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혹은 성당에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혼 전까지는 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 교회 혹은 성당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취향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했습니다.

삼십대 후반 그러니까 결혼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달콤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쓰디 쓴 약을 삼켜야 했습니다. ‘왜 아내의 잘잘못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일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톨스토이의『부활』을 읽다가 ‘참다운 용서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이제까지 용서라는 좋은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이지 가슴을 물컹거리게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해야 한다.”

일곱 번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모자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굳이 어떤 종교를 따져 묻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삶의 좋은 안내서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이런 찰나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불쑥 “우리 성당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왜?”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내의 욕구불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한 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이제 일요일은 주말(週末)이 아니라 주일(主日)이었습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이 주일이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내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회의감에 젖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늘 적당히 지나쳐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동행하면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여전히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막상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믿음이 흔들리면서 서로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심이 약한 것일까요? 믿음이 어긋나고 있을 무렵에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었습니다. ‘미국 현지 600만 부 돌파!’라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한몫했지만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울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하느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라는 다소 거짓말 같은 두려움과 설레임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 맥이 선택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른이 된 맥이었지만 결혼해서 다섯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쳐오면서 그는 ‘거대한 슬픔’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야영장에서 마지막 날 막내인 미시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위로하면서 미시를 찾아보지만 결국 납치범에게 근처의 ‘오두막’에서 살해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맥에게 오두막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오두막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하는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거대한 슬픔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미시가 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반문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가죽 표지에 길트(glit,금박)로 장식된 테두리가 있는 값비싼 책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친근하게 하느님이 아닌 ‘파파’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짓궂은 장난 이상으로 비통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두막으로 가는 것을 어렵게 선택한 것은 맥에게 운명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낯선 오두막에 들어가자 치자나무와 재스민향이 감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향수 냄새를 풍기는 파파가 “나는 눈물을 수집한답니다.”라고 대답할 때였습니다. 또한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라는 솔직한 고백을 듣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오두막』을 통해서 맥이 고민했던 문제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우연한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랑의 끝이 어디까지 가늠하게 합니다. 누구누구를 벌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유하며 사랑의 흔적을 끝없이 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 사람(파파-성부, 예수-성자, 사라유-성령)이 한 몸이 되어 맥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에서 배울 수 있지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동사(動詞)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령, 나와 당신이 친구라고 했을 때 서로가 바라만 봐도 기쁜 관계 속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명사형(名詞形)인 ‘기대’로 바뀌면 놀랍게도 서로에게 계율이 됩니다. 우정이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될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고민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맥처럼 딸의 비참한 죽음 이후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이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슬픔의 집이 있다면 아마도 오두막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오두막에서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보는 것이 참다운 인생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는 우리 모두 마음이 아이처럼 흰색(白色)으로 빛나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보통 황금(黃金)이라고 불리는 금색은 알고 보면 전혀 금색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빛깔 중에서 노란색만 반사시키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얼굴이 붉게 되거나 괴로울 때 얼굴이 검게 됩니다. 슬픔을 제대로 반사시키지 못해 아이처럼 해맑게 울고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힘들고 지칠 때 왜 내가 불행의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최악(最惡)이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최선(最善)이라고 해서 불행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중심(中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두막』의 감동처럼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오두막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맥과 같이 과거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루한 삶에 지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불행이 쌓여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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