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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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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항상 제도화된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 봤다. 톰소여 와 허클베리핀처럼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그런 생각을 다 버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선뜻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물질 때문이다. 과현 현대 사회에서 물질이 없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요즘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도 보험료나 기본적인 공과금은 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과연 현대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도 든다.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저자의 현대 문명과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인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알고 보니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이 먼저 출간된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물론 쓰이기는 [미국의 송어낚시]가 먼저 쓰였으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해,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이 먼저 출간되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1960년대 미국의 비트 세대의 작가답게 소설에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 속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 그리고 자유로운 성관계와 마리화나 같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소설은 주인공인 제시가 빅서에서 온 '리 멜론'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리 멜론은 꽤 미남이지만, 이빨이 대부분 빠져서 틀니를 끼고 다니는 조금의 괴짜인 사람이다. 일을 하기 싫어서 무위도식을 하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남북전쟁에서 유명한 '오거스터스 멜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오거스터스 멜론이란 인물은 남북 전쟁의 기록이나 역사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소설에서는 과연 그런 인물이 실제 했는지조차 아리송하다.

도시 생활에서 견디지 못한 리 멜론은 결국 고향이 빅서의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매일같이 제시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조른다. 결국 제시는 리 멜론의 빅서의 오두막집에서 같이 생활한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던 전원생활의 실제는 궁핍하기 짝이 없다.

- 그날 저녁 우리 저녁 식사는 별로였다. 고양이도 안 먹는 음식을 어떻게 우리가 먹는단 말인가? 우리는 먹을거리 살 돈도 없었고, 돈이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럭저럭 살고 있다. 지난 4,5일 동안 우리는 누군가가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와주기를 기다렸다. 여행자가 되었건, 친구가 되었건, 그러나 사람들을 빅서로 끌어당기는 이상한 힘이 여러 날 동안 작동하지 않았다. - 중략- 날마다 전복만 먹었기 때문에, 앞으로 또다시 전복을 먹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죽고 말 것이다. 전복을 한 입만 물어도 내 영혼은 치약처럼 빠져나가서 영원히 우주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P 84)" -

결국 이들은 지나가던 청년을 협박해 6 달러 72센트를 빼앗고, 그것을 가지고 도시로 나간다. 그곳에서 제시는 일레인 이란 여자를 만나고, 리 멜론은 엘리자베스라는 여자를 만나 함께 빅서의 오두막으로 돌아와 생활한다. 거기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반쯤 미쳐버린 로이 얼이라는 사업가까지 함께 살게 된다.

소설의 내용은 현실적이면서도 또한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 마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몇 달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지만, 부자인 로이 얼이 백 달러 지폐를 바다에 뿌릴 때면 말리기보다는 오히려 도와준다. 이 장면에서 저자는 물질문명에 대해 비틀어주기식의 비판을 한다.

- 갈매기 한 마리가 우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옷을 입고 리 멜론과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로이 얼이 그들고 함께 있었다. 내가 놀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들은 모두 파도를 보고 서서 로이 얼의 돈을 태평양에 뿌리고 있었다. 100달러 지폐가 수백 장 그들의 손을 떠나 바다로 던져지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내가 말했다. 여전히 손에서 100달러 지폐를 떨어뜨려 물 위에 떠나니 게 하면서, 리 멜론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로이 얼이 더는 돈을 원하지 않는대. 그래서 우리가 돈을 버리는 것을 도와주는 거야." "우리도 이 돈을 원하지 않거든."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 돈이 내게 해 준 일이라고는 나를 여기에 데려다준 것뿐이야" 100달러 지폐가 새처럼 바다에서 날아다니는 동안, 로이 얼이 나서서 말했다. "너도 이 돈을 가질 수는 없어." 그는 파도에게 말했다. "이 돈을 네 고향으로 가지고 가." 파도는 그렇게 했다. (P 212) -

소설에서의 리 멜론과 오거스터스 멜론이라는 남부 장군은 이제는 문명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자연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비록 현실 감각은 없지만, 문명사회를 비웃어 줄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인물이다. 가끔은 아웅다웅하는 세상에서 리 멜론 같은 인물이 그리워지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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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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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들이라면 가끔은 여자들만이 사는 무인도에 혼자 떨어지는 환상을 꿈꾸곤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모든 여성들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이슬람에서는 죽은 후에 가는 낙원이 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낙원일까. [매혹당한 사람들]이란 소설에는 아름다운 여성들만이 사는 외딴곳에 떨어진 한 남성이 나온다. 다만 그곳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만큼 아름다운 낙원은 아니다.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버섯'처럼 아름답지만 독을 간직하고, 상대를 파멸시키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장소이다.

