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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가끔 저녁이면 베란다 창문을 통해 건너편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반듯한 네모상자같은 집 안에는 서로 다른 가구와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삶은 어떨까? 행복할까? 그리고 이 시대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 시대에 행복하다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 광고에서 나오는 가구와 가전제품을 갖추고, 가끔씩 패밀리레스토랑에서 가족끼리 식사하는 정도? 너무 소박할까? 시대마다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행복의 틀에 자신을 넣으려 한다. 마치 미니어처집의 인형처럼 자기를 스스로 속박한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의 배경은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다. 17세기는 이전까지 대서양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지고, 영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영국으로 대서양의 패권이 넘어가기 전에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잠시나마 최고의 번영을 누린다.
이 소설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의 가문으로 시집 온 18세 소녀 '페트로넬라'의 이야기이다. 넬라라고 불리는 이 소녀의 집안의 네덜란드 시골에서는 꽤 이름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은 후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넬라의 어머니는 당시 여성의 행복이 부유한 상인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넬라에게 주입한다.
"자고로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남자하고 결혼해야 해." 그녀의 엄마가 펜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전 내세울 게 없잖아요." 넬라가 대답했다.
엄마를 혀를 찼다. "네 자신을 봐. 여자들이 가진 게 뭐가 있니?"
그 말에 넬라는 얼어붙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자신으 폄하하자 낯선 불안감이 엄습했고, 아버지로 인한 슬픔은 어느덧 자신에 대한 슬픔으로 바뀌었다. (P32-3)
"누군가의 부인이 되지 않으면 삶이 고달파져." 그녀의 엄마가 언젠가 말했다. "왜요?" 넬라라 물었다.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짜증이 사후에 남긴 빛 때문에 분노를 변해가는 것을 목격한 그녀였기에, 오트만 부인이 왜 딸을 자신과 똑같은 위험에 빠뜨리지 못해 안달하는지 물은 것이었다. 넬라의 엄마는 미친 사람 보듯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이번에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시뇨르 브란트는 도시의 양치기이고 네 아버지는 한 마리 양이었으니까." (P38)
넬라는 당시 네덜단드 동인도 회사의 간부이자,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 브란트라는 30대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가 시골집에서 암스테르담의 요하네스의 집으로 오던 날, 넬라의 기대와는 달리 넬라를 맞아준 것은 요하네스가 아닌 그의 여동생 마린이다. 어머니의기대처럼 부유한 상인에게 어울리는 현숙한 아내가 되고 싶었던 넬라의 기대는 처음부터 무너진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어둡고, 무언가 비밀에 쌓여 있는 것 같다. 하녀답지 않게 당돌하며 참견을 좋아하는 코넬리아,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 하인인 오토, 그리고 집안에서 모든 것을 명령하는 시누이 마린, 정작 남편이며 집주인인 요하네스는 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요하네스는 어린 신부보다 집안의 개들을 반겨준다. 넬라는 집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던 중 요하네스는 넬라에게 결혼선물로 아름답게 장식된 미니어처 집을 선물해 준다. 당시 네델란드에서는 어린소녀들이 이런 미니어처 집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행이었다. 넬라는 자신을 어리게 취급하는 남편에게 실망하지만, 정교한 미니어처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미니어처를 만드는 미니어처리스트를 찾아서 미니어처 집에 들어갈 장식품들 주문한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넬라가 주문하지도 않는 집안의 물건들이나 사람의 모양들을 보낸다. 그런데 그 모양이 너무나 정교하고, 마치 직접 보고 만든 것처럼 실제 집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과 똑같다. 심지어 시누이 마린의 속옷모양까지 똑같이 만들어 보낼 정도이다. 넬라는 누군가 자신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 온 미니어처들에게는 넬라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특이한 모습들이 담겨져 있고, 그것들을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브란트 집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고, 미니어처리스트는 이것을 어떻게 그대로 알고 미니어처를 만든 것일까?
이 소설의 작가 제시버튼은 영국에서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저녁이면 배우로 무대에 섰다고 한다. 그녀는 네덜란드 여행 중 물관에서 고급스러운 미니어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미니어처 속에 담긴 삶을 상상한다. 그렇게 [미니어처리스트]는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책이 되었다.
현대의 박물관에 유품으로 간직한 미니어처는 작가의 상상을 통해 패쇄적이고, 종교적 위선과 물질적 탐욕이 가득한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어느 상인의 집에 장식된다. 그리고 그 미니어처를 통해 작가는 당시 여성의 삶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마치 넬라의 성장소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성장소설과 다른 면이 있다면, 보통의 성장소설은 어린 소녀나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이 소설은 18세에 결혼한 넬라가 당시의 전형적인 네덜란드 상인 가정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넬라는 미니어처를 부수고, 스스로 그 미니어처에서 나와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자녀를 나아 대를 잇고 전형적인 당시 여성의 삶이 아닌, 남편 대신 상인의 삶을 살면서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려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과연 넬라가 소설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라는 생각이었다. 종교적 위선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서 과연 넬라가 상인으로서 한 가정을 이끌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은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에게도 드는 생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은 시대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만들어준 미니어처 속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넬라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