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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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직면할 때가 있다.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있다. 얼굴을 돌리면 그 세상은 존재하는 않는 것 같고, 눈만 감으면 그 세상은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은 현실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에게 그 현실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작가라는 사람들이다.

 

 

 

6.25전쟁 전후의 좌우익의 잔혹한 대립을 묘사한 조정래 작가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학살장면을 그린 한강 작가, 그리고 칠레의 굴곡진 역사와 군사정권의 학살을 가족사로 이야기 하는 이사벨 아옌데 같은 작가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보여준다.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정국, 그리고 대통령 탄핵으로 우리의 현실만 보기에도 숨이 가쁜 2016년 연말이다. 이런 시기에 또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끔직한 현실을 보여주는 말런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라는 소설이다. 말런 제임스는 영어권 세계에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자메이카의 현실을 통해 영어권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2015년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 무엇이 이 영어권 사람들로부터 이 작품을 열광하게 했을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을 접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당황스럽기가 그지 없다. 장을 열자마자 살인과 강간, 폭력, 욕설과 총질이 난무하는 1976년 자메이카의 현실로 우리는 데려간다. 정제되지 않은 욕설과 폭력적인 언어, 외면하고 싶은 끔찍한 현실들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자메이카의 역사와 정치 현실과 얽혀 전개되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를 당황시킨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배경 지식이 필요했다. 먼저는 자메이카의 역사이다. 자메이카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쿠바의 근처에 있는 중앙아메키라의 섬나라이다. 오래 전 에디오피아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거래하던 장소로 인구의 대부분 역시 에디오피아 출신의 흑인들이다. 자메이카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2년에 독립이 되었다. 독립 후 자메이카 노동당이 집권을 했으나, 1972년부터는 좌파성향이 강한 마이클 맨리가 인민해방당으로 집권을 한다. 소설에서는 노동당과 인민국가당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된 1976년 선거를 전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하나는 '밥 말리'라는 인물이다. 밥 말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심지어 이름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가수'라는 익명으로 불린다), 이 소설은 1976년 일어난 밥 말리 저격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빈민가(소설에는 게토라고 부름) 출신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까지 오른 가수이다. 그는 성공을 했지만, 자신의 출신인 빈민가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친분을 가지고 지낸다. 또한 자메이카의 극단적인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소설은 이런 밥 말리의 평화콘서트에 위기를 느낀 노동당과 노동당을 후원하는 CIA,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게토의 폭력조직이 밥 말리를 암살하려 시도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런 사건을 시간의 흐름으로 전개하기 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했있던 끔찍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야기의 과정은 13명의 인물들이 서로 독백을 통해 전개 되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한 끔찍한 현실이 여과 없이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사람은 소설에서 밥 말리를 저격하는 밤-밤이라 불리는 어린 소년과 데무스라는 사람이다.

 

 

 

밤-밤은 어머니는 게토에서 두당 20-25달러를 팔고 몸을 판다. 그런 아내를 비난하며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데리고 온 폭력조직에 의해 끔찍히 살해 당한다. -밤은 이들을 피해 반대 조직인 파파-로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

 

 

 

데무스의 사연은 더 끔찍하다. 어느날 데무스는 샤워할 곳이 없어 옥상의 물탱크에서 샤워를 한다. 그때 마침 경찰이 한 여성을 강간한 강간범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무조건 벌거벗은 데무스와 몇 명의 사람들을 잡아간다. 경찰은 데무스에게 온갖 성적인 모욕과 고문을 한다. 그리고 몇 일 후 무죄라고 석방한다.

 

 

 

이들을 사주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위퍼'라는 인물도 끔찍한 사연이 있다. 무조건 총질을 하는 위퍼는 원래는 선량한 사람이다.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는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경찰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한다.  사건으로 위퍼는 끔직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경찰은 위퍼의 안경 왼쪽 렌즈를 깨뜨렸다. 위퍼는 안경을 바꿔 쓸 여유가 생긴 지금까지도 그날 망가진 안경을 그대로 쓰고 다닌다. 경찰은 위퍼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감옥에 그를 가뒀다. 옷 다 벗겨. 속옷까지 벗기고 간이침대에 묶어. 경찰이 말했다. 쌍년아, 너 일렉트릭 부기라는 게 뭔지 아냐? 놈들 중 한 명이 토스트 기계에서 뜯어낸 전기 코드를 가지고 왔다. 놈들은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한 놈이 위퍼의 자지를 잡고 한쪽 전선을 귀두 부분에 감자 다른 놈이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바티만이라 불러도 이해해라. 그러디니 놈들이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그때는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놈들이 반대쪽 전선을 위퍼의 손가락과 잇몸, , 젖꼭지와 똥꾸멍에 갖다 댔을 때는 달랐다. 이 일에 대해 위퍼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다." (P 137)

