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영향력 -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어떻게 나에게 스며드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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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보톡스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보톡스는 얼굴에 잔주름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얼굴에 표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은 잔주름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잔주름을 의학적으로 동적 주름(dynamic wrinkles)이라고 한다. 보톡스의 효과는 동적 주름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그 근육을 펴지게 하면서 주름살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보톡스가 피부 미용에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는 만큼이나 독소를 품고 있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이클 본드의『타인의 영향력』을 읽고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인간관계에 있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게 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감정에 동조하면서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얼굴에 전혀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상대방과 어떤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사람의 감정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방하게 한다. 또한 감정은 전염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가장 솔직한 감정일수록 감정 전염도 높다. 사회적인 관계의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보톡스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못지않게 호감을 덜 살 것이다.

 

우리가 감정 전염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만큼 타인의 영향력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좀 더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친구가 많으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여부에 딸려있다. 결론적으로 행복한 친구들과 관계할수록 행복하다는 얘기다. 이러한 감정 전염이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때 군중심리가 된다. 군중은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몰개성화이론에 따라 개인은 군중 속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난 같은 비상상태에서 군중은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럴 때 군중은 ‘제4의 구조요원’이 된다. 충분히 ‘군중 속의 온기’를 느낄 만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회심리학의 성과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담아낸 다양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카멜레온 효과, 감정 전염, 군중심리, 넛지 전략, 방관자 효과, 루시퍼 이펙트, 그리고 고독의 사회학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비밀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기존의 주장을 반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주장도 함께 펼치고 있다. 말콤 글래드웰에 비견되는 저자의 통찰은 타인의 영향력이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색하며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심리학이 없다면 우리가 진실로 서로를 이해하기기를 바랄 수 없다는 관계의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방관자 효과에 맞서는 방법은 이렇다. 방관자 효과란 출근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관자 효과에 대응하는 방법은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제안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즉, “낯선 사람을 고통받는 동료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 순간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웅이라고 하면 헤라클레스를 떠올린다. 헤라클레스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 영웅은 2%에 불과하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영웅이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듯 인간은 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다양한 이웃이나 친구 맺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관계가 친밀하지 않다면 이웃 혹은 친구수가 많아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대로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말하니까. 그래서 고독의 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독은 사회적인 고립에 따른 소외감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은 혼자 있는 기쁨을 뜻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야 할 때 고독은 우리 몸 속에 친구를 만들 방법을 생각하게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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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
대니얼 데닛 지음, 노승영 옮김, 장대익 해설 / 동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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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와 대장장이의 차이점은 뭘까? 둘 다 도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목수가 자기가 쓸 톱과 망치를 만들지 않지만 대장장이는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자기가 쓸 톱과 망치를 만든다.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생각 도구를 만들어 내는 대장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최고의 지식인은 최고의 생각도구를 만든다.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를 주목한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마빈 민스키 교수에 따르면 데닛은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지적 대결을 펼칠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대익 교수는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 책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생각은 제목에 나와 있듯 ‘직관펌프’다. 저자에 따르면 직관펌프(intuition pump)란 직관을 불러일으키는 명제를 논파하며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진심으로 무릎을 치게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이라고 거듭 말한다. 하지만 직관펌프는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이라는 명제는 매우 ‘심오로워’라고 할 수 있다. 뻔한 거짓임에도 만일 사실이라면 놀랄 만하다. 한편으로는 참이라고 하면 별것 아닌 말이 되고 마는 것. 이렇게 직관펌프가 심오로워 되는 까닭은 바로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메타 수법 때문이다. 메타 수법이란 ‘생각에 대한 생각, 말에 대한 말, 추론에 대한 추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에 대한 생각만 한다고 해서 직관을 펌프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복잡해야 한다. 이유인즉 철학에서 말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 물리적 태도다. 손에서 돌멩이를 놓으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둘, 설계적 태도다. 자명종이 설계된 대로 울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은 지향성 태도다. 어떤 대상의 행동을 해석할 때 그 대상이 스스로의 믿음과 욕구를 고려하여 선택과 행위를 제어하는 ‘합리적 행위자’인 것처럼 대하는 전략이다. 가령, 체스를 두는 컴퓨터를 생각하면 된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는 합리적으로 최선의 수를 찾는다. 그래서 컴퓨터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합리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 책에는 77가지 생각도구가 있다. 12개의 일반적 생각도구에서부터 컴퓨터, 의미, 진화, 자유의지 그리고 철학자가 된다는 생각도구까지 다루고 있다. 77가지 생각도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관심이 없었거나, 관심이 있었는데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어떤 참신한 생각도구를 발견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실수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는 데 따라 달라진다. 만일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기존의 시스템이 해석해준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데닛처럼 생각해보기는 우리를 ‘ㅅㅂㄸ(jootsing)’, 즉 시스템 밖으로 뛰쳐나오게 한다. 이것이 저자가 바라는 모든 이의 길을 밝혀줄 ‘좋은 실수’라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실수를 다윈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은 모든 전통적 관념을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관념이되었다. 다윈의 개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만능산(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진화를 이끄는 자연선택에 대한 독창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자연선택은 자동으로 이유를 찾는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유를 ‘발견’하고 ‘승인’하고 ‘집중’시킨다. 따옴표에서 보듯 자연선택에는 마음이 없으며 그 자체로는 이유도 없지만, 설계를 다듬는 이 ‘작업’을 수행할 능력은 있다. 이것 자체가 이해 없는 능력의 예다(p290).

