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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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기 초이면 꼭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보통 설문지로 가정의 형편을 적어 내는 것이다.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들을 적어 내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손을 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모두 눈을 감아 보라고 말하며 '집에 텔레비전 있는 집 손들어 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없는 아이들도 친구들에게 가난하게 보이기 싫어 일부로 들기도 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 같다. 내 안에 타인과 비교의식이 생긴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애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런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똑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에 있는 것이 친구네 집에는 없고, 반대로 친구네 집에 있는 것이 우리 집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우리 안에는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으로 대표되는 어린 시절의 내밀한 기억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 작가가 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란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책은 1952년 여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 23)

 

주인공은 그날의 세세한 기억들과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날 입었던 옷, 라디오에서 방송한 드라마의 내용,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들, 그리고 그날의 결정적인 장면들까지.

 

"그릇을 치우고 밀랍을 입힌 식탁보를 걷어낸 뒤에도 어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어 있는 쥐구멍만 한 부엌에서 꿈지럭 거리며 연신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식탁에 묵묵부답 앉아 있었다. 그러다 돌연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붙잡고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이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게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내 어머니의 비명과 함께 "애야!"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실에서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라요!" 어두 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 손에는 나무 뭉치가 박혀 있던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다." (P 24)

 

그러나 부모님은 곧 화해하고, 그 후 이 사건은 한 번도 가정 안에서 화제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주인공의 의식 속에 남아 있고, 주인공은 그날 이전의 자신과 그날 이후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싸움의 상처가 주인공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이 평생 그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남겨진 것은 트라우마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물론 그 부끄러움의 감정의 실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마치 그날과 그날과 관련된 소소한 일상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전쟁 직후 건물을 부수고 재건축할 때 날리는 먼지, 흑백 영화, 흑백의 교과서 비옷, 짙은 색 외투 때문에 내 눈앞에 떠오르는 1952년의 세계는 과거의 동유럽 나라들처럼 한결같이 회색이다. 하지만 거리의 담장 너머로 늘어진 장미, 등나무 꽃, 어머니 치마처럼 푸른 바탕의 붉은 무늬가 새겨진 옷도 있었다. 식당의 벽지도 장미꽃무늬였다. 그 사건이 벌어졌던 일요일은 날씨가 좋았다. 당시의 세계는 의례적인 정적만이 감돌았다." (P 65)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다녔던 가톨릭 학교 (소설에서는 기독교 학교로 번역되어 있는데, 소설 내용상 가톨릭 학교가 맞을 거 같다)에서 그녀가 흠모하거나 닮고 싶어 하던 선생님이 우연히 그녀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던 장면이다. 가톨릭 학교여서 축제가 많았는데, 그날도 늦게까지 축제에 참여하고 새벽에 선생님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렸고, 마드무아젤 L.이 내가 사는 동네까지 학생을 데려다주는 일을 맡았다. 새벽 1시경이었다. 나는 식품점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게에 불이 켜지더니 구겨지고 얼룩덜룩한(오줌을 누고 옷으로 그냥 닦았기 때문에) 속옷 바람으로, 잠이 덜 깨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산발한 어머니가 현관 불빛 아래에 나타났다. 마드무아젤 L.과 몇몇 학생들이 하던 이야기를 뚝 멈췄다. 어머니가 어물 머물 인사말을 건넸지만 아무도 답례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이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져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졌다." (P 118)

 

주인공에게 있어서 1952년은 단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사건만이 일어난 시기가 아니었다. 단지 그 사건이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해 주인공은 가톨릭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시선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전까지는 당연히 여기던 세계가 그녀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각인시킨 사건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던 사건이다. 그녀가 다른 가정과 친구들에게서 보았던 교양 있고 풍족한 모습과 그녀의 집에서는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그 부끄러움의 실체와 결과를 이렇게 고백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P 137)

 

소설은 저자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내밀한 경험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첫 문장과 처음 묘사되는 사건이 너무 강렬했기에 이후의 소소한 묘사들과의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왜 이렇게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삶과 말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가면서 이런 세세한 것들이 바로 주인공의 내면을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내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부끄러움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흔히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미 치유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랫동안 씨름했던 그 내면의 문제를 이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내어 놓는다. 한때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남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상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멀어졌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아니, 그것을 토로하며 가까웠던 사람도 멀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은 더 부끄러움이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담담한 시선으로 이제 그 부끄러움을 글로 이야기한다. 이 소설 이후 작가는 변했을까?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도 자신의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글쎄, 다른 것은 몰라도 이전보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내밀한 이야기들이어서 마치 소녀의 일기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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