 

 

 

이렇게 자메이카의 현실이 만들어낸 괴물들이 밥 말리의 저격 사건에 가담한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인민국가당이 쿠바나 주변의 공산국가와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미국정권과 자메이카의 보수정권인 노동당, 파파-로라는 게토를 장악하고 있는 폭력조직의 두목, 그리고 파파-로 밑에서 실권을 차지한 조시 웨일스의 사주로 밥 말리의 저격을 시도한다. 결국 저자는 밥 말리의 저격을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보기에 앞서 자메이카라는 현실이 만들어 낸 부산물로 본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소설을 쓴 자메이카 출신의 작가 말런 제임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자신이 접한 그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자메이카라는 자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밥 말리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그 끔찍한 자메이카에 남아서 평화콘서트를 개최하며 자메이카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그는 정말 이런 상황에 있는 자메이카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다보니 다시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매주 촛불을 들고 모인 100만명의 시민들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그들은 매일같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몸서리치는 정치현실을 왜 외면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그 끔찍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과 맞서고 있을까?

 

말런 제임스라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자메이카의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조국 자메이카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메이카의 현실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그 자메이카를 버릴 수 없는 작가의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자메이카의 현실은 작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치 2016년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우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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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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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달콤해서 마치 신들의 품 속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내게는 어린 시절 언덕 위의 작은 집에 살던 기억이 바로 그 기억이다. 그곳은 시골의 작은 집으로 기억한다. 마을을 통과하는 작은 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마을 맨 끝 집이 내가 살던 집이었다. 날씨가 따스한 봄날이면 어머니는 도시락을 만들고, 나와 형제들을 데리고 뒷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코스모스가 만발하던 날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놀았던 기억들이 아직도 내 의식 속에 남아있다. 이미 그 공간은 재개발이 되어 다 사라지고 없다. 그 당시의 집도, 그 당시의 언덕도 다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 기억만은 여전히 내 의식 속에 남아 있다. 결국에 내가 죽고, 내 의식이 사라져야 비로서 그 기억도 끝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속 그 기억을 좇아가며 살아갈 것이다. 내게는 그 기억이 가장 따스한 신들의 품 속에서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들의 품속에 있었던 따스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 아일랜드 작가인 존 밴빌이 쓴 [바다]라는 소설의 주인공 맥스이다. 나이가 든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은 직후 어린 시절 자신이 자랐던 고향 마을의 바닷가를 향한다. 그곳에는 시더빌이라는 별장과 그 별장을 지키는 베베수어라는 나이 든 여성이 있다. 맥스에게 시더빌과 베베수어는 자신의 기억 속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신들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맥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맥스에게 신들의 장소와 신들의 시기를 선물한 사람들은 그레이스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의 맥스는 시더빌에서 여름휴가 차 내려 온 그레이스 가족을 보았을 때, 마치 그리스의 신화의 신들을 만난듯한 착각을 느낀다. 가난한 시골에서 항상 거칠고 폭력적인 부모님과 살던 맥스에게 여유롭고 신사적인 그레이스 가족은 신들, 그 자체였다. 포세이돈을 닮은 듯 권위가 있는 아버지 칼로 그레이스, 여신과 같은 그레이스 부인, 그리고 그의 딸 클로이와 쌍둥이 동생 마일스, 이들은 맥스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어린 맥스는 그 신들과 만나고 싶었고,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 중에 가장 처음 맥스가 동경했던 여인은 마치 여신과도 같았던 그레이스 부인이었다. 나이가 든 맥스는 시더빌 근처를 지나는 차 안에 있던 그레이스 부인을 처음 보았던 날의 어린 맥스를 회상한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내린 창문 밖으로 팔꿈치를 내밀었는데, 그녀의 머리 역시 뒤로 젖혀져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바람에 노르스름한 머리카락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소리는 내지 않고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 남자만을 위한 웃음이었다. 회의적이고, 관용적이고, 나른하면서도 즐거운 듯한 웃음, 여자는 하얀 블라우스에 하얀 뿔테가 달린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어디 있었을까? 어느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숨어 차를 보고 있었을까? 나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곧 사라졌다. (P 17)

