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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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을 읽는 재미 중에 하나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고전소설의 중세 시대의 경직된 성곽 마을이나 혁명 전야의 황량한 러시아의 사회나 전쟁 후의 허망함을 느끼는 유럽의 뒷골목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런데 가끔 고전소설을 읽다 보면 황당함을 느끼다 못해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몇 백 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왔는데도 그 시대의 인간 군상과 사회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추악함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결국 인간이란... 결국 사회란 변하지 않는 건가라는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바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의 행복 백화점]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에밀 졸라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가이다. 특히 그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시리즈를 통해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던 1850년대부터의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목로주점]이나 [나나] 역시 이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역시 이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의 하나로서 루공-마카르 가문의 후손인 '옥타브 무레'가 등장한다. 그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운영하면서 광기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백화점을 확장해 간다.

소설은 파리에 생긴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는 여러 명이 등장하지만, 주로 드니즈라는 발로뉴라는 시골 출신의 여성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드니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린 여동생인 페페와 남동생인 장을 데리고 큰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상경한다. 그리고 몰락해 가고 있는 큰아버지의 상점과 대비되는 거대한 백화점을 맞닦드린다. 그녀에게 백화점이란 동경의 대상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드니즈는 아침부터 엄청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지켜보았을 뿐인데 그녀가 코르나유에서 6개월 동안 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백화점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매료시켰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갈망 속에는 결정적으로 그녀를 유혹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큰아버지 가게에서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영업 방식이 유지되고 있는 음습하고 후미진 가게에 대한 본능적인 경멸과 반감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느꼈던 모든 것들, 그들 가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대의 불안감, 친척들의 시큰둥한 대접, 지하 독방을 비추는 것 같은 빛 아래에서의 음울한 점심 식사, 몰락해가는 초라한 가가에서 느껴지는 나른한 고독감 속의 기다림 등은 그녀 안에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은밀한 거부와 활기찬 삶과 빛을 향한 이끌림으로 귀착되었다. (P 31)"

그녀는 큰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에 판매원으로 취직을 한다. 소설의 초반은 그녀가 경험한 백화점 판매직원에 밑바닥 생활을 어둡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본급도 없이 판매 수입만으로 생활을 해야 하기에 그녀의 생활은 처참했다. 백화점의 옥상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조금의 판매 수입 역시 동생의 양육비와 남동생 장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데 다 사용한다. 항상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는 그녀는 동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고, 곧 동료들의 모략으로 인해 백화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백화점 사장이 무레는 드니즈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되고, 그녀를 다시금 파격적인 조건으로 백화점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결국엔 드니즈와 결혼을 하게 된다.

소설은 백화점을 단순히 하나의 건물로 보지 않고, 마치 주변의 모든 상권들을 빨아들이고 여인들의 욕망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하나의 생물과 같이 표현한다. 소설에는 이런 표현을 '기계'라는 단어로 묘사한다. 소설에서 백화점은 살아서 움직이며, 여인들의 욕망을 삼키는 살아있는 기계같이 묘사된다.

"그러나 드니즈는 강력한 엔진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요란한 움직임이 진열대까지 들썩거리게 하는 듯했다. - 중략 - 지나가던 사람들마다 시선을 그곳으로 향했고, 모두가 탐욕으로 인해 거칠어진 듯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 여자들은 서로를 떼밀었다. 거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쇼윈도의 천들도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레이스 천이 가볍게 떨리며 백화점 내부를 감추려는 신비한 베일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두터운 사각의 나사는 유혹적인 숨결을 뱉어냈다. 팔토를 걸친 마네킹은 마치 살아 있는 여인처럼 몸을 더 뒤로 젖혔다. - 중략 - 쉬지 않고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의 윙윙거림이 느껴지는 가운데, 전시된 상품들에 정신을 빼앗긴 고객들이 화덕 속으로 뛰어들 듯 너도나도 매장 앞으로 몰려들었다가는 다시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이 모든 건 기계 같은 정확함으로 계획되고 작동되고 있었다. 마치 온 나라의 여인들이 톱니바퀴 장치의 힘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P 30-1)"

