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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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의 이름은 몇 번 들어봤지만 이 작품으로 그녀의 영역에 드디어 발을 디뎠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라면 신문기사에서 '그녀가 하는 낭독회라면 두 발 벗고 달려가겠다'라는 요지의 글을 봤기때문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럴까하는 호기심 반, 새로운 작가에 대한 호기심 반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물론, 다소 도발적인 제목도 한 몫 했지만)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여러개의 챕터로 이뤄져있기때문에 별로 장편같지 않은 느낌으로 읽어갈 수 있었다. 책도 그렇게 두껍지 않은 편이라 부담없이 읽어갈 수 있었다. 33살의 독신녀 유경. 그녀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 대해서도 일종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결혼과 사랑, 가족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냉소적인 그녀에게 한가지 꿈이 있다면 수의사가 되는 것. 때문에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녀는 야간대학에서 수의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친구들. 오래된 친구이지만 누군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헐뜯기 바쁘고, 자기보다 못해보이는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한참 분개해하기도 한다. 유경이 자발적인 독신상태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반면, 그녀의 친구들은 언제든지 멋진 상대만 나타난다면 당장에라도 결혼을 할 것 같다. 커다란 사건은 없지만 유경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을 통해 독신녀 유경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이 책의 주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유경에게 금성이 던진 한 마디 물음일 것이다. '독신녀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것. 이제는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늘어난 탓에 30대 초반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완화된 편이고. 하지만 유경처럼 자신의 꿈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남자는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체액을 주고 받는 상대로 대하는 여자들에게 사회는 가혹한 칼날을 들이댄다. 어쩌면 배수아가 이 책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가시를 뾰족뾰족하게 세운 여성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영역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그게 피가 섞인 가족이던, 오랜 세월 함께한 친구이던, 똥침놓을만한 직장상사이건) 방어막을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모습. 어떻게 보면 독신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여성작가들의 이런 극단적인 면을 좋아하지 않지만(왜 여자작가들이 쓴 책에 나온 주인공들은 징징짜거나,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건가?) 혹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독신녀들이 본다면 어느 부분에서는 공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권의 책으로 한 작가를 판단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으로 봤을 때는 배수아는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권 정도는 더 읽어보고 판단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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훵카델릭 2007-03-29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보고 있어요^^ 독학자를 추천해드려요.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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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기발한 글쓰기로 독자를 찾아오는 박민규. 그가 이번에는 <핑퐁>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다시 찾아왔다. 핑퐁핑퐁. 그 경쾌한 소리와는 동떨어지게 이 책 속에는 왕따를 당하는 못과 모아이라는 두 중학생이 등장한다. 이들은 치수패거리에게 맨날 맞고 돈을 뺏기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지만 어느날 공사장 근처에 있는 벌판에 있는 탁구대를 접하게 되고 탁구를 시작하게 된다. 아무런 재미도, 의지도 없던 그들에게 탁구는 그들이 이 지구를 살아갈 단 하나의 희망이 되어준다. 그렇게 지구에서 탁구를 배우던 그들은 탁구계가 지구에 착상되면서 지구를 유지할 것인지 언인스톨할 것인지를 두고 한 판 탁구 대결을 펼치게 된다. 과연 그들은 지구를 어떻게 할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왕따청소년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정작 책에서는 3분의 2가 넘어가도록 그들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핑퐁 핑퐁 핑퐁 탁구를 치는 모습만 등장할 뿐이었다. 스스로를 세계가 <깜빡>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못과 모아이. 하지만 이들은 왕따를 당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그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치수패거리들이 그들에게 하는 짓은 분명 잔혹하고 사악하게 느껴지지만 못과 모아이에게는 그것이 일상이었다. 

