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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 - 하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재미는 있으나 깊이는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그나마 괜찮게 봤는데 이번에는 리심이라는 조선의 궁중 무희의 삶에 대해서 무려 3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시 찾아왔다. 사실 상권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면 재미있군'싶었었다. 야소교인 어머니가 그녀를 버리고,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이방의 도움으로 우연히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 그 곳에서 무희로, 의녀로 살다가 갑신정변에 휩싸여 갖은 고초를 당하고 명성황후 밑에서 발이나 닦는 처지로 추락하지만 춤때문에 고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게 된다. 하지만 고종말고도 그녀의 춤에 반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프랑스 외교관인 빅토르였다. 그는 서책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인물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리심을 콕 찝어 지목하게 되고, 리심은 프랑스 대사관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처음엔 괴물같았던 빅토르에게 리심이 마음을 열게 되고 그를 사랑하는 모습이 상권에 그려져있다. 중권에서는 직접 외국으로 떠난 리심이 해외의 문물을 접하게 되고 낯선 세상에서 온 황색인에 대한 온갖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권에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리심이 이런 저러한 사정으로 다시 궁중무희가 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이처럼 한 인물의 삶을 조망하고 있는 <리심>은 최초로 해외땅을 밟아본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듯 보인다.(혹은 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소설의 한계는 '소설'이 지닌 면과 '역사'가 지닌 면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점에 있다. 자칫하면 단편적인 사건을 짜집기해서 흥미위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짧게는 2장가량, 길게는 10장 남짓의 세분화된 챕터를 통해 작가는 에피소드의 나열을 이뤄낸다.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자에게 어수선함을 안겨줄 뿐이다. 물론 작가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직접 발로 뛰며 책을 짓기 위해서 노력을 했겠지만(자신의 이런 과정이라도 보여주려는 듯이 그는 책 앞장에 관련 사진을 실어놓기도 했다.) 이것은 창작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를 써서 상상 속의 이야기를 끌어오기보다는 발로 뛰어 자료를 수집하여 창작을 한 김탁환의 한계는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일까? 김탁환은 '리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의 족적을 쫓았고,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리심'은 '리심' 그녀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둥둥 주위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야기도, 주인공도 모두 섞이지 못하고 따로따로 서로의 길을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개화기의 혼란스럽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 속에는 곳곳에 '백탑파'의 흔적이 등장한다. 내가 읽은 <방각본 살인사건>과 읽다가 관둔 <열녀문의 비밀>에는 이 백탑파가 등장한다. 작가 나름대로 이들에 대한 관심(혹은 애정)이 높은 탓인지, 혹은 이에 대한 자료의 수집을 이미했기에 써먹기가 좋았던 것인지 작가는 백탑파의 흔적을 곳곳에서 들어낸다. 물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백탑파의 성격이 물론 개화기의 개화파의 성격과 실제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쓸데없는 부분에서도 백탑파는 유령처럼 등장하고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 또한 작품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 외에도 평이한 문체, 남성인 작가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문제(왜 리심과 관계한 많은 여성들을 그녀를 질투하고 시기하기만 하고, 남성들은 리심을 도우려고만 하는지!) 등이 불만족스러웠다. 리심이라는 좋은 소재를 김탁환이라는 작가는 양장본 3권에서 소비해버렸고, 그 소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책 속에서는 리심의 삶도, 리심의 꿈도, 그녀의 사랑도 그저 하나의 소재에 불과했다. '리심'이라는 공통항을 두고 이야기를 묶어놓은 개연성도, 상상력도 부재한 소설. 아마 이제 다시 김탁환의 소설은 읽을 일이 없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