 

 

맥스는 그레이스 부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레이스 부부의 딸 클로이와 아들 마일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다닌다. 맥스의 기억 속에서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스 신화의 그림들처럼 황홀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어머니뻘 여성에게 가졌던 환상이 모두 그렇듯 맥스의 환상은 곧 깨어진다. 어느 날 그레이스 가족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그레이스 부인의 품에 안겼을 때, 그 모두 동경과 환상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제 그 동경과 환상은 다시 클로이에게 향한다.

 

조금은 자기 중심적이고 멋대로인 클로이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처한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신들의 세계 속의 일원이 된듯한 환상을 느낀다. 그녀와 함께 극장도 가고, 수영도 하면서, 적극적인 클로이의 육체적 접촉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클로이와 마일스는 맥스를 남겨둔 채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소설은 성인이 되고, 이제는 늙은 맥스가 황량해진 바닷가 별장인 시더빌에서 죽은 아내와 클로이를 회상하는 부분으로 전개된다. 맥스가 그리워한 것은 죽은 아내일까? 아니면 아내의 이마고였던 클로이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레이스 가족과 보냈던 달콤했던 신들의 시절에 대한 기억뿐이었을까? 그레이스 가족도, 아내였던 애나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신들에 대한 기억만 남은 맥스는 자신이 쫓던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품에서, 또는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들의 품에서 따스하고 달콤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진다. 우리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그 따스하고 달콤해서, 마치 신들의 세계 속에 있었다는 환상을 일으키는 기억을 평생 좇아 다닌다. 고향 마을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맥스에게 맥스의 딸인 클레어가 비꼬듯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 속에 사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과거 속에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한,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도 아니다. 그래도. (P 62)

 

 

내게 하늘의 거친 바람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고 피할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뜻한 기억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기억 속을 쫓고 있는 것일까? 존 밴빌의 [바다]를 읽으며 외롭고 거친 삶을 산 한 남자의 따스한 기억 속을 여행하다 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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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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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한국작가 중 한 명을  꼽으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한다. 처음 그녀의 소설을 접한 것은 199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아내의 상자]를 통해서이다. 소외되고 거절 당하던 과거를 가진 아내가 결국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일탈을 선택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서도 소설 속의 아내의 선택이 끝내 마음에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처럼 느껴져 연민을 느꼈었다. 얼마 후 출간한 그녀의 장편소설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라는 소설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주인공 진희라는 여성이 마치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의 결혼 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읽은 은희경 작가의 [새의선물]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또 다른 진희라는 주인공이 어린시절 세상이 거짓을 일찍 깨닫고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새의 선물]의 어린 진희,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성인인 진희, 그리고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이 같은 여성이며, 그것이 모두 작가의 이야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만든 착각이자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소설 속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담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소설이 된 작가의 이야기는 그것이 진짜 작가의 이야기가 아님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이런 소설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더 확신시켜 주는 소설이다.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은 얼마 전 [길위의 소녀]로 만났었다. 소설 속에 뭍어나는 그 진실함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가였다. 작가는 자전적인 소설로 데뷔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다룬 소설로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제목부터 작가가 본격적으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뉘앙스를 준다.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도 작가의 이름과 같은 '델핀'이다.


델핀은 자전적 소설로 순시간에 인기를 얻는다. 그녀는 수많은 싸인회와 인터뷰를 다니며, 갑자기 닥친 유명세에 어리둥절한다. 내성적이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때마침 그녀의 우체통으로 그녀의 삶과 작품을 비난하는 편지가 온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그려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고, 그런 작품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델핀은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연히 L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L은 그녀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당당함과 우화함, 그리고 여성적인 매력까지 담고 있었다.