  이 책에서는 왕따에 대한 비판(?)도 등장하지만 그보다 작가가 더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수에 의한 횡포'가 아니었나 싶다. 못은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라고 사태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류는 왜 이따위인가, 살아가는 희망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은 해도 이들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극복하기보다는 핼리혜성이나 기다리고, 탁구를 치며 잊을 뿐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카스테라>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박민규식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또한, 사회의 마이너를 지켜보는 소재의 방식도 비슷하다. 그 소재만 약간씩 바뀌었을 뿐 박민규가 기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런 비슷한 방식때문이었는지 약간의 그의 글쓰기에 물리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이번 책에서도 나름대로 독특한 구성(못이 소심하게 의견을 말하는 부분이 작은 글씨로 처리되는 점, 핑퐁소리가 한 페이지를 메우는 점 등)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장편으로 끌고가기엔 조금은 부족한 소재와 구성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차라리 단편으로 만들었다면 신선함을 남기고 좋았을 것 같은 느낌. 지나친 행바꿈과 지나친 시도가 되려 산만함을 안겨준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제대로 된' 작품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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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동감하고 동의하는 평 :)

이매지 2006-10-2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솨합니다 ^-^;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실망도 컸어요. 쩝.

가시장미 2006-10-31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고, 책 주문했는데. 땡스투 누르는걸 깜박했다오. ㅠ_ㅠ 으흑. 대신~추천!

이매지 2006-10-3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땡스투 1회가 ~ㅠ_ㅠ ㅋㅋ
괜찮아 괜찮아~
 
리심 - 하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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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재미는 있으나 깊이는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그나마 괜찮게 봤는데 이번에는 리심이라는 조선의 궁중 무희의 삶에 대해서 무려 3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시 찾아왔다. 사실 상권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면 재미있군'싶었었다. 야소교인 어머니가 그녀를 버리고,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이방의 도움으로 우연히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 그 곳에서 무희로, 의녀로 살다가 갑신정변에 휩싸여 갖은 고초를 당하고 명성황후 밑에서 발이나 닦는 처지로 추락하지만 춤때문에 고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게 된다. 하지만 고종말고도 그녀의 춤에 반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프랑스 외교관인 빅토르였다. 그는 서책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인물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리심을 콕 찝어 지목하게 되고, 리심은 프랑스 대사관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처음엔 괴물같았던 빅토르에게 리심이 마음을 열게 되고 그를 사랑하는 모습이 상권에 그려져있다. 중권에서는 직접 외국으로 떠난 리심이 해외의 문물을 접하게 되고 낯선 세상에서 온 황색인에 대한 온갖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권에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리심이 이런 저러한 사정으로 다시 궁중무희가 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이처럼 한 인물의 삶을 조망하고 있는 <리심>은 최초로 해외땅을 밟아본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듯 보인다.(혹은 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소설의 한계는 '소설'이 지닌 면과 '역사'가 지닌 면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점에 있다. 자칫하면 단편적인 사건을 짜집기해서 흥미위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짧게는 2장가량, 길게는 10장 남짓의 세분화된 챕터를 통해 작가는 에피소드의 나열을 이뤄낸다.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자에게 어수선함을 안겨줄 뿐이다. 물론 작가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직접 발로 뛰며 책을 짓기 위해서 노력을 했겠지만(자신의 이런 과정이라도 보여주려는 듯이 그는 책 앞장에 관련 사진을 실어놓기도 했다.) 이것은 창작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를 써서 상상 속의 이야기를 끌어오기보다는 발로 뛰어 자료를 수집하여 창작을 한 김탁환의 한계는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일까? 김탁환은 '리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의 족적을 쫓았고,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리심'은 '리심' 그녀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둥둥 주위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야기도, 주인공도 모두 섞이지 못하고 따로따로 서로의 길을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개화기의 혼란스럽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 속에는 곳곳에 '백탑파'의 흔적이 등장한다. 내가 읽은 <방각본 살인사건>과 읽다가 관둔 <열녀문의 비밀>에는 이 백탑파가 등장한다. 작가 나름대로 이들에 대한 관심(혹은 애정)이 높은 탓인지, 혹은 이에 대한 자료의 수집을 이미했기에 써먹기가 좋았던 것인지 작가는 백탑파의 흔적을 곳곳에서 들어낸다. 물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백탑파의 성격이 물론 개화기의 개화파의 성격과 실제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쓸데없는 부분에서도 백탑파는 유령처럼 등장하고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 또한 작품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 외에도 평이한 문체, 남성인 작가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문제(왜 리심과 관계한 많은 여성들을 그녀를 질투하고 시기하기만 하고, 남성들은 리심을 도우려고만 하는지!) 등이 불만족스러웠다. 리심이라는 좋은 소재를 김탁환이라는 작가는 양장본 3권에서 소비해버렸고, 그 소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책 속에서는 리심의 삶도, 리심의 꿈도, 그녀의 사랑도 그저 하나의 소재에 불과했다. '리심'이라는 공통항을 두고 이야기를 묶어놓은 개연성도, 상상력도 부재한 소설. 아마 이제 다시 김탁환의 소설은 읽을 일이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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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2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김탁환이 되어버렸군요...;;; 그래도 방각본-보다는 열녀문-쪽이 더 나아요^^;;; 그나마.ㅡ.ㅡ;;;