 

이 책을 통해 직관펌프가 자연선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해 없는 능력이다. 77가지 생각도구들 하나하나에는 분명한 설계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설계된 목적을 알 필요는 없다. 이해 없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 없는 능력만큼 77가지 생각도구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효율적이며 뛰어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실수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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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옆 철학카페 - 세네카부터 알랭 드 보통까지, 삶을 바꾸는 철학의 지혜
안광복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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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면 먼저 떠오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는 한 둘이 아니다. 취업, 결혼, 사랑, 죽음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다룰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토록 고민하는 순간순간이 곧 철학적인 순간이지 싶다. 그럼에도 철학하면 어려운 탓에 꼭 읽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고스란히 남는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 등 이름 있는 철학자들을 ‘과시적 소비’할 뿐 정작 그들 앞에서 우리는 대개 무기력하다. 이러한 문제는 굳이 철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철학만큼 삶을 단단하게 하는 것은 없지 않을까?

 

안광복의『도서관 옆 철학카페』는 철학이라는 단단한 독서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길잡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상철학자라고 불리는 저자는 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해독하며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모든 이해는 오해다.”라는 니체의 말을 무기 삼아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한 오해는 책의 내용을 100% 공감해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거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이러한 긍정적인 오해가 없다고 한다면 오늘날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쉽게 공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공이나 행복의 뒷면에는 무수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생의 쓴맛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와 있듯 실패를 기회로 바꾸는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이진경이『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말한 ‘사건’과 ‘사고’를 주목하면서 실패도 삶의 일부이며 위대한 자산이라는 것을 들려주고 있다. 즉,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그럼, 이진경이 말한 사건과 사고의 차이가 뭘까? 둘 다 뜻밖의 시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사건은 실패의 한계를 넘어 인생의 목표를 깨달으며 성장하게 한다. 반면에 사고는 실패에 타협할 뿐 어떠한 도전도 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진경은 “두 번 긍정한 사람은 불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인생은 목표의 연속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 지도 커다란 질문이다. 러셀에 따르면 생업 혹은 소명의 문제를 ‘소유의 욕구’와 ‘성장의 욕구’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소유의 욕구가 일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면 성장의 욕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경쟁자와 우정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즉, 경쟁자를 노예로 만든다면 자신의 가치는 보잘 것이 없다. 반대로 경쟁자를 주인으로 존경한다면 자신의 가치는 높은 인정을 받게 된다. 이밖에도 나이 먹기가 두렵지 않으려면 마르크 폴리가 말한 “매 시간이 마지막 시간일 수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 시간만큼 아름다울 것이다.”는 삶의 밀도를 높게 한다.

 

『도서관 옆 철학카페』를 읽으면서 ‘도서관 옆’을 생각해봤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는 도서관은 고독하다. 어느 누구는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한가롭게 도서관에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불평하겠지만 도서관은 짜증내지 않고 고독을 이겨내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서관은 ‘고독을 이기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도서관의 가치를 너무도 모른다. 우리가 도서관을 짓고 있음에도 정작 도서관은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도서관이 공부방보다는 철학카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주말마다 독서와 사색을 위해 도서관에 간다는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를 몸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0.1% 가능성이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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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빅퀘스천 -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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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과학은 얼마나 의미 있을까? 사이언스 이즈 컬처(Science is Culture)라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오늘날의 키워드는 과학은 문화이다. 지난 10년간 과학은 정치, 경제, 예술, 지성의 지표를 바꾸어 놓았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인류의 가치 체계, 그러니까 지구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현대화하고 있다. 신념, 민주주의, 자유 시장 같은 개념들도 물론 세상을 바꿔 놓은 힘이다. 그러나 과학은 가장 보편적이고 압도적인 변화의 매개체다. 오늘날 과학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아주 기초적인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정식을 풀다보면 ‘1+1=2’라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 지식을 알게 된다. 과학의 역사란 체계적으로 과학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고민해야할 문제는 과학 지식의 우열도 아니며 과학 지식이라는 그 자체 개념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인지 탐구하는 사고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존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KAIST 뇌과학자 김대식이 이야기하는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우리에게 31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등등. 그런데 통찰력 있는 질문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그의 1.4 킬로그램의 뇌는 과학뿐만 아니라 신화, 철학, 문학, 영화 등을 넘나든다.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질문에서 즉, 삶의 의미이며 정의 등에 관한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지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

