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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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래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최근에 가진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정민의『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공허한 진리를 반복하지 않았다. 18세기 한(朝鮮) 지식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몇몇을 아는 정도라고 답할 수 있다. 화이(華夷)의 명분론에 맞서 북학은 실학(實學)이었다. 하지만 18세기 한중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상당히 멀어져 허학(虛學)에 가까워진다. 18세기 중(靑代) 지식인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필담(筆談)과 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드넓은 세계를 담론이 아닌 팩트(fact)로 다양하게 쏟아내면서 접근하고 있다. 이유인즉 팩트의 학문은 어느 순간 비월(飛越)하기 때문이다.

 

 

문예공화국(Republic Letters)의 운명! 저자가 보여주는 이러한 학문적 결실은 몸으로 쓴 결과다.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는가’에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문예공화국이란 ‘라틴어를 공통 문어로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문학자들이 편지와 책으로 소통하던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 속의 공화국’(p5)이다. 저자는 한문을 공통 문어로 쓰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 1년간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저자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구장(舊藏) 도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이 송명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는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이라는 학문적 엄정함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책을 통해 후지쓰카의 학문적 자존감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쓰기보다는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빨간 펜 선생으로 불렸던 그의 메모벽은 미련할 정도여서 일종의 책속의 지휘관이라는 범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잘 정리된 그의 방대한 소장서를 빌려보는 것이 감동스럽다는 저자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독서망양(讀書亡羊)을 깨닫는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이 책을 좀 더 읽으면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내는 그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알았을 때, 화려한 학문의 꽃을 빨리 피우기보다는 지루한 학문의 뿌리를 오래 다지려고 했을 때, 그의 붓끝은 특별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후지쓰카를 말하면서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저자에게 그는 언제나 현재이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적 인연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이 필담과 편지를 통해 서로 간의 그리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들의 사귐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천애지기(天涯知己)였다. 지기는 ‘비아관아(非我觀我)’였다. 즉 나를 넘어서 안목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지(知)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문벌(文伐)공화국이라는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북학(北學)이 아니라 북벌(北伐)로 첨예하게 대립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소통망 즉 문예공화국을 복원하면서 ‘문화는 선(線)’이라고 표현한다. 저자의 문화관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하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문화가 선이라고 하면 방향성을 있을 것인데 단선적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문화는 소통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는 모든 방향에서 선이 교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19세기 문예공화국이 어떤 리듬인지 더욱 기다려진다. 그 기다림 동안에 이 책을 몇 백 년 소장하기 위해서 책 속에다 은행잎을 넣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충분히 사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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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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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관문(關門)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인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문(門)을 통과해야만(關) 한다. 가령,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지, 마는지 절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만약에 손을 놓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음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안간힘으로 절벽에 매달려 있으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관문을 통과하게 되면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관문은 우리가 ‘큰 일’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뜬금없이 들리게 될 지도 모른다. 즉,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 스님은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 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무문관. 글자 그대로 ‘문이 없는 관문’이다. 관문이 미로(迷路)하고 한다면 문이 없으니 관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문을 찾을 까닭이 없으니 쉽게 통과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이 없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용이한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문이 있는 게 쉽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의 상식으로 한 번 무문관에 다가섰다가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될 것이다. 무무관을 우리의 상식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유인즉, 무문관은 거대한 화두(話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스님들이다. 즉, 화두는 스님들이 부처가 되기 위한 불교적 관문이다.

 

강신주는『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 통찰력이 돋보이는 질문을 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 강단이 아닌 거리에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철학적 지식인이다. 이 책은 저자가 『무문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엮은 것이다. 아마도 저자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무문관』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한 평생을 업(業)으로 살았을 것이다.『무문관』은 1228년 무문 스님이 가장 압축적인 화두를 48개 선별해서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무문관』이라는 화두집을 풀어 쓰며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 이 책 또한 『무문관』처럼 성불(成佛)하기 가르침일까?

