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섹스 -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남녀 차이
앤 무어.데이비드 제슬 지음, 곽윤정 옮김 / 북스넛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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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아내와 쇼핑을 하게 되면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있어 신속하다. 반면에 아내는 이것저것 매장을 돌아다닌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사지 않을 물건까지 구매한다. 더구나 빨리 계산을 하고 나가고 싶은데 누구한테 전화가 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머뭇거린다.

누구나 그렇듯 남녀의 차이는 알듯 하면서도 곤란하다. 알고자 하면 괜한 오해를 받기 쉽고 모르고 있다면 남녀의 심리에 대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녀가 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앤 무어. 데이비드 제슬의『브레인 섹스』는 제목에 나와 있듯 뇌를 주제로 하고 있다. 흔히 섹스하면 남녀의 육체적인 만족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뇌가 섹스의 주체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몸의 구조에 있어 뇌의 무게가 남성이 1.4kg이며 여성이 1.2kg에 불과하지만 뇌의 역할은 특별하다.

가령, 앞서 나와 아내가 충돌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뇌의 구조에 있다. 보통 정보처리센터를 처리를 담당하는 곳이 뇌의 회백질이다. 그리고 이 정보처리센터 내에서 관계나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부분은 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남녀의 뇌 구조에 있어 남자의 회백질 양은 여자보다 6.5배 많다. 반면에 여자는 백질이 남자보다 거의 10배는 많다.

또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섬유 다발인 뇌량(corpus callosum)이 남녀의 차이를 반영한다. 즉 남자의 뇌량은 얇은 반면에 여자의 뇌량은 두껍다. 이로 인해 남자는 각각의 활동을 뇌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통제한다. 그러나 여자는 같은 활동을 양쪽의 뇌에서 통제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호르몬에 있다. 흔히 남자는 테스토스테론, 여자는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이 행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남녀의 성별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성별의 차이는 아버지의 X 염색체, 어머니의 Y 염색체에 있다.

그러나 저자는 유전자만이 아기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성을 결정하는 데 다른 요인인 호르몬이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태아의 유전자 형성과 상관없이 남성 호르몬이 자궁 속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남자가도 되고, 남성 호르몬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남녀의 뇌구조 및 호르몬의 영향으로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이 남성만큼 숫자를 잘 읽지 못하는 반면에 사람을 더 잘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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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26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남섬보다 사람을 더 잘 읽는다는 사실에 뇌가 관련되어 있군요.^^

오우아 2009-04-28 14: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 독살사건 1 - 문종에서 소현세자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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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이 말은 조선 22대 왕 정조(正朝)가 침전에 달았던 편액(扁額)이었다. 조선 왕조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왕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이름에 걸맞게 바른 정치를 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중에서도 탕평책을 빼놓을 수 없다. 자나 깨나 그 편액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하지만 정조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재위 24년 개혁 군주는 끝내 비운의 죽임을 당했다. 죽음의 원인은 종기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火氣)” 때문이었다. 생부였던 사도세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뒤주 속에 갇혀 죽었으니 그 원통함은 화병(火病)의 굴레였다.

그동안 정조의 병사(病死)는 역사적 사실로 여겨졌다. 우리의 제도권 교육은『조선왕조실록』을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강력하게 다룰 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원인의 등급화라는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원인의 등급화란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 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이라는 문제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독살의 가능성에 대해 분명하게 이렇다 저렇다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살의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이덕일의『조선 왕 독살 사건』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TV나 대중매체에서 대단한 흥밋거리로 오해받을 수 있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조선 왕들의 급서를 파헤치고 있다. 이미 대중적 역사서의 새로운 지평을 펼친 저자의 탄탄한 글쓰기는 우리들에게 진짜 역사란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하게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조선왕조실록』에 가려진 조선 왕들의 죽음의 이면이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 왕 독살설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조선 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조선 왕조는 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다스렸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들의 재위 기간이 조선 8대 예종처럼 적게는 1년 1개월이고 조선 14대 선조처럼 많게는 40년이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게임에 휘말릴 때 왕들은 의문의 죽음 즉, 급서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것이 저자에게 이 책의 결정적인 모티프였다. 저자는 급서의 현장을 꼼꼼하게 두루 살피면서 숨겨진 역사를 구원하고 있다. 그는 조선 왕 3명 중 1명이 독살되었다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성찰은 날렵하면서도 진지하다. 이 책을 읽고 독살의 가능성에 대해 비평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는 독살 프리즘을 제시하면서 이를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더불어 독살이다, 아니다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는 역사에 대한 묵직한 반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독살 프리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문종 독살설이며 다른 하나는 정조 독살설이다. 문종 독살설은 문종-단종-세조로 이어지는 골육상쟁의 왕위 쟁탈전의 희생양이었다. 반면에 영조와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의 비극을 겪은 정조는 이에 맞서 남인을 등용하면서 개혁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곧바로 정경왕후와 노론의 집권 세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남인을 철저하게 복수했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은 당파 쟁탈전의 희생양이었다.