이렇게 살아있는 기계 같은 백화점은 점점 자신의 크기를 성장시키고, 그 안의 판매와 자본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면서 드니즈의 큰아버지의 가계와 같은 소상공인들의 몰락시키고, 백화점 직원들을 경쟁 시스템 속에 혹사시킨다. 마치 현대의 백화점의 횡포의 모습을 백여 년 전의 백화점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을 몰락시키고 타락시키며 자신의 자신을 성장시켜 간다. 그리고 백화점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여인들의 욕망이다. 저자는 백화점을 향한 여인들의 욕망을 매우 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새롭고 화려한 물건을 향한 욕망을 마치 성적인 욕망처럼 그려내며, 백화점과 여인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그리고 있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린 여자들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강물이 계속의 지류를 끌어당기듯, 백화점 입구를 가득 메운 인파는 거리를 지나나는 행인들과 파리의 사방 곳곳의 주민들을 빨아들였다. 줄을 선 채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서로를 지탱해주는 어깨와 배에서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들의 충족된 욕망은 그러한 힘겨운 전진마저도 기꺼이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여인네들의 호기심을 한층 더 자극했다. 실크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인들과 소박한 옷 차임의 프티부르주아 여성들, 맨머리 차림의 여자들까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채 모두가 그 열기에 들뜨고 흥분돼 있었다. 넘쳐나는 여인들의 가슴 아래 파묻힌 몇몇 남자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P 404)"

이런 백화점의 광기 어린 탐욕과 이에 맞서는 소상공인의 무모한 투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드니즈의 시선이다. 저자는 드니즈의 시선을 통해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광기 어린 물결과 그 물결에 휩쓸려 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드니즈는 백화점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사장인 무레와 결혼을 하게 된다. 물론 소설은 그녀가 단지 수동적으로 무레의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닌, 나름 적극적으로 자신이 깨달은 백화점의 생리와 주변 사람들의 피해를 조화해서 무레에게 경영에 대한 적극적인 조언을 하는 여성으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거대한 자본주의의 기계인 백화점의 시스템에 그녀가 편승해 가는 과정은 읽는 이로써는 좀 씁쓸하다. 저자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당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과 이로 인해 몰락해 가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그 흐름 속에 자신을 읽어가는 여성들과 판매원들을 그리고 있지만, 드니즈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이 흐름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앞에 대항하는 자는 모두 몰락하고, 그 물결에 편승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19세기의 말의 프랑스 파리의 광기 어린 자본주의의 욕망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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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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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한다는 것은 내게는 우주가 바뀌는 일이었다. 처음 낯선 학교에 발을 내딛고, 자기를 소개하고, 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불렸던 경험은 인생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시간이다. 그런데 낯선 땅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어떤 경험일까. 더군다나 고국에서 쫓기듯 도망쳐야 했던 신세라면... 어린 소녀의 눈으로 이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 작가 마리암 마지디가 쓴 자전적 소설인 [나의 페르시아어의 수업]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의 주인공 마리암(저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호메이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이고, 이란은 온통 혁명과 이에 대한 반체제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마치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와 비슷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잡혀가고 고문을 당한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어머니는 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둘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체제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의 집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심지어 마리암까지 연락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오로지 할머니만이 이런 마리암을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그러나 삼촌이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부모님 역시 점점 투옥될 위기가 찾아오자 결국 이란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먼저 아버지가 망명을 하고, 그 뒤 아슬아슬하게 엄마와 어린 마리암이 아버지를 따라 망명을 한다. 소설은 어린 마리암의 눈에 비친 이란의 혼란 상황과 고단하고 궁핍한 파리에서의 정착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장실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왠지 걱정이 되어 아버지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복도에 공용화장실이 있어. -중략- 아버지는 샤워실을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며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억지로 웃음을 비친다. 어머니는 침통한 표정으로 하나 밖에 없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래전부터 말수가 적어진 어머니의 침묵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진 것 같다. 방을 둘러본다. 세면대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 붙박이장 하나, 식탁 하나, 의자 세 개, 화분 하나, 창문 하나. 창문으로 달려가 거리와 파리의 지붕들과 전철 입구를 본다. 우리 셋은 파리 십팔 구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칠에 둥지를 틀었다. 숱한 난관과 시련 끝에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는데 나는 오로지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P 115)"

이후 소설은 마리암이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프랑스어를 몰라 배척 당하고,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모님은 그녀가 페르시아어를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해 페르시아를 가르치려 하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모님과도 조금씩 멀어진다.

