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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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던 초등학교 졸업반 겨울이 기억이 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우리 가족은 추운 겨울날 좁은 단칸방에 갇혀서 지내야 했다. 형제들은 매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져가야 할 준비물 비용이나 차비를 타내기 위해 부모님에게 온갖 투정을 부렸다. 부모님은 민망하다는 표정만 지었을 뿐이었다. 아예 아버지는 아침이면 어디를 가셨는지 보이지를 않으셨다. 그 해 겨울을 생각하면 비루한 기억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삶의 일부분이었다.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왜 계속해서 그 해 겨울이 떠올랐을까?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기 위해 구입해서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나 리뷰에서는 계속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을 언급한다. 아무런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국가, 무능했던 조정,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임금 등을 이야기한다. 중립외교를 표방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 되었던 인조와 측근들의 한계도 지적한다. 명과 멀어지고 청과 가까워지려는 광해군의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당연히 광해군의 정책을 반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 적을 충(忠)이나 의(義)라는 단어를 내세워 맞섰다. 그 결과가 국토가 유린 당하고 왕은 남한산성에 갇힌 치욕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소설에는 이런 병자호란의 배경이나 주변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다. 소설의 시야는 매우 좁다. 오로지 남한산성에 갇혀서 세상과 주변을 볼 뿐이다. 철저히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왕과 신하의 시각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 역시 같은 시각에 묶인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철저히 왕과 신하들과 함께 남한 산성에 갇혀 있었다. 청군이 어떻게 국토를 유린하는지, 지방의 군사들이 어떻게 도우러 오는지, 중국 대륙의 정세는 어떻게 변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후일의 역사적 판단 같은 것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 비루한 남한산성의 삶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왕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

성 안의 삶은 너무도 비루했다. 왕은 행궁에 머물렀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겨울비를 맞으며 성곽을 지켜야 했다. 추위에 백성들이 살던 초가집의 지붕까지 다 뜯어서 거적으로 만들어 깔아야 했다. 신하들은 그것마저 말의 사료로 써야 한다며 빼앗아간다. 백성들은 굶주린다.  군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다. 무기가 없어서 강가에 얼어붙은 바위를 캐낸다. 그것도 부족해서 적군이 올라올 때 부으려고 똥물까지 모은다. 비루하다 못해 처절하고, 처절하다 못해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그럴수록 밖에서는 청의 군사가 점점 더 옥죄인다. 백성들과 군사들은 점점 더 말라간다. 왕은 점점 말이 적어진다. 어둠 속으로 숨는다. 점점 더 비루해진다.

왕이 말이 적어질수록 말이 많아지는 사람들은 신하들이다. 그들은 온갖 대책을 내어놓는다. 물론 모두 말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첨예한 말의 대림을 하는 사람이 김상헌과 성 안에 활기를 띠는 것이라고는 신하들의 말뿐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그중 대표적인 두 사람이 김상헌과 최명길이다.

김상헌은 죽기까지 싸우기를 말한다. 그는 치욕적인 삶보다는 의로운 죽음이 더 낫다고 말한다. 삶이 죽음보다 가볍다고 말한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 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P 143)

반면 최명길은 치욕적인 삶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삶이 있어야 앞 날도 있다고 말한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P 249)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상황은 점점 왕의 선택을 강요한다. 선택은 간단하다. 가벼운 죽음을 맞을 것인가, 무겁고 치욕적인 삶을 견딜 것인가?

결국 왕은 치욕적인 삶을 선택한다.  왕은 청의 칸에게 글을 보내 삶을 구걸하려 한다. 김상헌과 신하들에게 항복의 글을 쓰게 한다. 모두들 치욕을 견디기 싫어 핑계를 대거나 죽음을 선택한다. 결국 치욕의 글은 최명길이 감당한다. 그리고 치욕의 무게는 왕이 감당한다. 드디어 왕은 남한산성에서 나와 치욕의 무게를 짊어지고 청의 칸 앞에 절을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남한산성의 비루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과연 누구를 비판해야 할까. 왕? 신하? 청의 칸? 아니면 굶주린 백성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결국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저 치욕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남은 왕의 비루함을 연민으로 눈으로 볼 뿐이었다. 결국 이 책은 누구를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 책이 아니었다. 비루함을 견디어 낸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 함께 비루했던 그 시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으면 얼마 전 읽었던 작가의 에세이집의 글이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글이었다. 무협소설을 쓰며 꽤나 인기를 얻었었다는 그의 아버지, 그러나 인기는 한때 뿐이고 계속해서 무능함을 보여주었던 아버지, 젊은 작가의 혜성같은 등단에 자신의 시대는 갔다며 밤새도록 통곡했다는 아버지, 술 취해 들어온 날이면 어머니의 잔소리에 조용히 구석 방으로 들어갔던 아버지, 작가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밤새 군불을 때었다고 한다.

어쩌면 남한산성에 갇힌 왕은 작가에게 아버지의 또 다른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비루한 삶에서 치욕을 견디면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그는 이 소설의 단 한 단락에서도 왕에 대한 비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타인의 삶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나의 삶을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남한산성은 그렇게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루한 역사의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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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1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제 이름 ‘해성‘이 있어서 당황했어요. ^^;;

가을벚꽃 2017-11-12 22:04   좋아요 1 | URL
이름이 해성이셨군요^^ 덕분에 오타를 잡았네요 ㅎㅎ 몇 번씩 글을 반복해서 읽었는데도 막상 다시 보면 오타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해성님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