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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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상에는 고군분투대신 나태와 오만함에 몸을 맡겨 버리는 천재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한때 면도날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번쩍임과 예리함을 잃어버린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쇠붙이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폴 존슨은『창조자들』에서 위대한 예술가 17명의 특혜 받은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제프리 초서, 알브레히트 뒤러, 파블로 피카소, 월트 디즈니 등등 한 번 들어도 결코 뇌에서 사라지지 않을 쟁쟁한 인물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색다르고 낯선 만족감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삶이라는 예술가들의 지적 궤도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면도날이 될 수밖에 없는 뒷 얘기들을 치열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렸다. 

먼저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물은 제프리 초서였다. 영문학의 창시자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시인의 자리라는 곳에 가장 먼저 시신이 안치된 사람이 바로 초서였다. 그가 어휘 8000개를 구사한 창조성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사건을 두루 다루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어휘까지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초서보다 약 24000개의 어휘를 구사했지만 정작 새로 추가한 단어는 1000개가 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를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초서와 달리 마을에서 장갑을 팔았던 아버지의 평범함에서 벗어나 ‘햄릿’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분별력에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성 강한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영국문학에서 가장 창조적인 이들과 함께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는 예술가는 다름 아닌 제인 오스틴이었다. 작품이 불과 여섯 편에 불과했지만 200년 동안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었다. 괜찮은 아가씨 즉 미모가 보통이었던 오스틴의 작품에는 악마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말한 두 거장에는 자기만의 악마를 품고 있으며 내부의 악마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곧 마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오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현실적이며 독창적으로 창조했다.

이와는 다르게 마크 트웨인의『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극과 극이다. 한쪽에서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라고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이제까지 나온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마크 트웨인은 놀랍게도 공인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이야기를 잘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야기 잘하는 법을 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끝으로 대단히 광범위한 면에서 창조적인 예술가였던 빅토르 위고는 무식한 천재라는 것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의 지적 수준이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다는 것이다.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탐독하면서 동시에 마구 잡이로 흡수했다. 이로 인해 그는 언어를 감지하는 귀가 발달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를 사랑한 재능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게 했다.

이렇듯『창조자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다. 창조성의 다양한 해석 중에서도 오스틴을 말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중에서도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뛰어난 심판관’에 공감했다. 가령, 패션 역사에 있어 두 명의 거장 즉 발렌시아가와 디오르는 단춧구멍으로 서로를 심판했다. 디오르가 만든 드레스 등에 작은 단추가 36개나 달린 것을 보고 발렌시아가는 24개면 충분하다고 했다. 발렌시아가는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양재사였다면 디오르는 바느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디자이너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심판관이 앞서 말한 면도날과 쇠붙이의 결정적 차이였다. 저자 말대로 우리 역시 창조자들이다. 다만 위대한 창조자들과 달리 선천적(先天的)이다. 선천적에서 위대함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적 용기가 절실하다. 또한 두 가지 교양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 교양이란 스노우가『두 문화』에서 말한 예술과 과학을 말한다. 사실상 창조적 사고에 있어 예술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다. 좀 더 말하면 자크 라강이 “모든 욕망은 은유다.”라고 했듯이 폴 존슨은 “모든 도식은 은유다.”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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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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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혹은 성당에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혼 전까지는 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 교회 혹은 성당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취향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했습니다.

삼십대 후반 그러니까 결혼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달콤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쓰디 쓴 약을 삼켜야 했습니다. ‘왜 아내의 잘잘못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일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톨스토이의『부활』을 읽다가 ‘참다운 용서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이제까지 용서라는 좋은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이지 가슴을 물컹거리게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해야 한다.”

