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11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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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우리민족의 정서를 '한(恨)'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노래도, 문학도 한(恨)과 관련된 것이 많은 편이다. 이 책 <흰 옷>도 이청준특유의 한의 정서가 나타나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종선에게는 소중한 시절이었던 바닷가 임시 분교 이야기를 듣고 자란 동우. 동우는 일부러 아버지 종선의 옛 고향고을 남도 해변 포구가의 한 벽지 국민학교 신참교사로 가게된다. 그러나 동우는 부임해간 그 곳에서 아버지가 말한 그 임시분교는 흔적조차없고 서류상의 기록조차 부재한데다가 그 사실을 확인해줄만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동우는 아버지의 소중스런 유년시절의 그 학교의 역사를 다시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아버지인 종선은 아들의 그런 행동때문에 하나둘씩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옛 학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가면서 동우는 당시 학교의 교사들이 좌익세력에 동참했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종선은 비록 당시에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에게서 빨갱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지만 동우는 점점 그 문제에 집착해가며 당시의 교사들을 영웅취급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결국 당시 교장과 여교사가 죽은 산에서 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위령제를 지내며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이 책 속에는 좌익과 우익,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로 대표되는 여러 인물들의 대립상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갈등은 마지막에 버꾸농악을 방식으로 한 혼백제에서 청대가지를 타고 내릴 혼주로 등장한 방 선생(임시분교 시절의 선생으로 있었지만 그 때의 사정을 이야기해주려하지 않는 인물)이 "망자들의 영혼을 묶은 그 질긴 질곡의 마디를 풀어주자고. 그것으로 생자들도 그 허망한 악몽과 망자들의 그림자를 털고 일어나 이승에서의 제 삶을 제길따라 살아 흘러가게 해보자고...저 아이들에게 다시 내일의 사슬을 만들어 남기지 않으려면 오늘 우선 망자들부터 그 사슬을 끊어 풀어줘야 하니께, 그래서 오랜 세월 그 망자들의 꿈을 함께해온 생자들도 그 낡은 미망의 사슬을 벗어날 수가 있으니께. 망자들은 망자의 길을 가게 하고, 생자들은 제 생자다운 세월을 살게 하고...그리고 저 아침풀잎같은 고운 아이들에겐 저들에게 더 잘 맞는 저들의 노래 속에 소복보다 더 고운 옷을 입고 고운 춤을 추게 하고. 그래서 이쪽이고 저쪽이고 이제는 이 산하가 온통 저들의 행복스런 춤판이 되게 하고...저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소망이요, 꿈이니께, 저들이 이젠 이 땅의 내일의 모습이니께..."라고 하는 말을 통해 풀리게 된다. 그 굿을 진행한 동우도, 동우의 청을 듣고 온 종선도, 모두 지나간 옛꿈과 노래의 질곡에서 벗어나 각기 제 삶과 죽음의 길을 따라 자기몫의 세월을 흘러가게 하자는 소망을 갖게 되고 미래를 위해 한 발 나아가게 된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한 부분이자 짐이라 할 수 있는 소망과 아픔.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으려는 모습을 이 책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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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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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이청준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때문에 읽기를 꺼려하고 있었던 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신들의 천국>을 집어들면서 내심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책을 집어들고 나니 무거운 소재와는 달리 책장은 술술 잘도 넘어가서 별다른 어려움없이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서문에서 작가가 밝혔듯이 이 책은 소록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둥이들이 모여살고 있는 그 곳에 조백헌 원장이 새로 부임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임과 동시에 터진 탈출사건때문에 취임식도 잠시 미뤄두고 탈출사건에 대해 파악하는 조원장. 섬에 대해 잘 모르는 그에게 보건과장인 이상욱은 이것저것 알려주며 그에게 도움을 준다. 그리고 취임식에서 조원장은 그들의 천국을 만들겠노라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원장이 취임될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섬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이에 조원장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한 발 한 발 문둥이들의 천국을 만들어가려고 하는데...