 

가령,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먼저 흄과 칸트가 지적한대로 논리적으로 필요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질문이 18세기부터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라고 바뀌는데 그 답은 아주 단순할 정도다. ,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생물학적 사랑,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세포가 결합하는 유성생식이다. 반면에 사회학적 사랑은 지속적인 번식에 대한 욕망이며 철학적인 사랑을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것으로 확장한다.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질문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답이 고리타분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의미라는 것이 용도라고 했을 때 주어진 용도에 맞게 인문학적 사유를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영원한가에서 보듯 다음과 같이 감각적 있는 자기성찰을 펼치게 된다.

 

민주주의는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아니다. 민주주의 자전거이며 비행기이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추락하는, 직접민주제.대의원제.대통령제 모두 언제든 과두정치와 독재, 무질서와 카오스로 변질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불완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엄청난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폭 넓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사고 능력이다.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만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를 보면서 우리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블랙홀, 웜홀을 생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시간은 왜 흐르는가에 관한 맥락적 지식, 융합적 지식을 얻게 된다. 그만큼 과학은 문화라는 것이며김대식의 빅퀘스천을 읽으며 또 다른 우주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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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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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는 왜 보는 것만으로 안 되는 걸까요? 언제나 뭔가를 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진심이 3차원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는 1차원입니다. 그러니까 1차원에서 3차원을 보기 위해서는 2차원을 거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우리는 1차원만으로는 진심을 볼 수 없습니다. 2차원에서 1차원을 보면서 느낌과 의미를 찾아낼 때 비로소 우리가 진심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진심은 상식의 반대편이 아니라 상식을 절실히 껴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김영하의보다를 읽으면 잘 설계된 우회로를 걸었다는 느낌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밝고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정확한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좀 더 살펴보면 독일의 사상가 크라카우어가 말한 대기실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보편적 진실이 맨 끝이라고 했을 때 역사, 문학은 끝에서 두 번째, 즉 대기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기실은 이쪽에서 궁극의 진실이라는 저쪽으로 가기 위한 중간쯤이라 곧바로 철학으로 직행하고자 했다면 굳이 우리가 대기실에 머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중간이 없다고 했을 때 문자 그대로 진심을 알기가 막막하다는 것이 문제로 남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대기실에 머문다고 해서 그 시간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대기실에 들어오기 전의 어떤 경우들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순간들이 생각되지 않거나 기록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대기실의 사유는 곧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순간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영원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삶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떤 순간은 진심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된다면 후회스러운 얄미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고 해서 생각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동시에 생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던 것을 고백하면서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라고 확신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생각이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면 글은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과 맞닿은 진심의 경계, 그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의 독특한 산문은 생각의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우리 가슴 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작가에 따르면 insightoutsight의 차이는 무지에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군중들을 격분시켰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들어보세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는 말! 아웃사이트에서 보자면 가난을 조롱하는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가난에 대하여 무지했는지를 인사이트해보면 정말 쓸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가에게도 어린 시절 부유한 친구로부터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란 지금에 와서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수한 호기심이 어떤 진실을 위한 여닫이쯤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무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아주 간단해보입니다. 삶이 지나치게 기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하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요? 하나, 작가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을 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부자 아빠가난한 아빠를 모두 죽일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집니다. 이러한 의식은 곧 윤리적 생존이 아니라 생존의 윤리 때문입니다. , 작가처럼 정신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옷을 입는 감각이 아니라 옷을 입지 않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패스트패션으로 사라집니다. , 라캉이라고 하면 히스테리자라고 불렀을 것인데 자신의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상태로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을 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걸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지옥이라는 것을 모른 체 살다가 이제야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난데없이 불가능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착시가 아닙니다. 엉뚱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p185)

 

이렇듯 작가는 5년 만의 독특한 산문집에 걸맞게 우주를 떠돌던 정신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가 아니라 누구에게 본 것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단지 생각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작가의 눈으로 진심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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