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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이야기할 때 여러 탐정이 거론되지만, 그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인물은 역시 레이몬드 챈들러가 만들어낸 말로가 아닐까 싶다. 겉만 보면 비정한 도시 남자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알고 보면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어 매력적인 인물. 혹자는 지나치게 폼만 잡지 않냐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최고의 탐정 중의 하나인 필립 말로. 여기 일본에서 필립 말로 시리즈에 매료되어 마흔 셋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챈들러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작품을 내놓은 작가가 있으니, 바로 이 책의 저자 하라 료다. 미학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다가 느즈막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로 데뷔한 이 작가. 다작(多作)과는 거리가 멀어 20년 동안 겨우 네 편의 소설을 썼을 뿐이기에 그 퀄리티만큼은 작품을 찍어내듯 만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것보다는 백 배쯤 낫다는 생각. (물론 둘을 단순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일단 이야기는 여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그렇듯 실종된 사람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사와자키가 일하고 있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 르포라이터 사에키를 찾는 오른손을 감춘 남자가 나타난다.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사에키의 행방을 묻는 남자. 하지만 사와자키는 사에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고, 그렇게 일은 유야무야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 일본 미술계의 큰 손인 시라시나 슈조의 변호사에게 연락이 와 사에키를 아느냐고 묻는다. 좀 전에 얻은 정보를 이용해 사와자키는 시라시나 슈조의 의뢰를 받게 되고, 그의 사위인 사에키가 딸 나오코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로 한 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오코의 의뢰로 사에키의 행방을 찾기 시작하는 사와자키. 그렇게 실마리를 쫓아가던 사와자키는 오른손을 감춘 남자와 도지사 저격 사건, 그리고 사에키가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허름한 탐정 사무소를 꾸려가고 있다는 점을 비롯해서 이 책은 많은 부분 필립 말로 시리즈와 닮아 있다. 마치 필립 말로가 좀 더 현대로, 그리고 일본으로 옮겨온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하다. 하지만, 필립 말로 시리즈와 달리 이 책은 니시고리 형사와 와타나베라는 존재 때문에 좀 더 유연해지고, 사와자키라는 인물의 특징이 더 돋보인다. 알콜 중독자인 전직 경찰 와타나베와 그와 오랜 기간 알고 지냈지만 배신 당한 니시고리 형사는 적절한 타이밍에 사와자키를 도와 그가 의뢰 받은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게 도와준다. 이 둘 또한 사와자키처럼 비정한 인물이었다면 재미가 없었을 텐데 어쩐지 어눌한 면이 있어서 되려 재미있었다.
사실 챈들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어쩌면 그저 챈들러의 아류일 뿐이다. 솔까말 나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히 필립 말로의 아류가 아닌 사와자키만의 특색을 조금씩 찾는 재미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미미했지만.) 데뷔작이라 그런지 이야기의 얼개는 좀 느슨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갔다. 정교하게 짜여진 트릭도, 충격적인 결말도 아니었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사와자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재미가 배가 될 듯 싶었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사와자키가 어떤 캐릭터를 구축해갈 지는 모르겠지만, 그와의 첫만남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필립 말로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본다면, 아니면 필립 말로를 만나기 전에 이 책을 봤더라면 더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어쩌랴. 나는 이미 필립 말로를 알아버렸는 것을. 어쨌거나, 아류가 단순한 아류로 남을 지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갈지는 다음 작품 <내가 죽인 소녀>에서 확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