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가로막는가
로버트 켈시 지음, 인윤희 옮김 / 넥서스BIZ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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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영화 <아폴로 13호>에서 비행 관제 본부장인 진 크라츠(Gene Kranz)가 한 말이다. 그러면 그의 말대로 실패는 선택 사항이 아닐까? 어느 누구도 실패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패의 두려움이라는 기회비용이 위험하다. 행동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우리가 발전하기 위한 잠재력을 계속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를 선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택의 결과에 대한 건전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실패가 선택 사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로버트 켈시가『무엇이 우리를 가로막는가』에서 제안하는 성공의 비결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성공 자체가 목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성공이 장밋빛이라면 실패는 잿빛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놀랍게도 실패를 간과하지 않았다. 가령, 발명왕 에디슨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저 작동하지 않는 1만가지의 방식을 발견한 것뿐이다.”라고 했다. 결국 문제는 실패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성공의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실패에 대한 해답을 찾았던 저자는 스스로를 ‘실패 전문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패 전문가는 성공의 여부를 실패 자체가 아닌 실패에 대한 반응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실패 없이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실패가 아닌 실패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가 실패를 하게 되면 두려움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것이 곧 실패의 두려움이며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가?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계속 창조해야만 하는데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무엇보다도 실패의 두려움은 성공이 낮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들어 실패를 더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저자가 주장하는 실패의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7단계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골치 아픈 문제를 파악하는 데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1단계-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라

2단계-목표를 시각화하라

3단계-이정표를 설정하라

4단계-전략과 전술을 세워라

5단계-효율적으로 실행하라

6단계-사람 대하기

7단계-당신만이 가진 재능을 찾아라

 

이 책을 통해 꿈의 실현이 실패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꿈이 우리의 방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방해물에 대한 반응이 더 큰 문제이다. 긍정적인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통제 위치는 상황에 따라 적응에 나갈 수 있으며 자기 확신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부정적인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통제 위치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만족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실패의 두려움이라는 중요성을 잊고 산다. 이제 우리도 자신만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저자의 조언대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성공이 ‘모’ 아니면 ‘도’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만큼 설득력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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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비용 제로 사회 - 사물인터넷과 공유경제의 부상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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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제러미 리프킨의한계비용 제로사회는 자본주의 가 몰락한 이후의 사회를 흥미롭게 파헤치고 있다. 자본주의가 몰락한 원인을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정말로 자본주의의 운용 논리는 성공에 의해 실패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가령, 기업들은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한계비용을 떨어뜨려야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한계비용 제로수준이 된다. 결과적으로 상품 가격이 공짜여서 기업의 이윤은 고갈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이후의 사회를 전망하는 것은 불투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폭넓게 살피면서 공유를 재발견하고는 협력적 공유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공유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을 떼어놓기란 어렵다. 1968년 미국의 하딘 교수의공유지의 비극에 따르면 100마리의 양을 키울 수 있는 공유지에서 사람들이 서로 소득을 높이기 위해 양을 한 마리씩 늘려가다 보면 개인의 소득은 잠시나마 올라가겠지만 결국 목초지에는 양들이 먹을 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 이 정도라고 하면 공유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공유의 개념에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즈의 공유지의 비극, 오스트롬의공유의 비극을 넘어 등등 이들의 근본원리는 공유를 긍정한다. , 시장에서 모든 공유물은 파멸한다거나 개인은 사리사욕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반박한다.

 

