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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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슬립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다준 과거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 부분만 바꾸면, 오랜 기간 자신이 겪었던 불행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눈앞에서 바로 그 사건이 펼쳐진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되지만, 이상하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 사건이 그냥 일어나도록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운명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과거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철학적인 주제보다 내가 타임슬립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 인생을 바꾼 끔찍한 사건인데, 그 시점으로 가서 다시 그 사건을 바라보니 그냥 꿈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감독 특유의 솜씨로 몽환적이고 모호한 아름다움을 가진 장면으로 비치기도 한다.

 

[커먼웰스]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영화는 타입슬립과 관련된 소설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가족 소설이나 성장 소설, 자전적 소설 정도가 될 것이다. 경찰관인 픽스는 아름다운 아내인 베벨리와 살고 있다. 두 딸인 캐롤라인과 프래리 라는 두 딸을 키운다. 지방 검사보인 버트는 테레사라는 아내와 함께 캘, 앨비, 홀리, 저넷이라는 네 남매를 키우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버트가 우연히 픽스의 파티에 갔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픽스의 아내 베벌리와 키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키스가 두 가정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 막장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오릴 것이다. 둘 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고, 각각 배우자에게 들켜서 물건을 때려 부수는 싸움을 하고, 여자들끼리 만나서 머리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개된다. 이런 시끄럽고 끔찍하고 지저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묘한 분위기로 회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두 가정이 베벨리와 버트의 키스 이후 파탄이 난 후 50년 후의 상황에서 진행이 된다. 픽스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상황이었고, 픽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프래리의 시각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소설의 처음은 프래리의 세례 파티 때 초대받지도 않은 버트가 방문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왁자지껄한 파티 분위기가 묘사되고, 그 분위기 속에 진을 들고 생뚱맞게 서 있는 버트가 묘사된다.

 

"앨버트 커즌스(버트)가 진을 들고 나타나면서 세례파티의 분위기는 딴판으로 달라졌다. 픽스는 미소 띤 얼굴로 문을 열고,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그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앞쪽 포치의 시멘트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앨버트 커즌스였다. 픽스는 지난 삼십 분 동안 문을 족히 스무 번은 열어주었는데 커즌스는 그를 놀라게 한 유일한 존재였다." (P 9)

 

버트는 픽스와는 업무상으로 경찰서에서 몇 번 스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파티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동료 한 사람뿐이었다. 그 동료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픽스의 파티에 갈 거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다. 주 중에 온갖 복잡한 사건에 시달리고 주말에는 임신한 아내와 세 명의 아이가 북적이는 전쟁통 같은 집을 벗어나기 위해 버트는 파티를 떠올리고 방문한다. 그냥 가기 멋쩍어 세례 파티에는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는 진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세례 파티는 술 파티로 바뀌고, 술 파티에 오렌지가 섞이고, 분위기는 금세 이상한 분위기로 바뀐다. 그리고 그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버트와 비벌리는 키스를 한다. 6명의 아이들과 두 병의 배우자, 그리고 본인들의 인생을 끔찍하게 바꾸어 버릴 이 사건을 저자는 이렇게 매우 모호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아름다움의 발명지가 되어온 이 도시에서 그녀는 아마도 그가 대화를 나눠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을 것이고, 단연코 부엌에서 옆에 서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핵심은 그녀의 아름다움이었고, 그 사실은 분명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오렌지를 하나씩 건넬 때마다 그들이 손가락 사이에 작은 전류가 흘렀던 것이다. 그는 매번 그것을 느꼈고, 그 찌릿한 불꽃은 오렌지 자체만큼이나 생생했다." (P 30)

 

어쩌면 당사자들이나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회상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때 버트가 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가 진을 가지고 오지만 않았어도, 진에 오렌지를 넣지만 않았어도, 둘이 같이 오렌지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둘이 닫힌 공간에 있지 않았어도... 이런 상상을 수없이 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 아픈 과거를 매우 아름다운 색깔로 묘사하고 있다.

 

6명의 자녀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정은 이혼을 하고 비벌리는 두 자녀들을 데리고 버트와 함께 버지니아로 가서 산다. 그리고 버트의 전 아내인 테레사는 4명의 자녀들을 키우다가 여름이면 그 네 명의 자녀들을 버트에게 보낸다. 결국 6명의 자녀는 여름이면 함께 시간을 보낸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8명의 식구의 여름 날들을 저자는 묘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8명이 시장통과같이 북적이면서 보내던 여름 어느 날 버트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8명은 왜건에 끼어 타서 호숫가의 모텔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버트와 비벌리는 다음날 점심까지 잠을 자고, 아이들끼리만 남자 6명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호수로 여행을 간다. 캐롤라인이 아빠에게 배운 옷걸이로 차 문을 여는 기술로 버트의 차를 열고, 아이들은 거기서 총과 술을 꺼내서 호수로 간다. 호수로 가는 무더운 길을 걸으며 캘은 자신이 챙겨온 알레르기 약을 나눠주고, 아이들은 알레르기 약을 술이나 콜라와 함께 먹는다. 다른 가정의 6명의 아이들, 낯선 호수길, 총, 알레르기 약, 진과 콜라. 이런 단어들과 묘사들이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뜨거운 오전 태양 아래 베나들릴 네 알과 크게 꿀꺽한 진 한 모금만큼의 잠을 자게 될 앨비 옆에 그들이 마신 캔을 내려놓았다. 캘은 홀리와 새 여동생들에게서 나머지 약을 받아 비닐봉지에 넣고,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초코바가 녹기 시작했고 총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그들은 그것들을 전부 다시 종이 봉지에 넣고 호수로 향했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그들 다섯은 부모와 함께 왔다면 허락받았을 만큼보다 더 멀리까지 헤엄쳤다. 프래니와 저넷은 동굴을 찾으러 갔다가 해안 작은 숲에서 서로 뚝 떨어져 있던 두 남자에게 낚시하는 법을 배웠다. 캘은 미끼 파는 가게에서 호호스 과자 한 봉지를 훔쳤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봉지에 든 총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P 122)

 

이 여름날의 경험 뒤에 프래리의 시각에서 이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 여름 내내 그런 식이었다. 그들 여섯이 함께한 매년 여름이 그런 식이었다. 그 나날이 늘 재미있었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나날이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뭔가를, 진짜 뭔가를 하고도 결코 들키지 않았다." (P 123)

 

어떻게 이런 묘한 시선으로 폭풍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시절들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은 소설의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조금 풀렸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이고, 작가인 앤 패칫 역시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속의 이야기의 화자인 프래리가 바로 앤 패칫의 또 다른 자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한 시절을 작가 역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는데 한참을 애를 먹었다. 과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 분위기를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모호하면서도 담담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과거의 묘사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인생을 후회나 원망이 아닌, 그렇다고 긍정적인 시선도 아닌, 참으로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과거도 돌이켜 보면 마치 꿈을 기억하듯 모호하고 담담하며, 어떤 때는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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