 

흔히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주 스님은 ‘개(犬)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당혹스러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개가 중생이라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나 개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당혹감이 일체 사라지고 만다. 업식성은 일종의 ‘알라야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식성이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업식성은 불성과 반대가 된다. 우리가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업식성을 고민해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부처가 되었다고 관문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이제야말로 무문관을 통과해야 한다. 즉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라는 임제 스님의 사자후를 통과해야 한다. 임제 스님의 화두는 자기가 부처(싯다르타)가 되었다고 한다면 싯다르타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싯다르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즉, 단독자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단독자를 남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나만의 마음, 단독적인 마음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풀어 쓴 이 책의 48개 화두는 과거를 지향하지 않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문 스님이 말한 ‘무(無)’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무문 스님이 말한 무는 부정을 위한 부정도 부정을 위한 긍정도 아니었다. 무는 곧 긍정을 위한 부정이었다. 이로 인해 무라는 말이 얼마나 거대한 화두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상식파괴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라 사자의 위엄과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아울러 가진 단독자를 비로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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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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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이 발생하는 것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능력마저 비민주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험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험에 따른 사고를 어느 개인만의 불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정부가 비민주적인방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부의 주인(主人)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순진하거나 바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오구마 에이지의『사회를 바꾸려면』을 읽었다. 저자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라!고 소리 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한다. 행동하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데모 혹은 시위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생존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人災)가 날 때마다 정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완고한 주장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입 다물고 있기가 어렵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내면서 묵묵히 참고 사는 데도 인내심이 바닥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는 목적은 간단하다.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대로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간과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뽑았으나 우리의 희망이란 그 한 순간에 불과해졌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투표가 끝나고 나면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데모를 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데모의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다보니 대중의 참여마저도 회의적이다. 투표도 안 되고 데모도 안 되었을 때 제3의 선택, 즉 무관심하면 그만이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동하라!를 실천전략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말한 행동은 투표보다는 데모인데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를 풀이하면 ‘피플즈 파워’(people' power)이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하고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내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사회현실에서는 데모의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반증이다. 대중의 참여 없이는 사회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데모의 성격이 ‘관계론’이 아닌 ‘개체론’이라고 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개체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계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서로가 만들고 만들어진다. 즉,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와 관료는 악마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데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상대방을 이해하며 대화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데모라는 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더욱 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기며 활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넘어선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부를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데모를 벌이는 것은 생생하지도 않고 호소력도 없는 불행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 또한 어느 순간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참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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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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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껏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해온 까닭은

인간의 행동을 비웃기 위해서도,

그것에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도,

그것을 미워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뿐.

스피노자 <정치학 논고>

 

우리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냈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사이좋게라는 의미에는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마음이 스며들어 있다. 만약에 도덕적인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구토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마음이 있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구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최고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바른 마음』에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바른 마음(Righteous Mind)’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른 마음이란 우리는 본성적으로 도덕적이지만 도덕적인 체하고 비판과 판단도 잘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을 보면 어떤가? 크고 작은 도덕적인 잘잘못을 따지며 충돌한다. 가령, 도덕적인 딜레마 중에서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의 딜레마’가 있다. 이 딜레마에 따르면 트롤리 한 대가 선로를 빠른 속도로 내려갈 때 선로 위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이 때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 다섯 명의 인부를 살리기 위해 선로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쪽 선로 위에는 한 사람이 서 있다. 둘, 어떤 한 사람을 선로 위로 넘어뜨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섯 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명이 희생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데 앞서 도덕적인 판단이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칸트의 의무론에 따르면 추론의 과정을 통해 도덕적인 판단하게 되고 직감이 추론을 정당화하는 사후 합리화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흄은 ‘이성을 열정의 노예’라고 말했다.

 