언제부터인가 소설 원작을 영화한 작품을 보려고 하면 꼭 소설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어린 시절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 내내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가 떠올라 소설 속의 인물의 감정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유명한 영화가 개봉하면 원작을 먼저 보는 습관이 생겼다.

[매혹당한 사람들]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조금 더 광범위한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다면 매혹당한 사람들은 버지니아주 외딴 숲 속에 있던 판즈워스 신학교라는 곳을 배경으로 8명의 여자와 한 명의 부상당한 북군 군인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버지니아주의 숲 속에 위치한 판즈워스 신학교는 한때 이 지역에서 가장 명망이 있던 판즈워스 가문의 고택이다. 이제 옛 영화는 사라지고 두 자매인 마사 판즈워스와 해리엇 판즈워스만 남아서 여성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말이 신학교이지, 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숙학교 정도의 개념이다. 그나마 남북전쟁의 발발로 많은 여학생들이 떠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오갈 데 없는 5명의 여학생들과 오래전부터 판즈워스 가문에 노예로 있던 '매티'라는 흑인 여자 노예만이 남아 있다.

판즈워스 신학교 근처에서 치열한 북군과 남군의 전쟁이 벌어지고, 부상당한 존 맥베니 상병이 산속에서 어밀리아 대브니라는 이 학교 학생에게 발견된다. 어밀리야는 맥베니를 데려오고, 맥베니는 8명의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소설은 8명의 여성의 시각에서 돌아가면서 맥베니가 판즈워스 저택에 들어오는 과정서부터 그의 파멸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모두들 맥베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맥베니의 워낙 말주변이 좋아서 여성들에게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특히 항상 결단력이 있고, 냉철한 언니 마사 판즈워스보다 모든 부분에서 어리숙하고 친절한 해리엇 반즈워스에게 접근하는 부분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능숙하다. 그는 판즈워스 집에 들어온 다음 날 바로 부상당한 몸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자신을 간호하는 헤리엇에게 아주 능숙하게 접근해 키스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처음에 그렇게 키스했을 때, 그러니까 그 어린 아가씨와 키스했을 때 난 후회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거기 서 있는 당신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겠죠. 내가 신사답지 못하고, 천박하고, 그 외에도 관습에 얽매인 말들을 하겠죠.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죠. 해리엇 판즈워스, 난 당신을 모욕할 생각이 없어요. 이 상황이 처음 그 당시, 그러니까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와 똑같고, 난 처음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그래도 되냐고 물었더라면 당신은 안 된다고 하겠죠. 그래서 당신에게 묻지 않았어요. 이제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언니에게 말해도 좋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반란군을 불러 모아도 좋고요." (P184)

언니 마사 역시 맥베니의 교활함을 조금은 눈치채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는 다정하고 솔직했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순수함 이면에 교활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교활함이 소년의 장난기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분명 교활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존 맥베니 상병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속으로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P 134)

