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다.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에서 펼쳐지는 불멸의 사랑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빙산과 충돌하면서 타이타닉 호는 이제까지 안전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부서지고 만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랑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는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남자 주인공의 잭의 가치 있는 죽음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더욱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타이타닉>은 빙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빙산 때문에 타이타닉 호는 침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침몰하지 않았다. 만약 빙산이 아니더라도 이것과 파괴력이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빙산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것은 폴란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유동하는 공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빙산을 공포라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빙산은 그 자체의 물리적인 힘은 고정적(solid)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빙산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불안감은 유동적(liquid)이라는 사실을 파헤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타이타닉 콤플렉스, 즉 유동적 공포다.

바우만은 공포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1차적 공포(바우만의 2차적 공포에 비유)와 2차적 공포 그리고 유동적 공포다. 1차적 공포는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공포다. 여기에는 사회질서의 지속성과 가능성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지위 및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도 포함된다. 다음으로 2차적 공포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순환하며 파생되는 공포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침전물이며 이에 반응을 보이게 되는 자가 발전하는 공포다. 끝으로 유동적 공포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공포며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포다.

이 책은 유동적 공포의 여러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죽음의 공포에 있어 한 번 걸러낸 죽음이 아니라 두 번 걸러낸 죽음이다. 자크 데리다의 표현대로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이며 회복 불가능성이다. 이때 전자는 나와 너의 세계의 종말이며 후자는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종말이다. 또한 전자가 질병이나 노쇠에 따른 자연적인 죽음이라면 후자는 살인, 범죄라는 인위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악과 공포는 말 그대로 불가분의 관계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파헤치고 있다. 우리는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과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탓에 그들을 식별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니 무감각하다고 해야 옳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되었을까?

바우만은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적당한 조건은 칸트가 말한 인간의 이성에 따른 보편적인 입법이 아니었다.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마라.” 고 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에게 살인은 자기 자신에 맞는 이중 잣대였다. 규칙에 복종한 아이히만은 근대적 관료의 완성품이자 희생자였다.

이밖에도 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에서는 이해 불능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공포에서는 부정적 세계화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공포에 있어 그는 태풍이나 테러 같은 천재든 인재든 피할 수 있는 재난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도덕적인 문제 즉 도덕 지체에 따라 무방비 상태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유동적 공포가 노골적으로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예리하면서도 낯선 유동적 공포에 전율하게 된다. 한마디로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유동적 근대는 저자 말대로 끊임없는 의심과 휴식이 없는 경계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가 빠르게 분열했다가 이루어진다. 더 이상 이성이 공포의 탈출로가 아니라 단지 우회로(detour)에 불과했다.

이러한 바우만의 따끔한 충고와 달리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치료법은 단순하다. 공포의 실체를 바로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타이타닉>에 나오는 잭의 죽음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개인적 불멸성은 삶을 치열하게 살 것을 주문한다. 따라서 공포가 출렁거리는 시대에서 그람시가 말했던 ‘역사적 행위자’로써 문명화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위기에 놓인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