치광이들 중 대다수는 꽤 영이하고 교활하며 -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둔함, 그것도 그 어떤 독특한, 민족적 아둔함이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1권] P 19-20"

표도르는 타락한 인간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스토옙스키는 표도르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를 통해 타락한 인간 영혼 속에 다양한 영혼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큰 아들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탐미주의자이다. 그는 미적인 아름다움을 빠져들고, 그 미적인 아름다움이 자기를 잠식해 가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파괴해 간다. 물론 저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세 그 저항을 멈추고 마치 늪 속에 빠져들어가는 짐승처럼 그 미(美) 속으로 자신을 함몰해 간다. 드미트리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귀족 약혼녀가 있음에도 그루센카에게 빠져들어 자신을 망쳐가면서도 동생 알료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여기엔, 형제, 네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어, 한 사내가 어떤 미녀한테, 여자의 몸이라든지, 아니면 그저 여자의 몸의 한 부분에라도 반하게 되면, 그 여자를 위해 자기 자식들까지 내놓고, 아비와 어미도, 러시아도 조국도 팔아먹는 법이야. 정직한 인간이라도 가서 도둑질을 해. 온순한 인간이라도 - 사람을 베어 죽이고, 충직한 인간이라도 - 배반을 하게 돼. 여자의 사랑스러운 발을 노래한 시인 푸쉬킨은 자기 시에 발을 찬미했지. 다른 사람들도 소리 높여 찬미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귀여운 발을 보면 전율을 느끼게 마련이거든. 하지만 발뿐만이 아니야... 여기엔 형제, 경멸이라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어, 설령 그가 그루센카를 경멸하다 쳐도 말이지. 경멸하면서도 떨어질 순 없는 거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1권] P 162 "

이반은 냉철한 이성주의자이다. 그는 무신론적 사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마치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말하듯이, 그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에게 신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신을 그리워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는 괴로워한다.

알료샤는 종교적인 순수함을 추구한다. 그는 조시마 장로라는 수도사를 쫓아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순수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존경하던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평생 영혼의 정결함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썩은 육체 밖에 남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자신이 쫓던 것이 어쩌면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두려워한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라는 영혼의 다른 모습이 표도르라는 타락한 영혼 속에 녹아들어 가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들을 카라마조프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는 어둡고 음침한 타락한 인간 영혼의 광대한 세계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다 보면 그 타락한 어둡고 음침한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무섭고도 두려운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무(無)에서 무(無)로 던져진 존재일까. 신이 없고, 인간은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으로 던져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냥 표도르처럼 일생 자신만의 쾌락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존재일까. 도스토옙스키의 어둡고 절망적인 질문들은 어쩌면 그가 일평생 고민하고, 말년까지 고민했던 질문들이 아닐까. 소설은 이렇게 점점 절망적인 질문 속으로 우리를 던져 놓는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마지막에 한줄기 빛이 있다. 그리고 그 빛을 좇아서 다시금 그 어둡고 광대한 우주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그 희망은 항상 미완성으로 끝난다. 과연 그 희망은 도스토옙스키의 삶에서도 미완성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소설을 읽는 나는 일생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던져 준 그 희망을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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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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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한 남자를 따라 걸어갔다. 남자 역시 우산도 없이 도시의 뒷골목 속으로 걸어갔다. 해가 질 무렵의 도시의 뒷골목은 더러운 조명들과 빗물로 인해 검붉은색을 띠었다. 담벼락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 봉지와 그 봉지를 뒤지다가 갑자기 뛰쳐 도망가는 고양이만이 보였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어디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걸까. 그를 따라 들어가지만, 그가 도달한 끝이 어딜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를 따라가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려지는 이미지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마치 도스토옙스키라는 남자가 걸어간 그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는 느낌이다.