맥베니는 특히 판즈워스 학교에서 가장 어른이며 미인인 흑발의 에드위나 모로와 여성성이 뛰어나면서도 어머니를 닮아 남성을 유혹하는 재능이 있는 얼리샤 심스에게 호감을 느끼며 접근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접근이 파국의 서막이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밀폐된 공간인 파즈워스 학교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기묘한 감정의 변화와 내밀한 욕망의 표출이 너무나 세밀하고 표현되어 있어 읽는 내내 마치 그 공간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어떻게 남성으로서 그렇게 여성들의 심리를, 그리고 내밀한 욕망을 잘 그릴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얽히고설킨 8명의 여성들의 관계와 맥베니의 감정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섬세해서 읽는 내내 작가가 여성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맥베니가 다시 부상을 당한 후 점점 악의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나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마치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가 더욱 기대가 되었고, 영화를 감상 후 소설과 함께 비교해서 리뷰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연 영화에서는 이런 치밀하고 섬세한 관계들을 어떻게 긴장감 있게 표현했을까. 거의 50년 전에 씌여진 소설이 이처럼 감성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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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레어 에디션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형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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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연히 몇 편의 고전들은 생애의 중요한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읽게 된다. 몇 번 읽은 고전들은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지만, 읽을 때마다 그 시기에 느끼고 있었던 아픔이나 고민, 감동 등과 결합되어 매 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번에는 문예춘추사에서 새로 발간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개의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한 권으로 묶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책들은 어렸을 때 문고판으로 읽고, 청년의 시기에 온전한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제 중년의 입구에 이르러서 다시금 읽게 되었다. 예전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으면서는 주인공들의 어리석은 선택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악당들의 술수가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읽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내게 씁쓸함을 남겨준다. 이 나이에 들어서 비극들을 읽다 보니, 이것이 단지 책 안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들이 우리 삶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는 아니가 되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햄릿]을 읽으면서는 여전히 햄릿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햄릿]의 죽은 햄릿의 아버지이자, 덴마크 왕의 유령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햄릿의 아버지의 유령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와 숙부가 공모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미친척하면서 시기를 엿보지만 계속해서 고민만 하다가 오히려 모든 문제가 더 복잡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그 복잡한 문제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역사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결국엔 과감하고 잔인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정도전이나 이방원,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결에서도 먼저 과감하고 잔인하게 상대를 죽인 이방원이나 수양대군과 같은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현대 정치사나 재벌가의 싸움 등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자기편을 모으고, 주저 없이 상대편을 빠르게 짓밟는 사람이 결국엔 권력을 차지한다.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햄릿처럼 빠르고 과감하게 상대를 짓밟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민하다가 때를 놓치고, 결국엔 빠르게 행동하는 악인들의 술수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결단할 때 점점 더 고민하고 망설이게 된다. 과연 이 선택이 옳은 건지, 이 선택으로 오는 그 무거운 책임을 내가 다 짊어질 수 있을는지, 이 선택으로 인해 희생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은 어떻게 할 건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기를 놓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젊은 시절 그렇게 싫어하던 우유부단한 햄릿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내가 가장 읽기 고통스러워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셀로]는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유능한 베니스의 무어인 장군인 오셀로는 군대의 지휘권과 아름다운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오셀로를 시기한 아이고의 계략으로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카시오와 데스모나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아내 데스모나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괴로운 이유는 눈에 뻔히 보이는 아이고의 계략에 넘어가는 오셀로와 주변 사람들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괴로움을 현실에서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이고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상관에게 동료를 위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상관의 질투심이나 권력욕을 자극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히 뒤로 빠진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런 아이고와 같은 술수에 넘어가고, 현실에서 아이고는 비극의 결말을 교묘히도 피해 간다.




노년에 아랫사람의 아부에 눈이 먼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리어왕] 역시 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영국의 리어왕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세 딸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려 한다. 그리고 세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보라고 한다. 큰 딸 거너릴과 둘째 딸 리건은 번지르르한 말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셋째 딸 코넬리라는 아버지의 대한 진실한 사랑을 차마 말로 고백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 아버지의 증오를 얻게 된다. 결국 두 딸이 아버지의 영지를 나누어 가지고, 막내딸은 무일푼으로 프랑스 왕과 결혼한다. 나중에서야 두 딸의 홀대 속에 속았음을 깨달은 리어 왕은 미처가고, 아버지를 구하러 영국으로 돌아온 코넬리아는 전쟁에서 패전하고 죽는다.


다시 읽어도 자신에게 가장 멋진 아부를 하는 딸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리어 왕의 선택은 너무나도 어리석어 보인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은 뻔한 세상 이치인데... 그럼에도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받아들이고, 조금의 비판이나 서운한 말에도 순식간에 분노하는 것이 나이 든 권력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권력으로 인해 미쳐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맥베스]는 다시 읽어도 명작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마녀에 코더의 영주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은 맥베스는 자신이 코더의 영주가 되자, 왕이 된다는 예언까지도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내의 부추김에 결국 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그 후 마녀의 다른 예언들을 두려워하여 경쟁자들을 죽이고, 권력에 미쳐 스스로 파멸해 간다.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의 예언은 어쩌면 인생의 미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우리에게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저것만 얻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또다시 쟁취해야 할 것이 생긴다. 결국 많은 사람은 인생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맥베스는 인생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이렇게 절규한다.