"내가 멋진 여자(내가 되고 싶었던 나무랄 데 없는 여자, 두말할 나위가 없는 여자 말이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는 늘 뭔가가 ​ 모자라거나 지나치거나 곤두섰거나 늘어져 있었다. 나는 곱슬곱슬한 동시에 뻣뻣한 이상한 머리결을 지녔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한 시간 이상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마스카라 바른 것을 잊고 밤늦게 눈을 비비기 일수였다. 극도로 조심하지 않는 한 자주 부딪혔고, 계단이나 튀어나온 지면에서 발을 헛디뎠고,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층수도 헷갈렸다. 그러나 이런 일과 나머지 모든 일들을 달게 받아들였다.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나으니까. 그런데도 그날 아침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L에게 배울 것이많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관찰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어쩌면 항상 놓쳤던 뭔가를 나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와 가깝게 지내다 보면 그녀가 어떻게 그 모든 것에, 그러니까 우아함과 자신감과 여성다움에 동시에 도달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P62-63)


항상 당당하고, 불의나 폭력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맞서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재치있게 대응하는 L을 보면서 델핀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차츰 그녀와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하게 된다. L은 그녀의 광팬이었으며 모든 작품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사실을 쓰기를 권고한다. 그녀는 독자가 원하는 것은 결국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미 독자들은 왠만한 픽션은 모두 접하고 있으며, 그것에 식상해 하고 있고, 픽션으로서의 소설은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작가 델핀이 써야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그녀 안에 있는 것으로, 그것을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을 준다. 델핀은 L의 말에 감동을 받고, 점차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델핀은 사실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점점 글을 쓰 수가 없게 된다. 수많은 강연회와 인터뷰, 기고 등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세 문장 이상은 글은 전혀 쓸 수가 없게 된다. 대필작가였던 L은 델핀의 집에 살면서 그녀를 대신해 글을 쓰고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 그리고 델핀으로 변장해 강연회까지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L에게 의지하며 L이 그녀를 대신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L이 주는 압박은 점점 강해진다. L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사실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사실을 쓸 수 있을까? 델핀은 L에게 이 세상에 진정한 실화소설이나 자전적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느끼는 거, 그건 단순히 그걸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들어? 그게 진짜 이야기 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거나 '매우 자전적인'이야기라고 네가 믿게끔 공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 들어? 간단한 광고 몇 마디로 너한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고 있는, 신문 3면 기사에 관한 호기심 같은 걸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들어? 하지만 나는 현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진 않아. 현실, 그것이 존재하다면,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해. 네 말대로 현실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변화되고, 해석될 필요가 있어, 소설가의 시선과 관점 없이는 아무리 잘 풀려봐야 죽도록 지루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엔 엄청난 불안을 야기하지. 그리고 어떤 재료에서 출발했든 그 작업은 언제나 픽션이라는 형태야." (P 273)


과연 델핀과 L 중 누가 맞는 걸까? 그리고 델핀은 자신의 생각과 L의 생각 중 누구의 생각을 따를까? 그리고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광기를 드러내는 L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는 타인에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신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읽었던 라캉의 글에서 라캉이 언급한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다. 라캉은 우리가 과거에 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환자가 의사에게 아무리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환자가 의사에게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의사를 대상으로 한 포장된 이야기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환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과거를 말할 때,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한다. 그렇게 과거가 미래로 향해가는 순간(이 소설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실화가 픽션이 되는 순간), 환자는 과거로부터 나와서 치료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사실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소설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이미 독자를 대상으로 글로 쓰여지는 순간, 그 이야기는 작가의 의식화와 글쓰기를 통해 이미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소설이 모두 허구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과정에 작가의 사실이 담겨져 있고, 그 과정에 작가의 회복이 포함되고, 그 과정에 독자의 치유과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델핀 드 비강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소설의 힘일 것이다. 픽션의 힘,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을 내포한 소설의 힘,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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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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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진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외국에 나가 계셨고, 어머니는 다른 도시에서 일을 해야 했다. 나와 형제들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엄하기로 소문이 난 할머니는 새벽에 우리들을 기상시켰고, 마당 청소부터 여러가지 일들을 교육시키셨다. 시골학교의 텃새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왕따 비슷한 경험까지 당해 보았다. 당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그 무거웠던 발걸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집은 따스하고 포근했던 예전에 어머니가 있던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놀다가 해가 져서 더 이상 놀 수 없을 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해가 지던 그 쓸쓸한 하늘과 텅비고 적막한 학교 운동장의 이미지가 여전히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다행히 1년만에 아버지가 돌아오셔 다시금 사업을 회복했고, 우리는 다시 따스한 가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가끔 저녁이 되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리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 가족이 기다리는 따스한 집으로 돌아가지만, 지금도 돌아갈 곳이 없어 쓸쓸히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느끼는 그 쓸쓸하고 무거운 마음을...