"몇 년이 더 흘렀다. 소녀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딸이 새 언어를 말하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의 놀라움은 곧이어 두려움으로 변했고 이 언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딸이 예전에 그랬듯이 아버지도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소녀 역시 아버지의 두려움과 거부를 이해했다. 그래서 아무 말없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단어와 알파벳을 익혔다. (P 207)"

이 작품은 세계 삼대 문학상 중 하나로 불리는 프랑스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어 본 콩쿠르상은 주로 소수자나 이민자의 불안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반대자는 많지만, 그래도 프랑스가 이런 소수자나 이민자에게 얼마나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이 콩쿠르상을 수상한 것은 단지 프랑스인의 이방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묘한 마력이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어린 소녀 마리암이 되어 그녀가 보았던 것을 함께 보고 느꼈던 것을 함께 느끼게 한다. 그만큼 작가의 문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과 힘이 있다. 특히 그녀가 페르시아어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성인이 되어 다시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느꼈던 혼란과 방황, 그리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적인 비유나 그녀가 만든 동화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소설은 묘한 분위기를 낸다. 특히 소설 속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이입되는 부분이 매우 뛰어나다. 프랑스 생활에서 점점 정치사상과 신념이 무너지고 소수자로 전락하는 부모님을 보는 과정에서는 나 역시 그녀의 마음이 되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당신 꿈들은 이란에서부터 이미 조금씩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꿈들조차 프랑스에 온 후로는 하나둘 의자 아래 카펫 위로 떨어져 서서히 죽어갔다. 원하지 않았던 망명으로 갈기갈기 찢긴 꿈들. 계획이나 야심,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작은 목표들. 이 모든 것이 잘게 부서져 스러지고 당신 모습도 조금씩 지워져 희미해졌다. 얼굴도 흐릿해지고 목소리는 작아지고 몸짓은 완전한 현실도 몽상도 아닌 꿈에서 움직이는 사람처럼 느려졌다. (P 126)"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가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서든지, 환경에 의해서든지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소설 곳곳에서 배여 나오며 진한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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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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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사람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있어서 그가 원하는 성공은 무엇이고, 과연 그 성공을 위해서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나는 성공을 위해서 이런 것까지 해 봤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을 버려야 성공이라는 것을 손에 쥘 수가 있을까.

[단지 뉴욕의 맛]은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티아라는 변두리 출신의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뉴욕에서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을 맛보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에 '뉴욕의 맛'이라는 문구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보면 사실 그녀가 맛본 것은 뉴욕의 음식 맛이 아니라, 뉴욕의 성공과 욕망의 맛일 것이다. 그리고 환상적인 음식 맛에 중독되어 가듯이 그녀는 뉴욕의 성공의 맛에 중독되어 간다.

티아는 갓 뉴욕에 상경해서 요리 칼럼니스트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만든 후 그 경험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글이 뉴욕타임스에 실리며 잠시 유명세를 누렸다. 그 유명세가 지나간 후에도 그녀는 요리에 대한 열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 분야를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에 온다. 그러나 뉴욕의 그녀의 열정 하나로 감당하기에 벅찬 곳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의 입구에서 고객들의 옷과 휴대폰을 보관하는 일을 하게 된다. 고급 옷과 그녀가 상상하지 못하는 가격의 음식들을 먹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뉴욕과 뉴욕에서의 성공이 마치 딴 세상처럼 멀어져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환상적인 기회가 다가왔다. 우연히 뉴욕타임스의 음식 평론가인 '마이클 잘즈'를 만난 것이다. 그가 평가하는 별의 개수와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유명 레스토랑의 운명이 판가름 날 정도로, 그는 그 세계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어느 순간 미각을 잃었다. 그리고 그 미각을 대신해 달라는 달콤한 제안을 티아에게 해 온다. 티아는 성공을 위해서 그 제안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갈 길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명문대에 들어갔다. 요리 칼럼니스트라는 진로를 정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람들 말은 흘려 들었다. 학위는 나를 입증해줄 배지 같은 것이라 믿었다. 이제 그 또한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것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헬렌 시간을 통해 그걸 배웠다. 어떤 것을 너무 원하며 그 욕망이 말 그대로 이마에 네온사인처럼 새겨질 수 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살아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히 잘나지도 않았고 모두가 원하는 그 상을 나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고 그 상들을 원한다고 말만 하거나 가장 예쁜 드레스를 꺼내 입고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헤치고 나가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P 233)