일곱 번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모자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굳이 어떤 종교를 따져 묻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삶의 좋은 안내서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이런 찰나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불쑥 “우리 성당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왜?”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내의 욕구불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한 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이제 일요일은 주말(週末)이 아니라 주일(主日)이었습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이 주일이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내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회의감에 젖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늘 적당히 지나쳐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동행하면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여전히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막상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믿음이 흔들리면서 서로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심이 약한 것일까요? 믿음이 어긋나고 있을 무렵에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었습니다. ‘미국 현지 600만 부 돌파!’라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한몫했지만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울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하느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라는 다소 거짓말 같은 두려움과 설레임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 맥이 선택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른이 된 맥이었지만 결혼해서 다섯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쳐오면서 그는 ‘거대한 슬픔’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야영장에서 마지막 날 막내인 미시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위로하면서 미시를 찾아보지만 결국 납치범에게 근처의 ‘오두막’에서 살해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맥에게 오두막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오두막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하는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거대한 슬픔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미시가 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반문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가죽 표지에 길트(glit,금박)로 장식된 테두리가 있는 값비싼 책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친근하게 하느님이 아닌 ‘파파’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짓궂은 장난 이상으로 비통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두막으로 가는 것을 어렵게 선택한 것은 맥에게 운명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낯선 오두막에 들어가자 치자나무와 재스민향이 감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향수 냄새를 풍기는 파파가 “나는 눈물을 수집한답니다.”라고 대답할 때였습니다. 또한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라는 솔직한 고백을 듣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오두막』을 통해서 맥이 고민했던 문제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우연한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랑의 끝이 어디까지 가늠하게 합니다. 누구누구를 벌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유하며 사랑의 흔적을 끝없이 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 사람(파파-성부, 예수-성자, 사라유-성령)이 한 몸이 되어 맥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에서 배울 수 있지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동사(動詞)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령, 나와 당신이 친구라고 했을 때 서로가 바라만 봐도 기쁜 관계 속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명사형(名詞形)인 ‘기대’로 바뀌면 놀랍게도 서로에게 계율이 됩니다. 우정이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될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고민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맥처럼 딸의 비참한 죽음 이후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이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슬픔의 집이 있다면 아마도 오두막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오두막에서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보는 것이 참다운 인생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는 우리 모두 마음이 아이처럼 흰색(白色)으로 빛나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보통 황금(黃金)이라고 불리는 금색은 알고 보면 전혀 금색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빛깔 중에서 노란색만 반사시키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얼굴이 붉게 되거나 괴로울 때 얼굴이 검게 됩니다. 슬픔을 제대로 반사시키지 못해 아이처럼 해맑게 울고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힘들고 지칠 때 왜 내가 불행의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최악(最惡)이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최선(最善)이라고 해서 불행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중심(中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두막』의 감동처럼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오두막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맥과 같이 과거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루한 삶에 지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불행이 쌓여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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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 사전 - 사마천의 생각수첩
김원중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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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왕안석(王安石)은 학문을 권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책 때문에 부유해지고(貧者因書富), 부유한 사람은 책 때문에 귀해지고(富者因書貴), 어리석은 자는 책으로 인해 어질어지고(愚者得書賢), 어진 사람은 책으로 인해 부귀를 얻네(賢者因書利).”

이런 의미에서 사마천의『사기』는 누구나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흔히 중화사상은 5천년 역사를 자랑한다. 그중에서『사기』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한무제(漢武帝)에 이르기까지 약 3천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사기』의 방대한 역사도 그렇지만 사마천도 예사 인물이 아니다. 그는 궁형이라는 치욕을 견디며 이 책을 완성했다.

사마천의 놀라운 통찰력은 단순히 역사가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인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기』「범저 〮채택열전」에서 뜻하는 바와 같다. 즉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원중은 『통찰력 사전』에서『사기』의 진면목을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스민 지혜와 통찰이 파충류의 찬 비늘을 만진 것처럼 가슴에 섬뜩하게 와 닿는다. 아니 찌르고 후벼 판다고.” 말했다.

가령,「화식열전」을 인용하면서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이 덕을 베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1년도 못살고 죽을 것이다.

또한「급정열전」에서는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으로써 사귀는 모습을 알며, 한 번 귀했다가 한 번 천해짐으로써 사귀는 참된 정을 알게 된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결국「월왕구천세가」에 나오는 ‘다른 곳의 미세한 털은 볼 수 있어도, 자신의 눈썹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경고와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때로는 “이게 뭐야?”라고 할 정도로 싱거운 반응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정작 지혜를 구하지 못했던 게 수두룩하다. 따라서『사기』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지혜를 얻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우리도 사마천처럼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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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속의 과학 - 과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인의 의식주
이재열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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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녀하면 8등신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네 몸매는 7등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신체를 둘러싼 서양과 우리의 미의 기준은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에 있어 황금(黃金)비례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폭과 높이가 1.618:1이다. 반면에 우리 건축물에 있어 아름다운 비례를 금강(金剛)비례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용마루를 기준으로 했을 때 1.414:1이다. 