"내게 그렇게 말하는 혓바닥에 저주 있으라.
그 함마디가 나의 용기를 꺾는구나.
그 요망한 악마들을 절대로 믿을 수 없구나.
이중의 뜻으로 우리를 속여
귀에는 약속의 말을 늘어놓고,
막상 소원하면 그것을 깨뜨린다."
- 셰익스피어의 [멕베스] 중에서 -



앞으로 또 얼마 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게 될까? 그리고 그때에는 이 작품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때도 이런 비극들을 읽으며 인생의 씁쓸한 맛을 느낄까? 아니면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라고 관조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될까? 조금 긴 내용이지만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햄릿의 명대사로 이 서평을 마치려 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고상한 일인가?
아니면, 밀려오는 고난의 바다에 대항해
무기를 들어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상한 일인가?
죽는다는 건 잠든다는 것 - 그것뿐이다.-
잠들어 버림으로 육신이 물려받는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런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다는 건, 잠든다는 것.
잠든다면, 아마 꿈을 꾸겠지. 아, 그게 문제로구나.
우리가 이 삶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죽음이란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될 건지가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구나.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그리 오랜 불행으로 이끄는 이유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폭군이 횡포 건방진 자의 무례함,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 재판의 지연과
관리들의 거만함, 참을성 있는 대인배들이
소인배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참을 수 있겠는가?
한 자루의 단검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는데,
어느 누가 이 지루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투덜대며 살겠는가?
하지만 죽음 뒤에 올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과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우리의 의지를 혼란스럽게 하고,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세에서 당하는 저런 고통들을
참고 견디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결심의 자연스러운 색조도
생각의 창백한 색조로 그늘져,
심오하고 중요한 계획들이 이런 식으로 길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행동이라는 이름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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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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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나는 유독 위선적인 삶에 적응을 하지를 못했다.

조금의 지식이나 부를 가지고 인생을 성공을 다 가진냥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게 옳다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로인해 조직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타인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얼굴에 나타났기에 그것을 속일 수도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틀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그것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대었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면서 그런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회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얼굴표정을 감추고 동의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젊은 날의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오랫동안 벼르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여기에 위선적인 것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조르바라는 한 사나이가 있다.

조르바는 위선을 떠는 세상이나 종교인, 지식인들에게 진탕한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부어야 속이 풀리는 남자이다.

그런 조르바를 연인보다 더 좋아하고 따르는 남자가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분신이기도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그리스인으로서 크레타섬의 갈탄 광산의 운영권을 구입해서 크레타섬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항구에서 조르바라는 남자를 만난다.

걸죽한 입담에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듯한 말투와 행동에 주인공은 마음이 빼앗긴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여 그를 크레타섬으로 데리고 간다.

언뜻보면 한량으로 보이는 조르바는 갈탄공장의 감독관이 되어 광산의 실제적인 일들을 다 처리해 간다.

낮에는 광산에서 일하고, 밤이면 주인공과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경험과 인생관을 이야기 한다.

 

사실 조르바의 경험과 인생관이란 어지보면 여느 난봉꾼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

조르바는 결혼을 했으나 가정도 버리고 떠돌아 다니며 온갖 여성을 만난다.

그는 인간의 죄는 어짜피 모두 하나님에게 용서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외로운 여자를 혼자 두는 죄이다.

(책에서는 더 원색적인 표현을 쓴다.)

그래서 그는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며 세상을 떠돈다.

크레타섬의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터키와 싸우기도 하고, 불가리아와 전쟁에 참여하기 했다.

사실 나는 조르바와 비슷한 사람들을 몇 명 겪었기에 그들의 인생 무용담이 대부분 과장 되었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조르바의 무용담도 여성 편력에 대한 자랑도 과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막 사는 것 같은 조르바이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인생관이 있다.

과거도 생각하지 말고,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속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그 욕망을 분출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 모든 종교나 사회적 제도, 위선 등은 그의 특유의 입담으로 비웃어 준다.