이제 그녀는 마이클이 제공하는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유명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들을 맛본다. 그리고 비록 마이클의 이름을 통해 기고되는 글이지만, 그녀의 글로 레스토랑을 살리고 죽이는 권력의 힘을 맛본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소설은 성공을 위해 뉴욕에서 고분분투하는 이야기이다. 마치 앤 헤세웨이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순식간에 뉴욕의 화려함 속에 빠져들어 그 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티아의 위태로운 삶이 속도감 있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푸드 블로거 출신의 저자답게 각종 고급 요리와 레스토랑, 그리고 그 음식에 대한 맛깔스럽고 감미로운 평가들이 언급되면서 읽는 재미를 더 하게 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뉴욕의 패션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들이 묘사되면서 읽는 사람을 티아처럼 뉴욕의 맛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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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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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평창올림픽에서 가장 충격을 주었던 장면은 팀추월 스케이팅 경기였다. 팀추월 스케이팅 경기는 세 명의 선수가 함께 달려 마지막 선수가 도착하는 시간을 기록으로, 팀워크를 가장 중요시하는 스포츠이다. 그런데 두 명의 선수가 한 명의 선수를 따돌리고 들어왔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은 경기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빙상연맹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선수들을 성적 위주로 줄세우고, 가능성이 없는 선수들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빙상연맹의 시스템이 이런 경기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언제부터 스포츠가 이렇게 인간미가 없어지는 경기가 되었을까?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단지 빙상연맹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학교부터 스포츠, 연예계까지 모두 승리와 성공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승리만 한다면, 성공만 한다면 무엇인든 허용된다는 논리가 점점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승리와 성공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점점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

[베어타운]은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다. 데뷔작인 [오베라는 남자]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되고, 이 작품이 영화화 되어서 더 유명해진 작가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베라는 남자]와 함께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라는 작품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프레드릭 배크만은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현대화되고, 개별화된 세상에서 그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위트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다. 이번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니다.

베어타운은 한때 아이스하키로 유명했던 도시이다. 그러나 이제 옛 영화는 사라지고, 쇠락한 춥고 황량한 시골마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아이스하키에 열광한다. 베어타운에게 아이스하키는 여러 스포츠 종목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 마을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단 하나의 스포츠이다. 그들은 자신이 베어타운 출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스하키에 열광한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자이며, 베터타운의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한다.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열리는 날이면 함께 뭉치며 "우리는 곰이다!"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이제 이 마을이 다시금 아이스하키로 뜨거워지고 있다. 베어타운의 청소년팀이 전국 준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이제 이들로 인해 다시금 마을이 활기가 넘친다. 그리고 그 활기의 중심에는 팀의 에이스인 케빈이 있다. 마을은 이제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에, 그리고 케빈에게 자신의 모든 기대를 건다. 청소년팀과 케빈은 베어타운의 전부가 된다.

소설의 중반까지는 아이스하키 준결승전에 포커스가 마쳐져 있다. 베어타운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이자, 이제는 베어타운 A팀(성인팀)의 단장인 페테르 역시 이 경기를 기대한다. 페테르에게는 마야라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베어타운의 청소년팀은 다비드라는 훌륭한 코치 밑에 하나로 뭉쳐서 준결승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캐빈과 단짝 친구 벤, 그리고 새롭게 들어 온 아맛의 환상플레이로 승리한다. 여기까지는 읽으면서 이 소설이 스포츠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스하키를 잘 모르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현장의 열기가 그대로 소설을 통해 전해지면서 중간까지 쉬지 않고 읽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의 중반부터 갑자기 소설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준결승전 승리를 자축하는 날 아이들은 케빈의 집에서 파티가 벌어진다. 청소년들이의 파티라고 보기에는 조금 과하게 술과 여자친구들, 그리고 마리화나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그곳을 놀러간 마야가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결국 이 사실은 페테르까지 알게 된다.

결승전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케빈은 마을의 영웅이고, 물질과 권력으로 보호해 주는 부모님까지 있다. 아무도 마야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마야가 케빈이 자신을 폭행했다고 주장하면 마야와 그 가족들이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마야는 끝까지 감추려 한다. 그러나 결국 페테르와 아내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감추는 대신 싸우기로 결심한다. 이제 온 마을이 페테르 가족의 적이 된다.  