젊은 날에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실망했었다. 스스로 위대하고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하다가, 금세 진흙탕 속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기 환멸과 세상에 대한 증오에 휩쌓였다. 그때 처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어두운 뒷골목 속의 더 어둡고 침침한 방에 웅크리고 있던 라스콜리코프는 스스로를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는 인류를 위해 해충 같은 인간을 죽일 특권이 주어진다. 라스콜리코프는 자신을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웃집 노파를 해충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완전범죄에 가까운 범죄와 노파와 노파의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살인은 더러운 범죄가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렇게 위대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살인 후의 지독한 육체적 열병에 시달린다. 육체적 열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매일 밤 그의 마음속을 찾아오는 어두운 공포이다. 라스콜리코프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어두운 자아는 매일 밤 그를 끝도 모르는 심연으로 끌고 간다. 마치 코카서스 언덕 위에서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같은 절망이 그를 덮친다. 이렇게 소설은 라스콜리코프의 살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살인 후에 찾아오는 내면의 갈등과 공포를 그리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현대 심리소설의 시초로 부른다. 현대의 많은 소설가들의 작품 속에서 또 다른 라스콜리코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죄와 벌]을 읽고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속에서 탐구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나 내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할 수 없는, 종교나 철학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어둡고 신비한 깊이를 그는 소설로 드러내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그가 탐구한 어둡고 신비로운 인간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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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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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그런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곧 소설을 읽는 새로운 맛을 알게 되고, 다시 그 경험에 매료 된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이번 소설은 처음 경험해 보는 씁쓸한 맛이다. 이런 쓸쓸한 맛이 너무 강하기에 읽으면서 당혹스럽고, 속이 쓰린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면서도, 너무나도 괴로운 경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는 작가의 글로 인해 속이 후벼지는 느낌이었다.

[팡쓰치의 낙원]이란 소설은 주인공 팡쓰치라는 여성이 리궈화라는 중년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서 보도된 적이 있지만, 작가인 리이한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부유한 집에서 자라고, 대만의 대학 입학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이지만,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인해 평생 우울증과 자살 시도에 시달렸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이 책을 섰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객관화하면서 치유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이 책이 출간된 후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설은 부유층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단짝인 팡쓰치와 류이팅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어릴 적 부터 친구로 지내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리이원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의 집에서 그녀가 골라주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리궈화라는 남성이 등장한다. 리궈화는 문학 선생으로 입시전쟁이 치열한 대만에서 매우 유명한 학원 강사였다. 그는 두 아이에게 작문 수업을 해 주겠다면 접근한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아름다운 팡쓰치였다. 13살때부터 팡쓰치는 리궈화에서 성적으로 유린을 당한다. 결국 팡쓰치는 류이팅과 함께 대학에 진학했지 정신적 이상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리궈화가 아닌, 팡쓰치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 리이원이라는 여성에게 돌려진다.

이 책의 내용은 가슴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소설은 문장은 찬란하다. 마치 봄날에 비치는 햇살을 보듯이 아름답고 눈부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는 게 더 힘들고 괴롭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팡쓰치를 유린하면서 달콤한 문학적인 말로 자신의 성욕을 포장하는 리궈화의 말들을 읽을 때면 더욱 그런 감정을 느꼈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 날 원망하지 마. 넌 책을 많이 읽었으니 아름다움이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것 알거야, 넌 정말 아름다워, 하지만 모든 사람의 것일 수 없으니 내가 가질 수밖에. 넌 내 거야. 넌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널 좋아애, 우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따. 이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P 90)"

리궈화는 이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을 흠모하는 여학생들을 유린했고, 팡쓰치에게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한다. 소설에는 대만의 입시가 얼마나 치열한지, 그리고 그런 입시에서 그들의 성적을 이끌어주는 선생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한다. 더 힘든 부분은 이런 리궈화의 욕망에 대해 자신에 대한 사랑인지, 폭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팡쓰치의 마음이다.

"그가 내 사춘기를 찢어버렸지만 나도 내 사춘기를 찌어버릴 수 있어. 그가 한 것처럼 다도 할 수 있어. 내가 나를 버린다면 그는 나를 다시 버릴 수 없을 거야. 어차피 우리가 먼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했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네게 뭘 하든 상관없잖아. 안 그래? 진실이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도 선생님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 된다. (P 94)"

그러나 사실 이런 팡쓰치의 생각까지도 리궈화의 생각에 조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여자 아이를 육체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지배한다. 그는 팡쓰치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아이인 것을 알고, 그녀가 자신과의 일을 결코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인 류이팅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리고 계속 현란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조정한다.