 

반면 주인공은 그런 조르바를 좋아하지만 조르바와는 달리 금욕주의자이다.

(주인공의 모습은 젊은 시절 수도승이 되고 싶어햇던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르바의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하지만 그 안에 남은 금욕적 생각이 그의 행동을 막는다.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이 살지 못하는 삶을 사는 조르바를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욕망을 해탈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자신이 어린 시절 버찌를 좋아햇는데 조금씩 먹다보니 그것에 대한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금화를 훔쳐 버찌를 사다가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고 말한다.

그 후로 그는 버찌 냄새도 싫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욕망을 그 욕망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해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자신 안에 있는 욕망에 정직해 질 것을 요구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젊은 날에 읽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계속해서 오버랩 되었다.

니체는 세상의 관습과 신의 지배를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인 초인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초인을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로 형상화 해서 이야기 했다.

어쩌면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짜라투스트라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니체가 이야기 하는 짜라투스트라와 조르바는 닮아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드는 질문이 있었다.

"과연 조르바는 초인인가?"

과연 조르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신 안의 목소리에 따르는 인생을 사는 초인인가?

조르바를 초인이라고 부르기에 그는 뭔가 부족하다.

그는 내 주변에서 자주 보는 한량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정을 버리고,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 합리화를 위해 세상의 법과 도덕을 비웃는 사람들...

멋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떠들지만, 마음 속에는 공허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런 나의 의문은 책을 다 읽은 후 번역자인 이윤기 작가의 해설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초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슈퍼맨>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니체가 <우버멘슈>라고 부르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의 <초인>은 초월을 완성시킨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호전적인 인간,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목적지가 아닌, 도상의 다리 같은>인간이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진정한 초인은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베르그송과 니체에게 공감하는 분위기에는, 삶에 대한 일종의 비극적인 인식이 짙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두 유럽 정신 사조의 특징이기도 하다.(P455)

니코스 카찬차키스에게 있어서 조르바는 초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당당하게 누리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얽매고 있는 윤리와 관습, 무엇보다도 마음 깊은 속에 있는 위선적인 종교의식과 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싸움이 너무나 처절했기에 그 싸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조르바를 동경했을 것이다.

조르바는 주인공이 그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의 스승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조르바와 같은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그리고 그가 만든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과 치열하게 싸우는 그런 정신과 삶을 동경한다.

그것이 나와 다른 방법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세상에 정복되지 않고 그 세상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삶은 무엇이든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리보다는 초월을 향하는 작가의 정신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져 있기에 읽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번역가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번역으로 다른 번역서보다는 쉽게 읽히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윤기 작가의 번역을 좋아한다.

그리고 책 뒷부분의 번역자의 해설 또한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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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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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잠시 작은 시골마을에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마을이 산중턱에 있어서 겨울이면 유독 눈이 많이 내리던 마을이었다.

눈이 내리면 쉬지 않고 내려서 산과 도로가 모두 눈에 덮였다.

어느 해 겨울인가는 눈이 너무많이 걸으면 무릎까지 눈이 쌓였다.

집 앞의 화장실도 걸어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와 사람이 다니는 샛길까지 모두 눈에 덮여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의 고요함과 적막감, 그리고 그 고요와 적막이 중는 평안함......

지금은 너무나 복잡한 곳에 살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차와 사람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시기와 환경, 그리고 그 때 느꼈떤 마음이 떠오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란 책을 읽으며 다시금 눈 덮인 작은 시골마을을 다녀왔다.

이 책을 열면 주인공 시마무라와 함께 기차를 타고 눈 덮인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냐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넢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의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P7)

시마무라는 눈 속 마을로 인도하는 기차 안의 맞은편에는 병자를 간호하는 애달픈 여인 요코가 앉아 있다.

시마무라의 목적지는 눈 덮인 나가타현의 한 온천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예전에 만났던 고마코라는 여자를 찾아오는 길이다.

그러나 고마코를 만나러 오면서도 시마코는 계속해서 요코가 신경이 쓰인다.


작 년에 시마무라는 우연히 눈 덮인 시골마을 여관에 머무르다가 19살의 게이샤 수업을 듣고 있는 고마코를 만난다.