 



[길 위의 소녀]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소설은 프랑스 작가 '델핀 드 비강'의 소설로 원제는 [노와 나]이다. 소설의 주인공 '루'가 거리의 소녀 '노'와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의 원래 이름은 '노웰'이며, 18살의 소녀이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녀시절 여러 명의 남성들에게 강간을 당해 노를 낳았다. 어머니는 노를 낳았지만, 노를 한 번도 따스하게 안아주지 않고 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더 이상 노를 보살펴 줄 수 없을 때, 노는 어머니는 찾아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차가운 반응으로 인해 그녀는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루는 노와는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13살의 나이로 몇 번의 월반을 경험한 천재 소녀이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루 역시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경험하지 못했다. 루의 동생이 갓난아이때 엄마의 품에서 죽은 이후, 루의 어머니의 정신은 마치 루의 동생과 함께 딴 곳으로 간 것 같다. 루가 넘어져 피를 흘리고 있어도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 그녀를 안아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욕실에서 혼자 눈물만 흘리다가, 루를 기숙학교에 보내었다. 지금은 비록 다시 가정을 이루며 살지만, 가정의 따스한 공기는 이미 빠져나가고 없다.  


루는 발표수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리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노를 만나 인터뷰하게 된다. 루는 노와 대화를 하면서 노의 어린시절의 아픔과 저녁이 되면 돌아갈 곳 없는 쓸쓸한 마음을 공감하게 된다.


"나는 저녁이면 집으로 간다. 노가 오늘 어디서 잘지도 모르는채 나만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물어봐도 그 애는 대개 대답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문 닫을 시간이라고 하면서 그 애가 먼저 서둘러 일어나기도 한다. 그 애는 대기번호 혹은 방번호를 받기 위해 파리의 반대쪽 끝까지 달려가 줄을 서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지저분하게 버려놓은 욕실에서 샤워라도 하고, 도키토리에서 자기 침대를 얻어 벼룩이 들끓는 이불을 덮고서라도 잘 수 있다. 어떨 때는 노도 자기가 어디서 잘지 모른다. 긴급보호쉼터는 언제나 대기자가 많아 거의 포화상태이거나 더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애가 가방을 덜컹덜컹 끌면서 늦가을 저녁의 습기를 가르고 다시 떠나도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 (P 68)


루는 노와의 인터뷰가 끝났지만, 그럼에도 노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해서 노를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한다. 노와 함께 지내며 어머니는 우울증으로부터 회복이 되고, 노 역시 직장을 가지며 회복이 된다.


소설은 그렇게 모두들 아픔에서 회복이되고, 행복한 상태로 해피앤딩을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된다. 그러나 노는 쉽게 회복이 되지를 못한다. 직장에서는 악독한 사장에 의해 혹독한 근무에 시달리고, 결국에는 바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노는 다시금 망가지기 시작한다. 알콜 중독과 약물 중독에서 시달리게 되고, 결국 루의 부모님에게서 쫓겨 나게 된다. 루와 친구인 뤼카는 끝까지 노를 돌보려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결국 노는 스스로 떠난다.


 



이 소설은 지적인 부분에서는 천재인 13살의 소녀의 눈을 통해 파리의 거리와 그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 루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과학이 최첨단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거리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는지, 왜 사람들은 길거리의 개는 돌보면서 길거리의 사람을 돌봐주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한 명씩만 돌본다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루의 이상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루는 노를 돌보면서 그 현실을 접한다. 그럼에도 소설은 현실 앞에 무력한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의 끝에서 루의 선생님인 마랭은 루에게 책을 건내며 이렇게 말한다. "포기하지 마요."