이러한 조선 왕 독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권력의 탄생에 주목하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정치적 희생자로 구체화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선의 국왕이 일본의 천황과 중국의 황제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측면을 보여주면서 객관적으로 지배층의 비정상적인 정치 행위를 드러나게 했다.

저자는 조선 국왕들의 탄생과 몰락을 추적하면서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가 아니라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의 절대권이라는 것이 이론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에 있어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전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조건부 충성의 대상이었다. 결국 조선 왕조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신하(臣下)였다.

저자의 위와 같은 주장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탓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조선 왕 독살 사건은 근거 없는 일방적인 자기주장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그릇된 정보와 억측으로 조선 왕조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사의 문외한이 나로서도 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권력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상상이 아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일찍이 러셀이 권력이란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조선 왕 독살은 정의로운 (?) 효과를 내는 데 있어 가장 안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의구심이 갈수록 많아지자 조선 왕조에는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 좀처럼 화끈거리는 얼굴을 삭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정조 어찰(임금의 편지)가 일부 공개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번 정조 어찰의 당사자는 정조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였다. 정조가 개혁군주였다면 심환지는 정조 독살설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서로 라이벌이었던 그들이 파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조선 왕 독살 사건의 화약고였던 정조 독살설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심환지를 옹호하는 쪽은 심환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몰두했다. 반면에 정조를 옹호하는 이덕일은 그래도 뒤집을 수 없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심환지와의 각별한 관계는 통치를 위한 방편으로 봐야지, 독살설을 뒤집을 증거로 삼는 건 말도 안 된다.”라고 자신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어느 때보다 지금 역사의 뒤안길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조선 왕 독살 사건』은 좋은 길라잡이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 왕들의 치세와 과오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린 탓에 좋은 왕, 나쁜 왕이라는 잣대로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제목에 나와 있듯 저자는 조선 왕 독살 사건의 전후를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다. 왕의 자리는 바늘방석이었고 고독했다. 결과적으로 독살이라는 바이러스가 전염성이 강한 만큼 조선 왕들은 아까운 목숨을 잃어버렸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조선 왕들은 슬프다. 조선 왕들이 아무 말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었다고 해서 독살의 진실마저 무덤 속으로 파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반성하지 않는 역사에 대해 저자의 혜안은 놀라울 만큼이나 진솔하다. 물론 역사는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높이에 초점을 맞춘 저자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며 조선 왕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그의 독살 프리즘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래서 인지『전쟁에 반대하다』를 통해 미국의 양심을 호소하면서도 “나는 역사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발견하려 애씁니다.”라고 말했던 하워드 진의 목소리나『조선 왕 독살 사건』을 통해 독살의 부정적인 면을 모두 밝히면서도 “반성 없는 역사에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역사를 어디에 쓰겠는가?” 라는 이덕일의 목소리가 서로 겹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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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션 - 생각의 연결이 혁신을 만든다, 세계를 바꾼 발명과 아이디어의 역사
제임스 버크 지음, 구자현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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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와 1+1=3의 차이는 뭘까? 가장 단순하게 전자는 정답이고 후자는 오답이다. 하지만 창조적 사고의 기준에 있어 드 보노의『수평적 사고』에 따르면 전자는 수직적 사고이며 후자는 수평적 사고이다. 전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후자는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기존의 패턴을 넘어서는 발상의 전환이다.