1, 2차 산업혁명 및 3차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변화를 보면 생산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1, 2차 산업혁명에서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의 에너지체계 아래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형이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은 사물인터넷과 스마트한 공공 인프라가 주도하면서 네트워크를 통해 수평적이며 분산형이다. 기존의 제조방식과 다른 사물인터넷이란 우리 주위의 여러 물건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지능형 인프라를 말한다. 가령, 정보화제조(infofacture)라 불리는 3D프린팅이 상용화되면서 누구나 제조인프라가 되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대중시대가 됐다. 기업이 독점적으로 생산하던 대량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저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은 새로운 에너지체계와 그것을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의 융합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가령, 1차 산업혁명의 증기동력에는 인쇄와 전신의 매체와, 2차 산업혁명의 석유와 자동차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매체와 융합되었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의 네트워크화 공유사회에서는 인터넷이다. 1, 2차 산업혁명의 케뮤니케이션 영역이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이라고 인터넷은 수평적이며 개방형이다. 결과적으로 매개체의 문화 영역이 소유권에서 접근권으로 전환했다. 예전에는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차량 공유 네트워크로 인해 비효율적인 고정 자산으로 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세계화시대를 살았다. 국가 경계를 넘어 하나의 단일화된 공간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세계화는 정부의 규제 완화라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공공 재화와 서비스를 민영화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세계화라는 상호 연결성 대신에 엔트로피 청구서(entropic bill)’를 감당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에너지 총량에 있어 상실된 에너지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상실된 에너지는 더 이상 l이용할 수 없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발생한 에너지가 지구 생물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엔트로피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 제시하는 협력적 공유사회는 자본주의의 이후의 새로운 대안이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의 시작은 인클로저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 경작지가 울타리를 두르고 양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면서 시장경제와 재산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자본의 심각한 부작용은 엔트로피 청구서의 만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과적으로 협력적 공유사회는 소유의 종말,노동의 종말의 연장선으로 자본의 종말이다. 하지만 자본의 종말이라고 해서 자본주의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장은 ‘13세기의 산업혁명때문이다. 18세기 1차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력 방아다. 봉건경제의 손 방아에서 산업시대의 증기 방아라는 구별 때문에 실질적으로 중세 경제의 수력 방아의 중요성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력 방아 한 개로 10~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동력 용량의 획기적 증가에 기여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평민의 방아로 불렸던 풍력에너지도 화약, 나침반, 인쇄기라는 3대 발명품만큼이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자가 이점을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연성 원시 산업적 시장경제과 사물인터넷과 함께 자본을 대신하여 문명을 위한 협력적이고 재생적인 경제적 어젠다(agenda)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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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4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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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창세기6장에는 노아의 홍수가 나온다. 150일 동안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악()해지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여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사람을 심판하는 데 있어 더 이상 물이라는 비유(比喩)는 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메슈 화이트가 말한대로 헤모클리즘(Hemocly)’, 즉 피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종교, 이데올로기 적인 갈등이 잔인하게 피의 보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실이 폭력으로 인해 참혹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핑거는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우리의 비관론을 뒤집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방대한 통계적인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폭력의 논리는 문제될 게 없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에 따라 우리 또한 반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생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략적으로 진화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가지 서사를 만들어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폭력의 방향의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다 옳다는 식으로 자기들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는 같다. 이것이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는 것이다.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이 좀 더 확대된 현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본성이 순수한 악의 신화(myth of pure evil)’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덕화 간극에서 빚어지는 폭력의 행위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은 도덕주의자의 관점이다. 즉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에게는 정당하고 합리적 반응이다. 이러한 순수한 악의 신화 탓에 악은 종교에서는 악마, 일상에서는 살인범, 납치범, 강간범, 마약범으로 구체화 된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악의 신화에서 비롯된 폭력은 동물적 충동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적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표현을 빌리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폭력을 역사적, 문화적으로 통계로 분석하면서 그래프로 나타내고 있다. 지난 세기의 폭력이 현재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폭력의 그래프를 보면서 놀랍게도 폭력의 비율이 하향 곡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6가지 경향성을 주목하게 된다. ,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넘어온 평화화 과정, 사회 규범의 발달에 따른 문명화 과정, 계몽주의가 이끈 인도주의 혁명, 국가 간 교역과 민주화를 통해 전쟁이 감소한 긴 평화, 집단 살해나 테러와 같은 소규모 충돌도 꾸준히 감소한 새로운 평화,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같은 권리 혁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폭력 대 비폭력을 다루는 심리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우리 본성은 악마이거나 선한 천사이다. 폭력의 구조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포식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한다. 이러한 폭력에는 5가지 경향이 있는데 포식적 폭력, 우세 경쟁, 복수심, 가학성, 이데올로기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선한 천사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 비례(proportionality) 감각으로 도덕적 균형이 요구된다. 선한 천사라고 해도 비례 감각이 불균형을 이루다면 오히려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자기 통제를 벗어나면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가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자기 통제를 벗어난 말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아한 미개인과는 달리 20세기는 대량살육의 시대로 알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도 폭력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폭력이 감소했다는 것을 감정 이입하고 있다. 감정 이입은 전염성이 강한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우리 본성에 깃든 선한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게 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이제 노아의 홍수라는 낭만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이성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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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인문학자 8인의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명강의