  수업시간에 이 책을 들어 교수님께서는 제목의 탁월함을 언급하셨다.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이 주는 함축적 의미.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과 오늘날의 현실도 결국은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야기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시큰둥했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그 곳이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되었다. 원생들의 탈출사건이나 무관심한 태도 등에서 배신감을 느꼈던 조원장. 하지만 원생들의 내부에는 '정상인'에 대한 불신이 녹아져있었고, 실상 그들에게 천국을 만들어주겠다는 조원장은 그들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원장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사람들. 조원장이 만들어놓은 의사소통을 위한 장치들도 결국엔 알고보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억압도구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 천국을 만들려는 계획은 그들의 자유의지가 담겨있지 않았기에 결국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내용들은 책의 결말부분에서 조원장이 다시 섬으로 돌아오고, 정상인과 원생의 결혼하게 되는 것을 통해 전환되며 끝난다. 이런 결말을 통해 '우리들의 천국'을 위한 믿음과 사랑의 싹이 아직은 땅 밑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그 싹을 티우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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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서울,1964년 겨울 유자약전 조용한 강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9
김승옥.이제하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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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이 국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국문학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전공자이지만 비전공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창비에서 새로나온 20세기 한국문학을 접할 기회가 생겼고,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김승옥, 이제하 외>를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이 책 속에는 백익빈의 <조용한 강>, 이제하의 <유자약전>, <초식>,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김승옥의 <생명연습>, <건>, <역사>,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이렇게 총 3명의 작가의 아홉 작품이 실려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아홉 작품가운데 읽어본 것은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뿐(물론, 제목만 보고는 몰랐는데 <건>은 예전에 수능공부하면서 지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긴했다만 전 작품은 읽은 건 처음인 듯 싶다.). 심지어 백인빈과 이제하라는 작가가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으니 전공자로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알아간다는 마음으로 읽어간 소설들은 예상 외의 감상을 불러일으켜줬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 함께 묶인 작가들은 1960년대 활동했던 작가들로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그것을 대놓고 비난하기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부정적인 인물의 모습과 함께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도 차마 나설 수 없어 묵인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조용한 강>에서 아버지에게 맨날 두들겨맞는 삼능이는 아버지만 보면 도망다니지만 한편으로는 동네 아이들을 주무르고 있고, <건>에서 주인공은 형이 이웃집 누나를 강간하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뜻 그녀를 불러내는 심부름을 맡기도 한다. 또, <생명연습>에서는 어머니를 죽이자고까지하는 형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것을 묵인하는 나의 이야기가 그려지기도 한다. 이런 다소 모순적인 유년의 모습뿐만 그린 것이 아니라, <유자약전>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로의 삶을 살아가려는 여자가 결국 순교하듯이 죽어버리는 이야기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의 아내의 뼈를 뿌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중풍 노인을 모시고 있는 미세스 최라는 간호사와 함께 몸을 섞고 그녀와 진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 다음 날 그녀는 신내림을 받게 되는 이야기,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함께 숙박한 남자의 자살을 예감했지만 달리 손을 쓰지 않고 무관심하게 스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에서 가풍을 내세워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집에 들어가 살게된 한 남자의 고통과 역사(力士)임을 숨기고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현실에 억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의 당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이런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위치는 다를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가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소설을 통해, 그 속의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유자약전>처럼 환상적 리얼리즘의 모습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접해본 이제하나 백익빈의 이야기도 좋았지만,(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김승옥을 재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익히 알고 있었던 <무진기행>이나 <서울, 1964년 겨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작품들은  직접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때로는 묘사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이 책 속에 실린 해설을 빌리자면 '감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좀 더 많은 그의 작품들을 접해보고 싶은 욕심까지 들었으니 이 정도면 이 책은 내게 어떤 기회를 마련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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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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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실업자가 몇 십만명이나 되는 현실. 그 현실 속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취업을 하겠다고 아둥바둥 발버둥을 치고 있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 일을 해야겠다는 목표에서가 아니라 취업을 하려는 사람보다 남들이 좋다니까, 그래도 직장은 있어야하니까, 그래도 돈이 필요하니까 등의 현실적인 이유로 취업을 하고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는 대학의 졸업이 점점 다가오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실업문제 관련 뉴스들을 들으며 점점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내가 이러다가 취직도 못하고 백수로 지내야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 토익점수를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하나라도 더 따려고 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하는 등 갖가지 노력들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현실에 매달리고 있는데 여기 한 사람. 책을 읽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자발적 백수의 길을 택한 여자 '나(서연)'가 있다.