제임스 버크의『커넥션』은 ‘생각의 연결이 혁신을 만든다.'는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생각은 앞서 말한 수평적 사고이다. 수평적 사고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만유인력을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봤을 뿐이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만약 뉴턴에게 거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인이라는 존재 또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창조적 사고의 사례 중에서 벨이 전화기를 발명하기까지 커넥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시작은 놀랍게도 중세 기사(騎士)에 있었다. 중세 전투에서 기사 즉 말을 탄 전사에게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은 큰활로 프랑스 기사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런 전투의 모습은 쟁기에 따른 농업혁명, 인구증가에 따른 노동력, 그리고 화약의 발견으로 인해 쇠퇴했다. 특히 화약으로 인하여 대포의 수요가 빠르게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현금(現金)이 부족해서 은광 발견이 이루어졌다.

광산에서 물을 빼내는 방법 중에서 크랭크를 회전하는 수차 축에 부착하는 것이다. 크랭크가 실린더 안의 피스톤을 작동시켜 실린더의 열린 한쪽 끝으로부터 물을 끌어 올렸다. 피스톤이 실린더로 물을 빨아올리면 바닥의 밸브기 닫히고 이어서 위쪽의 밸브기 열리고 내려오는 피스톤은 물을 열린 밸브로 밀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피스톤이 수면 위로 10미터 이상까지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토리첼리는 수은의 작용을 발견하였고 이로 인해 기압계가 발명되었다. 이 기압계에서 장 피카르는 기압계를 흔들수록 발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혹스비는 유도 기계를 만들었으면 볼타는 세계 최초로 전지를 만들었다. 또한 외르스테드는 전류는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사실을 추론했고 윌리엄 스터전은 전자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마이클 페러데이는 코일에 전기를 흐르게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는 전자석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여 소리굽쇠의 팔을 잡아당겨서 진동시켜 소리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업적을 모아 벨은 전화기를 발명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혁신의 변화 과정에서 세 가지 작동 요인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기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의 발견하려는 시도가 또 다른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관(無關)한 발전이 주요 사건에 결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이런 효과에 있어 저자는 정보(情報)에 주목한다. 즉 정보가 확산되는 방식에서 일어난 변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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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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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상에는 고군분투대신 나태와 오만함에 몸을 맡겨 버리는 천재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한때 면도날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번쩍임과 예리함을 잃어버린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쇠붙이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폴 존슨은『창조자들』에서 위대한 예술가 17명의 특혜 받은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제프리 초서, 알브레히트 뒤러, 파블로 피카소, 월트 디즈니 등등 한 번 들어도 결코 뇌에서 사라지지 않을 쟁쟁한 인물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색다르고 낯선 만족감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삶이라는 예술가들의 지적 궤도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면도날이 될 수밖에 없는 뒷 얘기들을 치열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렸다. 

먼저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물은 제프리 초서였다. 영문학의 창시자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시인의 자리라는 곳에 가장 먼저 시신이 안치된 사람이 바로 초서였다. 그가 어휘 8000개를 구사한 창조성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사건을 두루 다루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어휘까지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초서보다 약 24000개의 어휘를 구사했지만 정작 새로 추가한 단어는 1000개가 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를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초서와 달리 마을에서 장갑을 팔았던 아버지의 평범함에서 벗어나 ‘햄릿’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분별력에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성 강한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영국문학에서 가장 창조적인 이들과 함께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는 예술가는 다름 아닌 제인 오스틴이었다. 작품이 불과 여섯 편에 불과했지만 200년 동안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었다. 괜찮은 아가씨 즉 미모가 보통이었던 오스틴의 작품에는 악마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말한 두 거장에는 자기만의 악마를 품고 있으며 내부의 악마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곧 마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오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현실적이며 독창적으로 창조했다.

이와는 다르게 마크 트웨인의『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극과 극이다. 한쪽에서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라고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이제까지 나온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마크 트웨인은 놀랍게도 공인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이야기를 잘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야기 잘하는 법을 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끝으로 대단히 광범위한 면에서 창조적인 예술가였던 빅토르 위고는 무식한 천재라는 것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의 지적 수준이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다는 것이다.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탐독하면서 동시에 마구 잡이로 흡수했다. 이로 인해 그는 언어를 감지하는 귀가 발달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를 사랑한 재능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게 했다.

