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 - 30억 년 한반도의 자연사가 살아 숨 쉬는 우리 땅의 비밀을 찾아 떠난다! 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 1
손영운 지음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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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嶋潭三峰)에 간 일이 있었다. 단양 8경 중 제 1경으로 알려진 남한강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솟아있는 세 개의 봉우리. 옛사람들에게 그곳은 풍류의 멋진 곳이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은 “신선이 세 봉우리로 갈라놓은 돌섬”이라고 표현했다.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도담삼봉은 아름다운 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도담삼봉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즉 자연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손영운이 지은『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는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 땅의 비밀을 답사하는 내용이다. 이 책에 의하면 도담삼봉의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있다. 산의 끝자락이 물에 침식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지질학에서 이러한 지형을 ‘라피에(lapies)'라고 부른다. 즉 석회암이 노출된 지대에 물이 흘러 용식이 잘 되는 부분은 점점 사라지고 용식이 잘 안 되는 부분만 남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용이 계속되어 형성되는 크고 작은 석회암의 돌출 부분이 바로 라피에다.

지구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한반도의 지역적인 특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가령, 경기도 연천을 ‘불의 땅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말한다. 연천에는 가장 흔한 암석이 현무암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되는 용암이 식어서 된 암석이다. 특히 한탄강 주변에는 현무암뿐만 아니라 녹색을 띤 응회암이 많이 분포한다. 응회암은 화산재가 쌓여 굳어진 퇴적암이다.

다음으로 충정남도 태안을 ‘바람과 파도가 만든 땅, 황해의 실크로드’라고 말한다. 태안의 신두리 해안의 갯벌은 놀랍게도 모래펄이다. 강화나 보령의 갯벌이 진흙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태안의 해변이 경기 편마암군이 지저를 이루는 지층이기 때문이다. 경기 편마암군은 편암, 규암, 그리고 편마암 등의 암석을 말하는데 변성암을 대표하는 암석들로 결정 구조가 비교적 단단한 편에 속한다. 따라서 이런 암석들이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모래가 되어 크기가 작아졌을 뿐 다른 암석이 만든 모래펄보다 그 구조가 단단해서 그런 것이다.

반면에 파도리 해수욕장에는 ‘모오리돌’이라고 불리는 자갈 해변이 특징이다. 이는 이 지역의 지층이 서산층군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서산층군의 규암층으로 인데 규암은 굳기가 다른 암석에 비해 단단하여 쉽게 풍화작용을 받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남제주군 우도(牛島)를 답사한다. 이곳의 서빈백사(西濱白沙)때문인데 풀이하자면 ‘서쪽 물가의 하얀 모래’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산호사 해변으로 불렸는데 산호가 모래처럼 부서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홍조단괴 해빈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홍조단괴(紅藻團塊)는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바다에 서식하는 조류 중 하나인 홍조류가 탄산칼슘을 침전시켜 형성한 것이다. 원래는 짙은 갈색을 띠자만 해안에서 건조된 후 파도에 의해 침식되어 하얀 모래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자연을 흥미롭게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산이며 하나의 강에 불과했으나 저자 덕분에 우리 땅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더불어 역사 못지않게 지질학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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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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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다.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에서 펼쳐지는 불멸의 사랑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빙산과 충돌하면서 타이타닉 호는 이제까지 안전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부서지고 만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랑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는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남자 주인공의 잭의 가치 있는 죽음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더욱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타이타닉>은 빙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빙산 때문에 타이타닉 호는 침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침몰하지 않았다. 만약 빙산이 아니더라도 이것과 파괴력이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빙산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것은 폴란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유동하는 공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빙산을 공포라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빙산은 그 자체의 물리적인 힘은 고정적(solid)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빙산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불안감은 유동적(liquid)이라는 사실을 파헤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타이타닉 콤플렉스, 즉 유동적 공포다.

바우만은 공포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1차적 공포(바우만의 2차적 공포에 비유)와 2차적 공포 그리고 유동적 공포다. 1차적 공포는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공포다. 여기에는 사회질서의 지속성과 가능성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지위 및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도 포함된다. 다음으로 2차적 공포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순환하며 파생되는 공포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침전물이며 이에 반응을 보이게 되는 자가 발전하는 공포다. 끝으로 유동적 공포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공포며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포다.