이 소설은 스포츠 소설이며 동시에 페미니즘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다. 후반부에는 상처입은 페테르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가족소설이나 성장소설의 느낌까지 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으면 이 소설이 스포츠 소설도 아니고, 페미니즘 소설도 아니고, 가족 소설이나 성장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소설이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단지 스포츠에 열광하고, 그 승리만을 전부로 여기는 존재일까? 또 인간의 삶의 가치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짓밟아도 되는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페테르와 마야를 비난하던 아이스하키 이사인 프락이 자신의 아들을 붙들고 절규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야 이 꼴통아, 그 충전기 네 것도 아니잖아, 내거잖아!" 아이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는 누나한테 대고 외친다.
프락은 무슨 말을 하려고 아이에게 손을 뻗지만, 아빠를 아직 보지 못한 아이는 방문을 발로 차며 고함을 지른다.
"충전기 내와, 이 개 같은 년아, 통화할 남자도 없잖아! 따먹히는 게 네 소원인데 너를 따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 다들 안다고!"
그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프락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한다. 얼리자베트가 뒤에서 그의 팔을 결사적으로 잡아당기던 것만 기억한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에 붙들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서 겁을 질린 표정을 짓고, 그 아들은 계속해서 벽에 패대기치며 고함을 지른다. - 중략 - 그는 아들을 끌어안은 채 드러웁는다. 둘 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 명은 공포 때문이고 다른 한 명은 수치심 때문이다.
"너는 그런 인간이 되면 안 돼,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 너는 아빠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야지....."
프락은 아들을 끌어안은 채 그의 귀에 대고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 P 550)

프레드릭 배크만은 항상 소설을 통해 현대사회 속에서 개인화 되고 관료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의 외침은 더 강렬해진다. 마치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마지막 절규하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안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요즘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의 보살핌 속에 성공의 길만을 올라간 재벌3세가 아버지뻘의 사람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아파트를 명품 아파트를 만들겠다고 택배차를 못 다니게 한다. 부녀회들은 단합해서 자신의 아파트를 싸게 내 놓았다고 부동산을 협박한다. 그럼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소설의 구절처럼 어른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 서로 패거리를 만들고, 상대를 왕따시킨다. 여중생들이 친구를 벌거벗겨서 실신할 때까지 때리고, 친구가 자살을 할 때까지 왕따로 몰아붙인다.

어쩌면 우리 사회도 어느 순간 베어타운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벌써 우리는 인간이 아닌, 그들이 외치고 있는 곰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에서 프락이 베어타운의 일부가 되어 가는 아들을 붙잡고 울부짖는 것처럼,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을 붙잡고 울부짖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 그렇게 변해갈지라도, 나도 그렇게 변했을지라도, 너만은, 너만은 그래서는 안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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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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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끔찍한 살해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아이가 살해되었다. 어린 남자아이는 즉시 죽었고, 여자아이는 몸부림치다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죽었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늑대 울음소리를 지른다. 사건 현장에는 다른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이들이 죽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 여자이다. 목숨을 끊으려고 한 여자는 보모였다. 처음 이 장면을 읽었을 때 강도나 사고로 두 아이를 잃고, 엄마는 충격을 받고, 엄마보다 더 아이들을 사랑한 보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했었다.

소설은 이 장면을 보여준 후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미리암의 가정을 보여준다. 미리암 변호사였고, 남편 폴은 아티스트를 키우는 프로듀서이다. 처음 밀라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미리암은 직장을 쉬면서 혼자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당이란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미리암의 육아에 병들어간다. 그 무렵 미리암에서 변호사 일자리가 들어오고 둘은 결국 보모를 구하기로 한다. 자신의 두 아이를 맡아 줄 보모를 구하면서 부부는 보통 사람들처럼 신중히 사람을 구한다. 몇 명을 면접하고, 루이즈라는 여성을 만난다. 처음 루이즈는 이 가정에 마치 신이 보낸 선물처럼 나타난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과 친구처럼 놀아주고, 집 안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무엇보다도 최고의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알뜰하게 가족을 돌본다. 폴과 미리암은 그런 루이즈를 신뢰하고 가족처럼 대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랑한다.