그런데 도덕적인 판단을 어떻게 하는지 유명한 뇌 연구 결과를 보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도덕적인 판단에 있어 감정을 처리하는 영역이 훨씬 더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도덕은 너무나 감성적이다. 도덕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마치 코끼리(직관) 등에 올라탄 기수(추론) 같다고 할까?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직감하고 난 후 그 느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바른 마음을 증폭시키는 도덕 심리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 둘,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셋, 도덕은 사람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사고는 결코 과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유권자의 표를 잡으려는 정치인이다. 선거철마다 우리는 서민층들이 좌파(진보)가 아닌 우파(보수)를 지지하는 현상을 접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묘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몸소 느끼게 된다. 이유인즉 바른 마음은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지닌 혀와 같다는 것이다. 도덕성 기반 이론의 내용에는 최소한 6가지가 있다. 배려/피해 기반, 자유/압제 기반, 공평성/부정 기반, 충성심/배신 기반, 권위/전복 기반, 고귀함/추함 기반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배려/ 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등 3가지 기반을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나머지 6가지 기반을 모두 활용한다. 사실상 유권자들은 도덕적 이해에 따라 투표한다. 따라서 피해자들을 돌보는 차원에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만 매달려서는 유권자의 표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앞서 말했듯 편협한 도덕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구토감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에게는 양보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이기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기심을 초월하여 초사회적인 이익 즉, 나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진정으로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조건에 따라 군집 생물이 되기도 한다고 하면서 ‘군집 스위치(hive switch)’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90%는 침팬지이고 나머지 10%는 벌과 같다’는 것이다. 같은 관점으로 뒤르켐은 개인이 전체의 행동에 따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집단적 들썩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적응하면서 선택한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단성이라는 것 때문에 이념과 종교 갈등으로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바른 마음』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이해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좀 더 다른 시각으로 탐구하고 있다. 바로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이중적인 인간)이다. 호모 듀플렉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개인적인 이기심과 사회적인 이타심이 교차한다. 자신만 옳고 상대방은 틀리는 것을 정당화하며 집단적으로 이쪽은 좋고 저쪽은 나쁘다는 식의 편 가르기를 한다. 하지만 저자의 새로운 주장을 보면 우리가 이편저편으로 나뉘는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의 마음이 집단적으로 바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건설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직감을 이해하고 나서 여섯 가지 도덕 기반의 적절한 전략이 필요하다. 바른 마음은 옳음 vs 그름이 아니라 옳음 vs 옮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좋은 느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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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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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게 착각일까? 인생은 공부의 연속이다. 공부를 즐겁게 하면 모를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출세를 하고자 한다면 공부를 지겹도록 해야 한다. 공부가 성공의 척도이다 보니 남들과 경쟁 해야만 한다. 경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경쟁이라는 공회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쟁을 통과한 사람들이 천재(天才)가 되다보니 우리는 천재에게는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기를 기대한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숨겨진 욕망이며 불가피한 변명이지 싶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공부를 하면서도 무기력에 빠져든다.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의 정체성은 흐릿해지고 대신에 ‘천재’라는 것이 절망적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공부’가 중요하다고 누누이 역설해왔다. 그럼에도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은 천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른다. 누군가가 정의감을 못 이겨 한국 교육의 허상을 폭로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게 사실이었다. 한 순간 시한폭탄이 터져 놀라면 그만이다. 괴짜 물리학자(김대식)과 삐딱한 법학자(김두식) 형제의『공부 논쟁』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었다. 천재에 집착하는 오직 일등주의에 쏠리는 현실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기는커녕 역행하고 있어 우리의 미래가 서글퍼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를 줄기차게 염려하는 이 두 학자의 창의성을 보면서 불안한 희망이라는 뇌관을 제거 할 수 있었다. 창의성이란 김두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다.

 

『공부 논쟁』에 있어 가장 민감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한다고 하면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형제들이 이것을 반대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한국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형제는 ‘한국에서 박사를 딴 사람’에게 더 의미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 박사를 딸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한국 사회가 그만큼 기초 과학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타게 된 것도 기초 과학의 인프라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기에 가능했다. 아인슈타인은 굳이 노벨상을 타지 않아도 큰 실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노벨상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를 앞세우면서 말이다.

 

오직 한명, 즉 천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의심하기란 어렵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천재에 대한 환상이 만연하여 불평등한 대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들이『공부 논쟁』에서 천재의 허구론을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15세에 인생이 결정되어 일찌감치 번아웃(burn out)되는 학생들이 그렇고, 해외 명문대 교수의 연구를 따라하면서 하버드대 한국 분교가 되어 버린 교수들이 그렇고, 이 모두가 한국식 공부가 목표로 하는 ‘장원급제 DNA’을 주입한 결과다. 장원급제 DNA에서 중요한 것은 학문적 성과보다는 입신양명이다. 비록 입신양명 때문에 한국 사회가 괄목한 만한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고 하더라도 돈벌이와 출세의 수단이라는 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우리의 교육이 ‘장인(丈人) DNA’으로 개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장인 DNA은 호기심을 가지고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인 DNA은 창의성이 있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 논쟁』을 읽고 나면 과학자를 중소기업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삐딱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경쾌하다고 할 수 있다. 형제는 한국 공부의 풍토에서 장원급제 DNA은 천재인 동시에 바보가 된다고 역설한다. 천재라는 타이틀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며 이러한 감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천재는 무죄라는 담보를 제공받는다. 그러니 자신이 사는 세계의 고통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바보가 쉽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갑자기 돌출한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문제는 진짜 공부를 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면서도 진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장원급제 DNA가 아닌 장원DNA으로 진짜 공부를 하는 거대한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을 날리는『공부 논쟁』은 굳이 읽지 않아도 왠지 책을 읽은 것 같은 ‘책에 대한 책’이 아니다. 진짜 공부는 장인 DNA라는 것. 더 이상 공부 논쟁을 하지 않기를 기대해 볼만한 가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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