강신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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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어떤 순간 숨이 멈춰 버릴 때가 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人災)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의 통증은 심하다. 슬픔으로 치유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현실을 벗어나 환상을 보게 된다. 적어도 환상에서는 인재는 일어나지 않겠지, 절망보다는 희망적으로 숨 쉴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다. 한편 현재에서는 인문(人文)이라는 시대정신을 찾아 나서고 있다. 흔히 인문이라고 하면 문(), (), ()을 말한다. 물리학이나 생태학이 사실적 차원을 다룬다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실적 이해와 진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쉽게 인문(人文)을 풀이하면 인간()이 만든 무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8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성난 얼굴이 뭔가 돌직구를 던져 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인문학자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이란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불만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최후의 인간에게는 모든 게 적당하면 그만이지 싶다. 하지만 인문학자는 성난 얼굴의 인간에 가깝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분노한다. ‘말할 수 없다(unsayablue)’라고 침묵하지도 않는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성난 얼굴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너무 빨리 이해를 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진실을 숨기기 위한 성급한 주장이 아닐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정여울이 말한 대로 성난 얼굴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한 자들의 폭력에 맞서 사악하게 맞서는 것은 사악한 얼굴이지 결코 성난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에 맞서 악으로 되갚는 것은 사악한 얼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에 맞서는 선의와 용기와 실천이다. 이쯤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원이나 해경은 세월호 참사라는 악에 맞서 선의와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이유인즉 그들은 에픽테토스가엥케이리디온에서 말한 외모, 평판, 재산 같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골몰했다. 그 때 그들이 지혜, 용기, 우정, 신념이라는 나에게 달린 것을 실천했다고 한다면 오디세우스가 되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한 영웅이다. 그렇다고 이현우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분신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욕구와 달리 끝이 없다. 결과적으로 무한한 욕망은 불안하다. 오늘날에도 오디세우스가 매력적인 인간으로 불리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오디세우스는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했다. 놀랍게도 운명에 대한 고미숙의 접근은 신체적이다. 고미숙은 운명이란 신체에 새겨진 욕망의 지도라고 했다. 욕망의 계보학에 있어 신체와 존재의 간격을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체에 무지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앞서 말했듯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이 대단했던 만큼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들에 대하여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들은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다운 감정보다는 허망함이 다시금 몰려와 우리를 산산조각 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강준만이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그 말이 너무도 생생했다.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가 일으키는 증오의 소용돌이가 이 세상을 얼마나 각박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초강력 일극주의, 승자독식, 속도주의, 연고주의, 미디어 당파주의라는 병폐는 우리 사회를 시스템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일상이 사각(死角)이다. ()진 세상에서는 절망(切望)뿐이다. 희망()을 끊어()버린다. 절망은 지옥이라는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고통이다.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렇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사각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있다. 처음에는 사각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위험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이 절망감으로 역류하여 결과적으로 프로이트가 문명속의 불안에서 표현한 대로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럴 때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난 얼굴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성난 얼굴은 너무나 정직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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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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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Murphy’ law)이 있다. 1949년 항공 엔지니어 에드워드 머피가 충격완화장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항상 잘못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마다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잘못 일어날 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나쁜 상황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1퍼센트라고 하더라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는 것을 머피의 법칙에 따라 재수가 없다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덕일의 『고금통의』를 읽었다.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춘 역사학자(오마이뉴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해럴드경제)’는 추천사에 걸맞았다. 저자는 1000여개의 광범위한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읽으면서 불멸의 지혜를 생각한다. 또한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책임감 있게 사회비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이 말해주듯 ‘고금통의’를 하게 된다. 고금통의(古今通義)는 『사기(史記)』「삼왕세가(三王世家)」에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義)는 같다’는 의미다.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눈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서로 간의 이권(利權)으로 설전(舌戰)을 펼치고 있다. 이익(利益)에 눈 먼 사람들에게서 도덕심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할 짓이 못될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이다. 소통을 해야 하는 관계에서 도덕심을 배제하고 그 빈자리를 이익으로 채우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利)가 편법이라고 한다면 의(義)는 원칙을 뜻한다. 『고금통의』를 통해 견리사의(見利思義)를 궁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먼저 편견이 확고한 역사 인식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 즉, ‘석기 시대 문명은 국가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다. 석기 시대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고정 관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을 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은 석기 시대에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세계사의 상식이 우리나라에서만 통하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거대한 역사적 오산이지만 ‘청동기 시대=국가 성립’이 역사적인 공식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일제 식민 사학의 고정된 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관피아에 대한 충고도 빼놓을 수 없다. 관피아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와 마피아가 결합한 관피아는 청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기의『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와 있듯 ‘낮도적(晝賊)’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관피아는 우리 사회에서 업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검버섯처럼 퍼져있다. 정약용은『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지금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데 무릇 도둑질로 얻은 만금(萬金)은 정당하게 얻은 일글(一金)을 당할 수 없다’고 했다. 관피아를 볼 때마다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리고 공직자 후보들의 인사청문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일찍이 공자도 ‘그 사람이 있을 때 정치가 일어서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주저않게 된다’고 말했다. 최한기도『인정(人政)』에서 ‘만 마디 말로써 백성에게 선(善)을 권하는 것은 한 사람의 현인(賢人)을 천거해 선을 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직자 후보들은 하나같이 ‘신상털기식’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고 말았다. 자격 검증에서 신상털기도 통과하지도 못한다고 딴죽을 걸겠지만 인품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그래야 민심(民心)을 얻을 수 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전철(前轍)이라고 했다. 때로는 수레바퀴가 엎어진다고 해서 복거(覆車)라고 했으며 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복거지계(覆車之戒)’라고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언젠가는 금(今)의 사(事)를 고(古)에 비춰서 의(義)를 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을 산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만든 역사적 구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머피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재수가 있고 없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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