이 책은 유동적 공포의 여러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죽음의 공포에 있어 한 번 걸러낸 죽음이 아니라 두 번 걸러낸 죽음이다. 자크 데리다의 표현대로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이며 회복 불가능성이다. 이때 전자는 나와 너의 세계의 종말이며 후자는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종말이다. 또한 전자가 질병이나 노쇠에 따른 자연적인 죽음이라면 후자는 살인, 범죄라는 인위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악과 공포는 말 그대로 불가분의 관계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파헤치고 있다. 우리는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과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탓에 그들을 식별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니 무감각하다고 해야 옳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되었을까?

바우만은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적당한 조건은 칸트가 말한 인간의 이성에 따른 보편적인 입법이 아니었다.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마라.” 고 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에게 살인은 자기 자신에 맞는 이중 잣대였다. 규칙에 복종한 아이히만은 근대적 관료의 완성품이자 희생자였다.

이밖에도 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에서는 이해 불능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공포에서는 부정적 세계화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공포에 있어 그는 태풍이나 테러 같은 천재든 인재든 피할 수 있는 재난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도덕적인 문제 즉 도덕 지체에 따라 무방비 상태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유동적 공포가 노골적으로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예리하면서도 낯선 유동적 공포에 전율하게 된다. 한마디로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유동적 근대는 저자 말대로 끊임없는 의심과 휴식이 없는 경계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가 빠르게 분열했다가 이루어진다. 더 이상 이성이 공포의 탈출로가 아니라 단지 우회로(detour)에 불과했다.

이러한 바우만의 따끔한 충고와 달리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치료법은 단순하다. 공포의 실체를 바로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타이타닉>에 나오는 잭의 죽음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개인적 불멸성은 삶을 치열하게 살 것을 주문한다. 따라서 공포가 출렁거리는 시대에서 그람시가 말했던 ‘역사적 행위자’로써 문명화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위기에 놓인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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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가는 길 - 일곱 살에 나를 버린 엄마의 땅, 스물일곱에 다시 품에 안다
아샤 미로 지음, 손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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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창밖보다 창가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올망졸망한 빗방울이 하나 둘 미끄러져 어느새 서로 하나의 빗줄기가 되어 내려갑니다. 그것도 살짝 사선(斜線)으로 말입니다. 왜 그들은 직선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빗방울이 힘이 약해서 그럴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내려 갈 수는 없어 그들은 사선으로 만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구름에서 하나였다가 빗방울이 되어 수천만 갈래로 흩어져 창가에 내려앉게 되는 운명. 이렇게 그들은 영영 이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선으로 만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아샤 미로의『엄마에게 가는 길』에서 우리는 아릿한 눈물과 벅찬 감동의 사선을 천천히 걸어야 했습니다. 일곱 살에 자신을 버린 엄마의 땅을 스물일곱 살에 다시 품에 안으려는 그녀였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미묘한 감정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끝내 할 수 없으리라는 초초함과 절박함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인도 빈민촌에서 태어난 아샤 미로는 일곱 살에 스페인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수녀원에서 고아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엄마아빠가 생겼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상한 양부모님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하게 된 것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만약 그때 입양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인도의 빈민촌에서 악착같이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스물일곱 살이 된 그녀는 자신이 받은 인생의 선물에 보답하고자 자신의 고향으로 첫 번째 여행을 떠납니다. 인도에서 자원 봉사를 하게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엄마, 버릴 거라면 나를 왜 낳으셨어요?”라는 서글픔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20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원망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잃어버린 7년의 조각을 하나하나 알게 됩니다. 그녀 말대로 기억 속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던 과거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앞만 보고 사는 것이 더 값진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가 갠지스의 딸이라고 해서 꼭 갠지스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소중한 것은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첫 번째 여행에서 그녀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녀에게 잃어버린 7년을 들려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들이 일인칭 시점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의 과거를 제대로 알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보다 가족이라는 일인칭 시점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야 그녀의 진짜 삶이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인도로 향하는 두 번째 여행은 바로 자신의 친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언니를 만난다는 것이 고통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세상에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희망이 있고 삶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 우샤와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엇갈린 운명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샤라는 그녀의 이름은 당시에는 우샤였는데 아버지가 이제는 볼 수 없는 딸의 인생에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언니의 이름이었던 아샤(희망을 간직한 이름)와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아샤의 놀란 감정이 어땠을까요? 이렇듯 그녀의 잃어버린 7년에는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도에 사는 아샤와 스페인에 사는 또 한 명의 아샤의 극적인 만남이 따뜻한 눈물로 눈망울을 적셨습니다. 그 눈물에는 인도의 참다한 현실과 스페인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미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비록 두 명의 아샤는 20년 동안 떨어져 살아왔지만 그녀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가난한 탓에 불완전했던 그녀들에게 이것만이 완전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 후 집안일 때문에 고향에 갔다 왔습니다. 고향에 갈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마을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집들은 쓰레기가 되어 버렸으며 논밭은 이름 모를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얼마나 더 버림받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삶은 갈수록 직선으로 달려가고 우리 또한 그것이 싫다고 하면서도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고향없이 각박하게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차츰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나 아샤 미로의 잃어버린 7년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찾지 못했던 해답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어디 출신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해답을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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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섹스 -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남녀 차이
앤 무어.데이비드 제슬 지음, 곽윤정 옮김 / 북스넛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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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아내와 쇼핑을 하게 되면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있어 신속하다. 반면에 아내는 이것저것 매장을 돌아다닌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사지 않을 물건까지 구매한다. 더구나 빨리 계산을 하고 나가고 싶은데 누구한테 전화가 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머뭇거린다.