이매지 2006-10-2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렇군요. 그래도 열녀문은 안 읽을래요~ ㅋ
 
소문의 벽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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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에 관한 레포트를 쓰기 위해 관련된 소설을 몇 편 읽었는데 다른 책들은 내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는데 이 책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읽어갔다. 그의 등단작인 '퇴원'에서부터 '소문의 벽', '황홀한 실종',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잔인한 도시', '겨울광장', '조만득씨'에 이르는 중단편들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관념적으로 읽혀갔다.

  이 책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니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퇴원'에서는 자아망실증을 겪는 주인공이, '소문의 벽'에서는 피해망상증을 겪는 주인공이, '황홀한 실종'에서는 가학적 유희욕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겨울광장'에서는 미쳐서 있지도 않은 딸을 찾는 주인공이, '조만득씨'에서는 과대망상성 정신분열증을 겪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처럼 이청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을 회피해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감시(전짓불)때문에 공포에 떨기도 한다.

  작가가 이런 주인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회의 병리적인 모습들을 조금씩 미쳐버린 사람들로 그린 것은 아닐까? 그들은 애초부터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그들을 미치게한 것은 아닐까? '소문의 벽'에서 박준은 촉망받던 작가였고, '조만득씨'는 사람 좋은 이발사였고, '황홀한 실종'에서 윤일섭은 능력있는 은행원이었다. 이들은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환경이 그들을 가만히 냅두지 않았고 그들은 좌절하게 되고 점점 깊이 그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됐다.

  이청준의 소설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읽고나면 억압에 대해,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다. 그리 두꺼운 소설들은 아니었지만 그 깊이와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그 어떤 소설보다도 방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청준의 사유는 끝나지 않았다. 이 책 속에서 등장한 주인공들은 또 다른 소설 속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등장하고, 끊임없이 상처받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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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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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기 전에 이번 책이 그의 다른 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실망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간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보여줬던 우회하면서 찌르는 방식도, <검은 꽃>에서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아닌 근 20년 동안 남한에 내려와 살고 있는 공작원이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24시간동안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 하루동안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들을 한발짝 물러서서 그냥 담담하게 서술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종말이 올 것이라고 떠들었던 1999년의 모습에서부터 지하철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의미없는 시선을 흘리는 모습, 무인텔에 들어가 두 젊은 사내와 몸을 섞는 중년의 여자의 모습, 미행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분주한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런 모습들은 그저 우리가 고개만 돌리면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전형적인 '남한'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그 곳의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김기영이라는 공작원이 4번 명령, 즉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일상이라 여겼던 그런 모습들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느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게 되고 그 모습들을 되새기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남한을 떠나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북의 복수가 두려웠던지라 그는 이리저리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떤 비밀스러운 임무를 하는 인물을 떠올렸다. 하지만 김기영은 너무도 뛰어난 스파이였는지 그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단, 다른 사람에게 비교적 존재감을 덜하지만.) 남파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자신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나 성찰, 혹은 이념적인 내용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저 아내와 중학생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의 고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소통할 수 없는 사람,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커다란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개별화된 사회 속에서 개별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는 무겁지 않고, 분단이라는 소재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로 자리한다. 개별화된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우리는 어쩌면 밝은 빛때문에 그 뒤에 숨어있는 것들을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김영하에게는 사회를 보는 눈은 마련되어있는 것 같다. 다만 그의 연배때문인지 아직 숙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가 어서 그의 경험치와 내면을 숙성시켜 좀 더 멋진 작품으로 다가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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