이러한 흥미로운 대조에는 아름다움이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활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움의 잣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금강비례를 촌(村)스럽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화의 편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안타까움이 절로 나온다. 서구화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이른바 맥맨션(McMansion: 획일적인 주택이라는 뜻에서 맥도날드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같은 아파트 틈에서 한옥은 숨 가쁘다. 살기에 불편하다고 해서 버림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주거에 있어 편리함만이 능사가 아니다. 맛과 멋이 있어야 한다. 이재열이 쓴『담장 속의 과학』에는 우리의 전통 의식주(衣食住)를 구수하게 담아내고 있다. 덕분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고향 살림을 차근차근 음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과거의 여행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통이라고 하면 왠지 비과학적이라고 몰아세우는 덕지덕지 묻어있는 마음의 때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말끔히 씻어 내렸다. 즉 과학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생활의 지혜라고 해야 정갈하고 단정하다.

가령, 주(住)에 있어 마을을 이루며 집들이 들어앉았다. 이럴 때 장풍득수(藏風得水)가 되는 땅이어야 했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주는 곳이다. 또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집터를 잡을 때도 좌청룡에 해당하는 흐르는 물길, 우백호에 해당하는 큰 길, 남주작에 해당하는 연못 그리고 북현무에 해당하는 구릉이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은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집이 살아 숨쉬려면 틈새 사이사이로 바람이 통해야 가능했다. 이것이 우리 집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어릴 때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 한낮에 안팎 방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원했다. 말 그대로 냉방과 통풍을 하는 교묘하고 지혜로운 구조였다. 이러한 열린 마음에는 자연주의 즉 순환의 질서를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다.

반면에 아파트는 닫힌 공간이다. 물론 아파트는 물리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아주 과학적이다. 일거수일투족이 편리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앞서 말했듯 삶의 향기가 없다. 기계의 지혜에 익숙하다 보니 어느새 생태맹이 되고 만다.

집을 장 담그기에 비유한다면 충분히 발효해야 한다. 사람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가지 미생물과 공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서로간의 아무런 도움이 없다면 집은 부패하고 만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전통 의식주의 다양한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문명사회의 질병이 날로 팽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 온고지신이 절실하다. 저자 말대로 서양의 담장 밖의 과학과 우리의 담장 속의 과학이 소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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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단련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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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간단한 놀이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두드리는 사람이 어떤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면 듣는 사람이 이 노래의 제목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50% 예상했지만 듣는 사람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을까?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문제 삼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두드리는 사람은 머릿속에 익숙한 선율이 흐르는 반면에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였다.

지식의 가치를 다루는 데 있어 엘리자베스 뉴턴 못지않게 지(智)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저작들이 국내에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쿄 한복판에 그가 세운 고양이 빌딩이 보통의 일반인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빌딩 전체가 서가(書家)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의『지식의 단련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智)의 소프트웨어’라는 원제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지식의 입력과 출력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전략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저자 말대로 이런 전략은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덕분에 우리는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입력에 있어 ‘지적 생산형’과 ‘지적 생활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가 입력이 수단이라면 후자는 입력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정보를 가진 의미를 이해하면서 입력하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보가 지식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목적선행형 독서법을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독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출력에 있어 좋은 문장을 쓰는 실용적인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면 매끄러워질 때까지 과감하게 쳐내라고 한다. 불필요한 수식어를 덜어내고 연문(連文), 복문을 단문화해서 가능한 단순하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 방법에 앞서 좋은 문장을 많이 읽으면서 좋은 문장에 대한 감각을 익히라고 당부한다. 문장의 본질적인 가치는 어떻게 쓰여져 있는가보다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라는 것의 그의 문장론이다.

이 밖에도 입력과 출력 사이에 지식을 단련하기 위한 방법들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즉 목적 없는 스크랩은 그만둬라, 방대한 분량의 잡지를 독파하라, 문체는 옷에 불과하다, 내면적 상상력을 키우라, 무의식층의 거대한 잠재력을 파악하라,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연역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 최고의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섭렵하게 된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간된 이 책이 여전히 웹 2.0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아무래도 “독서는 정신적인 식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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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0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오랜만이에요.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군요.

오우아 2009-04-11 00:38   좋아요 0 | URL
혜경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이네요..
꽃들이 예쁜 4월..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저는 책 욕심때문에 제 할일 못하고 있는... 늘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