소설은 단지 남성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런 폭력이 가능한 대만의 입시 구조와 입시 구조로 인한 권력, 그리고 남성 중심의 시각 등을 이야기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성공과 물질만을 전부로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절대권력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권력에게 자신의 몸과 생각을 빼앗기는 일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누군가 그녀에게 바른 시각으로 자기 자신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했다. 읽는 내내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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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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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가뭄이 심한 아프리카 초원으로 기억난다. 무슨 연유인지 다리에 상처를 입은 사자가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사자의 뒤에서는 하이에나들이 쫓아온다. 하이에나들은 사자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자의 허벅지부터 사자를 산 채로 먹어 치울 작정이다. 사자 역시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하이에나를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애써 멀쩡한 것처럼 걷는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린다. 마치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본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대할 때면 유독 이 장면이 떠오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도 상처 입은 짐승이 아닌가 모르겠다. 육체와 내면이 찢기고 망가져 서 있을 힘도 없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버틴다. 때로는 자신의 육체적 병이나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실없는 농담도 한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건지 뭐!'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었다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신의 먹어 치울 상대를 알기에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가끔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다. 가슴을 열어젖혀서 자신의 찢긴 상처를 보여 주며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 상처 입은 채로 쉰일곱의 나이로 오랜 기간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온 남자가 있다. 이미 열네 살 때 커다란 상처로 마음과 육신은 갈가리 찢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인생이란 밀림을 걸어온 남자가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남자도 한계에 이르렀다. 육체와 마음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를 감출 수가 없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 포효처럼 자신의 상처를 열어젖히고자 한다. 모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상처 입은 모습으로 버텼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잔치에 유일한 친구를 초대한다. 아니, 열네 살 때 친구였다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한 사람을 초대한다.  

다비드 그로스만은 한강 작가로 인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가이다. 그는 작년에 한강 작가에 이어 이 상을 수상했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에 대한 소개 글에는 그를 반전 작가로 소개하는 글이 많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무엇보다도  상처 입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이 존재한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바로 이런 작가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소설은 이제는 한물간 스탠딩 코미디언인 도발레가 오십 칠세의 생일날 한 술집의 무대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그는 특유의 익살과 몸짓으로 관중을 사로잡는다. 그 관중 중에는 그가 초대한 열네 살 때의 친구 아비사이가 있다. 그는 전직 판사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은퇴를 당한 뒤 혼자 칩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억에서 사라졌던 도발레의 전화를 받는다. 도발레는 아비사이를 자신의 무대에 초청한다. 도발레가 아비사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냥 자신을 봐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초대된 도발레의 쇼는 비록 성적 농담과 우스광스러운 행동들이 난무하지만 하룻밤 술집에서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코미디였다. 그런데 관중에서 변수가 발생한다. 한 키 작은 여자가 도발레의 거친 농담에 뜻밖의 반응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 순간부터 도발레의 코미디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성적 농담과 우스광스러운 행동 대신 어느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열네 살 물구나무로 거꾸로 걸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해한다. 그들이 무대에 기대한 것은 성적인 농담과 조금은 더럽고 거친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이었는데, 어느새 그 코미디언은 사라지고 상처 입은 열네 살의 소년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코미디를 하라고 소리친다. 자신들은 코미디를 듣기 위해 돈을 주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 도발레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성적이며 자극적인 농담들을 한다. 관중들은 그가 근근이 던져주는 농담으로 지루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소리를 치고 떠나간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이제 남은 사람은 아비사이와 키 작은 여자뿐이다. 그리고 그를 갈가리 찢어놓고, 영원히 회복시켜 놓지 못했을 어린 시절의 상처가 들춰진다. 아비사이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함께 보여주고 싶었던, 함께 들춰내고 싶었던 상처들. 그러나 43년간 혼자만 가지고 있었던 상처들은 아비사이에게 보여준다. 쇼가 끝나고 아비사이는 그에게 다가가 위로한다. 그런 친구에게 도발레는 말한다. 일 분만 더 사간을 내 달라고. 아비사이는 말한다. 한 시간도 낼 수 있다고.

소설의 매력은 책을 읽는 독자를 작가가 창조한 낯선 공간으로 끌고 가는데 있다. 때로는 극장에서 영화에 몰입하며 감독이 스크린에 창조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지만, 소설에 비할 바가 못된다. 물론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만든 세계에 들어가는 초반의 시간이 힘들지만, 일단 한 번 빨려 들어가면 독자는 쉽게 나오지를 못한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흡입력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빨아들이는 능력이 바로 소설의 힘이다. [말 한 마디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를 읽으면 바로 이런 힘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작가가 만든 타락한 도시 네타니아의 한 술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작고 왜소한 도발레의 쇼를 보게 된다. 관중들과 함께 웃고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가 또 다른 낯선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난봉꾼들의 잔치가 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오딧세이처럼, 눈이 멀어서 자신을 조롱하는 이방신전에 끌려 온 삼손처럼, 인생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도발레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도발레의 화려한 입담과 아비사이의 회상을 통해 도발레의 어린 시절로 끌려가게 된다. 이쯤 되면 벗어날 수가 없다.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군용차에 실려가 부모 중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장례식으로 끌려가는 어린 짐승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짐승이 마지막 맞닥뜨리는 충격적인 장면 앞에 함께 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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