누구나 그렇듯 남녀의 차이는 알듯 하면서도 곤란하다. 알고자 하면 괜한 오해를 받기 쉽고 모르고 있다면 남녀의 심리에 대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녀가 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앤 무어. 데이비드 제슬의『브레인 섹스』는 제목에 나와 있듯 뇌를 주제로 하고 있다. 흔히 섹스하면 남녀의 육체적인 만족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뇌가 섹스의 주체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몸의 구조에 있어 뇌의 무게가 남성이 1.4kg이며 여성이 1.2kg에 불과하지만 뇌의 역할은 특별하다.

가령, 앞서 나와 아내가 충돌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뇌의 구조에 있다. 보통 정보처리센터를 처리를 담당하는 곳이 뇌의 회백질이다. 그리고 이 정보처리센터 내에서 관계나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부분은 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남녀의 뇌 구조에 있어 남자의 회백질 양은 여자보다 6.5배 많다. 반면에 여자는 백질이 남자보다 거의 10배는 많다.

또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섬유 다발인 뇌량(corpus callosum)이 남녀의 차이를 반영한다. 즉 남자의 뇌량은 얇은 반면에 여자의 뇌량은 두껍다. 이로 인해 남자는 각각의 활동을 뇌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통제한다. 그러나 여자는 같은 활동을 양쪽의 뇌에서 통제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호르몬에 있다. 흔히 남자는 테스토스테론, 여자는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이 행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남녀의 성별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성별의 차이는 아버지의 X 염색체, 어머니의 Y 염색체에 있다.

그러나 저자는 유전자만이 아기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성을 결정하는 데 다른 요인인 호르몬이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태아의 유전자 형성과 상관없이 남성 호르몬이 자궁 속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남자가도 되고, 남성 호르몬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남녀의 뇌구조 및 호르몬의 영향으로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이 남성만큼 숫자를 잘 읽지 못하는 반면에 사람을 더 잘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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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26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남섬보다 사람을 더 잘 읽는다는 사실에 뇌가 관련되어 있군요.^^

오우아 2009-04-28 14: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 독살사건 1 - 문종에서 소현세자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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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이 말은 조선 22대 왕 정조(正朝)가 침전에 달았던 편액(扁額)이었다. 조선 왕조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왕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이름에 걸맞게 바른 정치를 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중에서도 탕평책을 빼놓을 수 없다. 자나 깨나 그 편액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하지만 정조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재위 24년 개혁 군주는 끝내 비운의 죽임을 당했다. 죽음의 원인은 종기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火氣)” 때문이었다. 생부였던 사도세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뒤주 속에 갇혀 죽었으니 그 원통함은 화병(火病)의 굴레였다.