소설은 이렇게 루이즈가 이 가정의 일원으로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중간중간 끔찍했던 살인 사건의 날짜로 돌아와 그 장면을 묘사하거나, 그 과정을 수사하고 탐문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그리고 루이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가 언급된다. 두말할 것 없이 모두들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이즈가 자신의 자녀처럼 키우던 두 아이를 살해했다니... 사건을 접하는 사람마다 충격을 받는다.

이제 소설은 점점 루이즈라는 여성의 삶과 내면으로 들어간다. 파리 외곽의 허름한 원룸에서 혼자 사는 루이즈.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있었지만 병만을 남겨 주고 죽는다. 스테파니라는 딸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집을 떠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미리암의 가정에서의 평온한 모습과는 반대로 루이즈의 혼자의 삶은 공허하고 두렵다. 그럴수록 그녀는 미리암의 가정에서 평안을 느낀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 그녀의 이런 내면이 가장 처음으로 드러난 장면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부분이다. 너무나 재미있는 이 놀이 속에서 작가는 조금의 섬뜩함을 비친다.

"그러면 밀라는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을 마주친다. 아당은 밀라를 따라다닌다. 아당은 너무 웃다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여러 번 엉덩 방아를 찧는다. 아이들은 루이즈를 불러 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이즈? 어디야?' 조심해. 우리가 간다. 아줌마를 찾아낼 거야. 루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불러도, 폴이 죽어 울먹여도 숨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웅크린 그녀는 아당의 공포를, 흐느끼다 목이 메고 기진맥진한 아이의 공포를 주시한다. - 중략 -둘만 남았다고, 루이즈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게 불안해져서 밀라는 보모에게 애걸한다. '루이즈 아줌마, 하나도 안 재미있어요. 어디 있는 거야?' 아이는 신경이 곤두서서 발을 구른다. 루이즈는 기다린다. 그녀는 방금 낚은 물고기가 아가미는 피투성이 된 채 온몸을 펄떡이며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관찰한 듯 아이들을 바라본다. 배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기진한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물고기, 그 상황에서 벗어날 가망이 전혀 없는 물고기." (P 60-1)

폴은 친구들을 초청한 파티에서 술기운에 루이즈도 여름휴가에 함께 갈 것이라고 공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다. 루이즈는 일주일간의 그리스 여행에서 자신은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폴과 미리암도 루이즈는 우리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그는 혼자 쓸쓸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럴수록 루이즈는 더욱더 미리암의 집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폴과 미리암은 점점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루이즈를, 그리고 무언가 알 수는 없지만 점점 자신들을 조이는 듯한 루이즈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루이즈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루이즈 역시 이것을 직감한다. 이제 그녀는 아이들과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 그녀는 결국 내보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될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족이 아니었다.

"행복감에 이어 낙담의 나날들이 이어진다. 세상은 점점 줄어들고 움츠러들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폴과 미리암은 그녀에게 문을 닫았고, 그녀는 그 문을 부수고 싶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찾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몸을 숨길 둥지 하나, 따스한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는 것, 가끔 그녀는 자기 몫의 땅을 요구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가 곧 풀이 죽고 서글픔을 차오르며 무언가를 믿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P 243)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과 맨 부커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알려진 2016년도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작품이다. 소설은 한 가족에게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그 사건과 연루된 미리암과 폴, 루이즈, 그리고 아이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관계, 부모와 보모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들은 가족이라는 터울 속에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존재했다. 이런 프랑스의 사회적인 문제점과 함께 루이즈라는 여성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너무도 섬세해 읽는 이를 전율케 한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공허한 내면과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마음들, 그리고 결국 부모와 아이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혼자 남겨지는 그녀의 마음들이 읽는 내내 그대로 전달된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칫 스티븐 킹의 미저리의 프랑스 판이 될 수 있을 거 같은 소설이지만, 소설은 내내 루이즈라는 인물을 광기나 집작과는 다른 연약하고 상처받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계속해서 연민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내 입장에서는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나 역시 폴과 미리암처럼 내 아이가 먼저고 내 가정이 먼저이기 때문일까? 결국 가족 외에 또 다른 가족은 허울뿐일 것일까? 읽은 후에도 너무나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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