소설은 우리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 개인의 느낌이지만, 이 소설에서 저자는 우리가 길거리에 놓인 사람들의 그 마음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저녁이 되어 돌아갈 곳이 없는 쓸쓸함을, 한 번도 따스한 엄마의 품에 안겨보지 못한 아이의 마음을, 아무 곳에도 기댈 곳이 없어져 무너져 가는 절망감을... 잠시라도 그것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돌봄이 아닐까? 루가 노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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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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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추석 연휴 기간에 읽은 소설이다. 명절이면 내려가는 부모님의 집은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500미터 정도의 높이이다. 내가 20살이 넘을 무렵 아버지가 노후를 생각하며 거주하기 시작한 집이다. 그 곳에는 손님들이 오면 머물 수 있게 나무로 지은 작은 목조주택이 있다. 지은 지 10년이 넘어 허름하지만 부모님의 집에 내려 오면 항상 이곳에 머문다. 이번 추석연휴 기간동안 이 목조주택에 머물며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읽었다.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이고, 주변은 항상 새소리들이 들렸다. 덕분에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창조한 아사마산의 아우쿠리마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사카니시1980년대 초에 유명한 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라리 사무소는 여름이면 도쿄사무실에서 무라리의 별장이자 사무실로 쓰고 있는 아사마산이 있는 아우쿠리마을로 사무실을 이전한다. 무라리의 건축철학에 따라 자연 속에서 건축물을 설계하고 구상하기 위해서이다. 무라리는 속도감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현대건축과는 다르게 자연과 조화되면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건축을 추구한다. 사카니시는 입사한 첫여름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중요한 직원들과 함께 아우쿠리마을로 향한다. 아우쿠리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늦게 흘러간다. 그 숲속에서 사카니시는 무라리의 자연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건축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무엇보다도 함께 일하고 있는 무라리의 조카인 마리코와 느리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물론 마리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키니시보다는 조금 일찍 들어 온 온화한 성격의 유키코와도 아우쿠리 마을의 여름을 배경으로 서로를 알아간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었을 때는 느린 속도감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조금은 당황했었다. 그러나 초반부분이 지나고 무라이 사무소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입찰을 시작하고, 주인공과 마리코의 관계가 깊어지면서도부터 이야기는 느리지만 잔잔하게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특히 저자의 절제되면서도 담백한 표현들이 매우 매끄럽다. 주변 자연을 묘사하는 시선부터, 주인공이 마리코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매우 섬세하면서도 아름답다. 마리코의 행동과 말투에 대한 묘사가 마치 무라이의 건축물과 같이 담백하면서도 섬세하다.

 

말이 저물었을 때쯤, 월요일 아침에 돌아올 예정이었던 마리코가 까만 르노5를 타고 돌아왔다. 물색 마 원피스, 종요했던 여름 별장 마루에 밝은 색 공이 굴러운 것 같았다. (P203)

 

그 풀 수 없는 의문과 별개로, 마리코하고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마리코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리고 있었따. 귀에 살그머니 들어와 그대로 머무는 목소리 톤, 가볍고 부드러운 손가락과 손의 감촉, 목과 어깨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는 머리카락,자유로운 다리의 움직임, 강인한 성격이 반전되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몸짓. (P275-6) 

개인적으로 좋은 소설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장면과 이미지가 그려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을 때면 아우쿠리 마을, 무라리 건축사무소, 아사마 숲속의 길들, 마리코와 유키코의 모습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무라이가 의식을 잃고 입원한 병원에 주인공이 마리코와 유키코를 데리고 가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부분은 그냥 일기만 해도 하나의 영상이 보여진다. 겨울의 초입, 을씬스러운 아사마산 주변의 도로에서 의식을 잃은 무라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리코가 녹음한 피아노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18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마리코가 치는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기 시작했다. 터치는 부드럽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교양이라고 할 레벨이 전혀 아닌 것에 대한 놀라움은 이내 사라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아닌, 하물며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자기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선울이었다. 슈베르트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백미러에는 유키코가 비춰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떨어질까 봐 고래를 숙이지 않고 앞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P 381-2)

   

 

지금은 비교적 한가한 도시의 외곽에 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서울 중심의 한복판에 살았다. 집 주변으로는 지하철 공사 중이여서 일년 내내 길을 막고 땅을 파고, 트럭들이 다녔다. 또한 집 맞은편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빌딩을 짓는다고 한참 공사중이었다. 소음과 먼지, 사람과 차량, 모든 것이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공사현장들을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콘크리트 더미들을 쌓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건축과 사람, 그 자연과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느리지만 마음 속에 깊이 남는 올해 내가 읽는 최고의 감동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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