그동안 정조의 병사(病死)는 역사적 사실로 여겨졌다. 우리의 제도권 교육은『조선왕조실록』을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강력하게 다룰 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원인의 등급화라는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원인의 등급화란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 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이라는 문제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독살의 가능성에 대해 분명하게 이렇다 저렇다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살의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이덕일의『조선 왕 독살 사건』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TV나 대중매체에서 대단한 흥밋거리로 오해받을 수 있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조선 왕들의 급서를 파헤치고 있다. 이미 대중적 역사서의 새로운 지평을 펼친 저자의 탄탄한 글쓰기는 우리들에게 진짜 역사란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하게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조선왕조실록』에 가려진 조선 왕들의 죽음의 이면이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 왕 독살설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조선 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조선 왕조는 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다스렸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들의 재위 기간이 조선 8대 예종처럼 적게는 1년 1개월이고 조선 14대 선조처럼 많게는 40년이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게임에 휘말릴 때 왕들은 의문의 죽음 즉, 급서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것이 저자에게 이 책의 결정적인 모티프였다. 저자는 급서의 현장을 꼼꼼하게 두루 살피면서 숨겨진 역사를 구원하고 있다. 그는 조선 왕 3명 중 1명이 독살되었다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성찰은 날렵하면서도 진지하다. 이 책을 읽고 독살의 가능성에 대해 비평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는 독살 프리즘을 제시하면서 이를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더불어 독살이다, 아니다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는 역사에 대한 묵직한 반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독살 프리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문종 독살설이며 다른 하나는 정조 독살설이다. 문종 독살설은 문종-단종-세조로 이어지는 골육상쟁의 왕위 쟁탈전의 희생양이었다. 반면에 영조와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의 비극을 겪은 정조는 이에 맞서 남인을 등용하면서 개혁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곧바로 정경왕후와 노론의 집권 세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남인을 철저하게 복수했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은 당파 쟁탈전의 희생양이었다.

이러한 조선 왕 독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권력의 탄생에 주목하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정치적 희생자로 구체화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선의 국왕이 일본의 천황과 중국의 황제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측면을 보여주면서 객관적으로 지배층의 비정상적인 정치 행위를 드러나게 했다.

저자는 조선 국왕들의 탄생과 몰락을 추적하면서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가 아니라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의 절대권이라는 것이 이론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에 있어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전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조건부 충성의 대상이었다. 결국 조선 왕조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신하(臣下)였다.

저자의 위와 같은 주장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탓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조선 왕 독살 사건은 근거 없는 일방적인 자기주장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그릇된 정보와 억측으로 조선 왕조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사의 문외한이 나로서도 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권력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상상이 아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일찍이 러셀이 권력이란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조선 왕 독살은 정의로운 (?) 효과를 내는 데 있어 가장 안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의구심이 갈수록 많아지자 조선 왕조에는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 좀처럼 화끈거리는 얼굴을 삭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정조 어찰(임금의 편지)가 일부 공개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번 정조 어찰의 당사자는 정조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였다. 정조가 개혁군주였다면 심환지는 정조 독살설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서로 라이벌이었던 그들이 파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조선 왕 독살 사건의 화약고였던 정조 독살설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심환지를 옹호하는 쪽은 심환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몰두했다. 반면에 정조를 옹호하는 이덕일은 그래도 뒤집을 수 없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심환지와의 각별한 관계는 통치를 위한 방편으로 봐야지, 독살설을 뒤집을 증거로 삼는 건 말도 안 된다.”라고 자신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어느 때보다 지금 역사의 뒤안길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조선 왕 독살 사건』은 좋은 길라잡이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 왕들의 치세와 과오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린 탓에 좋은 왕, 나쁜 왕이라는 잣대로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제목에 나와 있듯 저자는 조선 왕 독살 사건의 전후를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다. 왕의 자리는 바늘방석이었고 고독했다. 결과적으로 독살이라는 바이러스가 전염성이 강한 만큼 조선 왕들은 아까운 목숨을 잃어버렸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조선 왕들은 슬프다. 조선 왕들이 아무 말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었다고 해서 독살의 진실마저 무덤 속으로 파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반성하지 않는 역사에 대해 저자의 혜안은 놀라울 만큼이나 진솔하다. 물론 역사는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높이에 초점을 맞춘 저자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며 조선 왕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그의 독살 프리즘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래서 인지『전쟁에 반대하다』를 통해 미국의 양심을 호소하면서도 “나는 역사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발견하려 애씁니다.”라고 말했던 하워드 진의 목소리나『조선 왕 독살 사건』을 통해 독살의 부정적인 면을 모두 밝히면서도 “반성 없는 역사에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역사를 어디에 쓰겠는가?” 라는 이덕일의 목소리가 서로 겹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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