이렇듯『창조자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다. 창조성의 다양한 해석 중에서도 오스틴을 말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중에서도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뛰어난 심판관’에 공감했다. 가령, 패션 역사에 있어 두 명의 거장 즉 발렌시아가와 디오르는 단춧구멍으로 서로를 심판했다. 디오르가 만든 드레스 등에 작은 단추가 36개나 달린 것을 보고 발렌시아가는 24개면 충분하다고 했다. 발렌시아가는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양재사였다면 디오르는 바느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디자이너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심판관이 앞서 말한 면도날과 쇠붙이의 결정적 차이였다. 저자 말대로 우리 역시 창조자들이다. 다만 위대한 창조자들과 달리 선천적(先天的)이다. 선천적에서 위대함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적 용기가 절실하다. 또한 두 가지 교양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 교양이란 스노우가『두 문화』에서 말한 예술과 과학을 말한다. 사실상 창조적 사고에 있어 예술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다. 좀 더 말하면 자크 라강이 “모든 욕망은 은유다.”라고 했듯이 폴 존슨은 “모든 도식은 은유다.”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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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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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혹은 성당에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혼 전까지는 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 교회 혹은 성당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취향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했습니다.

삼십대 후반 그러니까 결혼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달콤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쓰디 쓴 약을 삼켜야 했습니다. ‘왜 아내의 잘잘못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일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톨스토이의『부활』을 읽다가 ‘참다운 용서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이제까지 용서라는 좋은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이지 가슴을 물컹거리게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해야 한다.”

일곱 번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모자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굳이 어떤 종교를 따져 묻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삶의 좋은 안내서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이런 찰나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불쑥 “우리 성당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왜?”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내의 욕구불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한 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이제 일요일은 주말(週末)이 아니라 주일(主日)이었습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이 주일이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내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회의감에 젖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늘 적당히 지나쳐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동행하면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여전히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막상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믿음이 흔들리면서 서로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심이 약한 것일까요? 믿음이 어긋나고 있을 무렵에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었습니다. ‘미국 현지 600만 부 돌파!’라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한몫했지만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울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하느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라는 다소 거짓말 같은 두려움과 설레임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 맥이 선택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른이 된 맥이었지만 결혼해서 다섯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쳐오면서 그는 ‘거대한 슬픔’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야영장에서 마지막 날 막내인 미시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위로하면서 미시를 찾아보지만 결국 납치범에게 근처의 ‘오두막’에서 살해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맥에게 오두막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오두막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하는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거대한 슬픔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미시가 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반문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가죽 표지에 길트(glit,금박)로 장식된 테두리가 있는 값비싼 책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친근하게 하느님이 아닌 ‘파파’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짓궂은 장난 이상으로 비통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두막으로 가는 것을 어렵게 선택한 것은 맥에게 운명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낯선 오두막에 들어가자 치자나무와 재스민향이 감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향수 냄새를 풍기는 파파가 “나는 눈물을 수집한답니다.”라고 대답할 때였습니다. 또한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라는 솔직한 고백을 듣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오두막』을 통해서 맥이 고민했던 문제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우연한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랑의 끝이 어디까지 가늠하게 합니다. 누구누구를 벌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유하며 사랑의 흔적을 끝없이 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 사람(파파-성부, 예수-성자, 사라유-성령)이 한 몸이 되어 맥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에서 배울 수 있지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동사(動詞)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령, 나와 당신이 친구라고 했을 때 서로가 바라만 봐도 기쁜 관계 속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명사형(名詞形)인 ‘기대’로 바뀌면 놀랍게도 서로에게 계율이 됩니다. 우정이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될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고민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맥처럼 딸의 비참한 죽음 이후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이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슬픔의 집이 있다면 아마도 오두막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오두막에서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보는 것이 참다운 인생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는 우리 모두 마음이 아이처럼 흰색(白色)으로 빛나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보통 황금(黃金)이라고 불리는 금색은 알고 보면 전혀 금색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빛깔 중에서 노란색만 반사시키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얼굴이 붉게 되거나 괴로울 때 얼굴이 검게 됩니다. 슬픔을 제대로 반사시키지 못해 아이처럼 해맑게 울고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힘들고 지칠 때 왜 내가 불행의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최악(最惡)이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최선(最善)이라고 해서 불행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중심(中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두막』의 감동처럼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오두막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맥과 같이 과거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루한 삶에 지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불행이 쌓여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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