  돈이라곤 책을 살 돈 정도만 필요한 서연은 아버지의 신세라곤 집에 얹혀사는 정도만 진 채 주유소나 편의점과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쓸 돈을 번다. (이마저도 가끔가다가 필요할 때만) 이 외에 시간은 그녀에게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일 뿐이다. (가끔 영화도 보지만) 서연을 이야기 외에 이 책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부도 잘 하고 예쁘게 생겼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껴 번번히 회사를 때려치는 친구 유희나 로맨스소설에 심취해 있는 친구 채린. 그리고 오로지 돈 많은 여자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에 빠져있는 경. 이렇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은 왠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것만 같다. 그나마 현실적인 인물이라곤 서연의 아빠인 것 같았다. 달랑 두가지 메뉴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지만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하면서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 모습. 그리고 자발적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딸에게 신경을 안 쓰는 척하면서 살짝씩 신경을 써주는 모습 등이 인상깊게 남았던 것 같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300페이지 가량의 이 책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오죽 책을 좋아해 자발적 백수생활을 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보니 퍽하면 다른 책을 인용하거나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제목만 언급된 책은 제외하고더라도 50편에 가까운 책들이 이 책 속에는 녹아있다. 물론, 짤막하게 인용된 말들은 가끔씩은 너무 과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젊은 작가가 써낸 책이라 그런지 인터넷 세대들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책.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한 달에 30~60권의 책을 읽어해치우는 주인공 서연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을 듯 싶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수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을 가진 독자라면 실망하지 않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건 백수의 '현실'이 아니라 백수의 '꿈'이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파라다이스이기에 더 멋져보일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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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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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글로 사로잡았다. 장편 소설인 <칼의 노래>, <현의 노래>로 이어지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와 에세이인 <자전거 여행>을 통해 이어지는 그의 삶의 이야기는 그 대상이나 시대때문에 다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군더더기없는 그의 문장은 그의 어느 글에서나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문체는 소설을 꽤 빨리 읽어가는 내 습관을 무색하게 만들며 느릿느릿 한 걸음씩 문장과 문장을 읽어가게끔 했기에 왠지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나 개학을 앞두고 마지못해 해치워야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김훈의 소설집인 <강산무진>이 출간되었을 때 나의 고민은 이 숙제를 빨리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되도록 미뤄둘 것인가하는 것이었다.(물론, 이 책 속에 실린 작품 가운데 '화장'이나 '언니의 폐경'은 문학상을 수상했기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만나볼 수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문학상 수상작품집보다는 작가의 소설집을 좋아하는 관계로 미뤄두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매도 먼저 맞자는 생각으로 그의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처음 이야기인 '배웅'을 읽으면서 난 장편소설이나 에세이에서 접한 것보다는 좀 더 속도감있는 문장을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김훈의 다른 글을 읽을 때보다는 빠르게 읽어갔다. 하지만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빨랐을지라도 그 여운이나 슬픔은 되려 오래도록 남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배웅'에서 만난 택시기사, 아내의 죽음도 그저 일상처럼 지나가는 '화장'에 등장하는 남자, '향로표지'에서 만난 등대장, '뼈'에 등장하는 교수, '고향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형사, '언니의 폐경'에 등장하는 슬픔을 가진 자매, '머나먼 속세'에 등장하는 챔피언에 도전하는 권투선수, '강산무진'에 등장하는 암에 걸린 회사원. 그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 각각의 삶의 슬픔이나 고통, 그것과 대면하는 모습도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책을 읽는 독자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가지의 아픔을 가지고 있기마련이고, 누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삶과 타협(혹은 순응)하지 않았더라면 아내의 죽음을 겪으며 화장품 광고에 대한 시안을 결정하는 일은 미뤄버렸을 것이고(화장), 그렇게 큰 의미도 없는 여자의 엉덩이 뼈를 박물관에 전시하는 일을 막았을 것이며(뼈), 담담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이혼하자고 하는 남편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았을 것이리라(언니의 폐경). 그들은 그저 그렇게 자신의 앞에 닥친 현실에 순응하며 그저 그렇게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바람이 부는 것같은 일반적인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슬픔은 분출되지 않고 가만히 가슴 한 켠에 놓여져있기에 독자가 보기엔 되려 더 슬프고, 애처롭기만 하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슬픔을 극대화시켜주는 것은 김훈의 문체일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의 문체는 군더더기가 없고 담담하다. 원래의 기사를 쓰던 그이기때문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그런 점을 떠올려주기를 바랬던 것인지 간혹 읽다보면 기사를 읽는 느낌을 받을 때도 더러 있었다. 등장인물에게 어떤 특정한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저 글을 써내려가는 그의 문장은 되려 독자에게 등장인물에게 감정이 이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셈. 뭔가 기사같은 냄새가 풍기는데라고 생각한 데는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전문성을 띈다는 면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짧은 단편 속에 그 직업의 특성을 녹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직업적인 말이나 행동은 전문적 기사에서 만날 수 있는 용어처럼 느껴졌지만, 되려 그런 면들이 그들의 삶과 결합하여 인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듯 하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마음은 '고독'과 '슬픔'으로 이루어져있다. 위태위태하게만 느껴지는 그들의 감정. 하지만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의 '일상'자체이다. 그들의 삶은 그런 감정에도 불구하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내가 그렇듯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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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5-0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흠, 담백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리뷰로군요. 추천 한방!

이매지 2006-05-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 말이 머리에 잔뜩 쌓여 있는데 이상하게 글로 안 써져서 고생했어요. 나중에 수정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