(소설에서는 고마코는 시마무라는 다시 만난 후 199일만의 만남이라고 한다.)

고마코는 도쿄에서 결혼을 했었던 경험도 있으나 무슨 사연이 있는지 이 곳 시골마을에서 게이샤 수업을 듣고 있다.

그녀는 의외로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마무라는 그런 그녀와 정을 나누는 만남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고마코는 이미 게이샤가 되어 있었고 매일같이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그리고 술에 취해 틈틈히 시마무라가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온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마무라 역시 그의 특유의 허무적인 생각과 표현으로 코마코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며 고마코의 친구인 요코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눈 덮인 시골 마을의 풍경묘사와 함께 세 남녀 사이의 심리를 저자의 특유의 감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무심한듯 서로를 그리워한다.

이 소설에서는 눈 덮인 일본의 온천마을 풍경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 역시 뛰어나다.

특히 시마무라를 향한 고마코의 마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남성이 어떻게 저렇게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실은 내일 돌아갈까 생각중이야"

"어머, 어째서 돌아가려는 거죠?"하고 고마코는 눈이 번쩍 뜨인 듯 얼굴을 들었다.

"내가 계속 있어봤자 당신을 어떻게 해줄 수도 없잖아?"

멍하니 시마무라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격한 어조로,

"그게 틀렸어요. 당신은 그게 틀렸따고요"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일어나 느닷없이 시마무라의 목에 매달려 몸부림을 치다가,

"당신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게 틀렸어요. 일어나요. 일어나라니까요"하고 중얼거리며 제풀에 넘어졌다. 광기마저 띠고 몸이 불편한 것도 잊었다.

그러고 나선 따스하게 젖을 눈을 떠,

"내일은 정말로 돌아가세요"라고 나직이 말한 뒤, 머리카락을 주었다. (P70)

이 소설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에 불이 나는 장면이다.

눈이 녹고 다시 눈이 오기 전의 짧은 시기의 어느 날 저녁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다시 만나 마을을 걷는다.

유난히 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지던 그 밤,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난다.

그리고 그 불 속에서 요코는 2층에서 떨어진다.

고마코는 시마무라의 품 속에서 빠져나가 그 불 속으로 들어가 요코를 데리고 나온다.

저자는 이런 급박한 상황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낸다.


불은 영사기를 세워놓은 입구 쪽에서 난 듯, 고치 창고의 절반쯤은 이미 지붕도, 벽도 다 타버리고 없다. 기둥이며 대들보 같은 골격만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판잣지붕, 벽, 마루가 전부인 텅 빈 창고일 뿐이어서 안에서는 연기도 별로 나지 않았따. 충분히 물이 뿌려진 지붕도 더 이상 타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길은 계속 번져 엉뚱한 곳에서 불꽃이 생겼다. 석 대의 물펌프로 허둥지둥 끄려고 하면 일시에 불똥이 치솟고 검은 연기가 일었다.

불똥은 은하수 속으로 퍼져나가면서 흩어져 시마무라는 또 한번 은하수 쪽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연기가 은하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은하수가 쏴아 하고 흘러 내려왔다. 지붕을 비껴난 펌프의 물줄기 끝이 흔들려 물안개처럼 희뿌연 것도 은하수 빛이 비추기 때문인 것 같다.  (P148)

물 속에서 일어나서 은하수로 닿으려는 불꽃과 연기가 어쩌면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 안에 있었던 감정과 사랑이었을까?

계속해서 뿌려지는 물주기는 허무의 감정일까?

그리고 그 허무 속을 뚫고 올라오는 불꽃처럼 이들의 사랑은 은하수에 닿았을까?


이 책은 노벨상 수상작가인 저자가 노년에 한 일본의 눈 덮인 시골 마을에서 쓴 책이다.

이 소설을 쓰고 저자는 다음 해에 자살을 한다.

사람의 인적인 끊긴 눈 덮인 시골마을에서 73세의 노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간 사랑과 감정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사랑과 감정이 모두 사라지게 하는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그 눈 덮인 시골마을로 데려가는 마력의 필치를 뽑낸다.

그리고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동안 그 필치에 끌려 눈 덮인 일본의 한 온천마을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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